윌트: 100점의 거인, 20,000의 그림자
필라델피아의 그림자와 탄생
거인의 탄생과 가족의 울타리
1936년 8월 21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미국 건국의 상징적인 도시)의 웨스트 지역에서 윌턴 노먼 체임벌린(Wilton Norman Chamberlain)이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용접공이자 관리인이었고, 어머니는 세탁소에서 일하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윌트는 아홉 남매 중 한 명이었지만, 유독 그의 성장은 남달랐다.
10대가 되었을 때 이미 2미터에 육박하는 키를 자랑했던 그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당시 1940년대와 1950년대 초반, 미국은 여전히 인종 분리(Segregation)가 만연하던 시대였다.
필라델피아는 북부 도시였지만, 윌트가 살던 흑인 거주 지역은 교육과 환경 면에서 백인 지역에 비해 현저히 열악했다.
윌트의 유년기는 '거대함'이라는 축복이자 저주 속에 놓여 있었다.
그는 키가 너무 커서 놀림을 받기도 했고, 종종 숨 쉬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다.
(썰) 어린 윌트는 농구보다 육상(단거리, 높이뛰기)에 더 재능을 보였고, 심지어 배구를 더 좋아했다.
농구는 단지 그의 거대한 신체를 활용하기 쉬운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올리비아(Olivia Chamberlain, 윌트의 강인한 어머니)는 아들이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추기를 원했고, 그를 농구 코트로 밀어 넣었다.
고교 코트를 지배한 '윌티 더 스틸트'
윌트는 오버브룩 고등학교(Overbrook High School, 필라델피아의 명문 고교)에 진학했다.
그의 키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최종적으로 216cm를 넘었다.
코트 위에서 그는 마치 어른이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 |
고교생시절의 윌트 체임벌린 |
그는 고등학교에서만 세 시즌 동안 2,252점을 기록하며, 오버브룩을 56승 3패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이끌었다.
이때 그에게 '윌티 더 스틸트(Wiltie the Stilt, 장대처럼 키가 큰 윌티)'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이 별명을 싫어했는데, 키만 크고 어설프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빅 디퍼(Big Dipper, 북두칠성)'라는 별명을 선호했다.
(썰) 이는 그가 고개를 숙여 낮은 문을 통과하는 모습이 마치 북두칠성 국자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었다.
이 별명은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상징했다.
윌트의 고교 경기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섰다.
당시 인종차별의 심각한 현실 속에서, 윌트는 흑인 사회의 영웅이자 희망이었다.
수많은 백인 관중들이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으로 몰려들었고, 그가 덩크슛(Dunk Shot)을 터뜨릴 때마다 경기장은 인종을 넘어선 환호성으로 폭발했다.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사회적 편견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캔자스 대학과 NCAA의 그림자
고교를 졸업할 무렵, 미국 전역의 200개가 넘는 대학이 윌트를 영입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는 고심 끝에 캔자스 대학(University of Kansas, 캔자스주 로렌스에 위치한 명문 농구 대학)을 선택했다.
그곳에는 전설적인 감독 포그 앨런(Phog Allen, 캔자스 농구의 대부)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은 그에게 많은 좌절을 안겨주었다.
당시 NCAA(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 미국 대학 스포츠 협회) 규정상 신입생은 경기에 뛸 수 없었고, 1955-1956 시즌을 벤치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이 시기를 '낭비된 시간'이라 여겼으며, 끊임없이 자신이 대학에 온 이유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
1957년, 마침내 2학년이 되어 코트에 나선 그는 곧바로 대학 농구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는 NCAA 토너먼트 결승(Finals)까지 팀을 이끌었으나, 라이벌 학교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UNC)과의 3차 연장전 끝에 아쉽게 패배했다.
이 패배는 윌트에게 '혼자만의 힘으로는 우승할 수 없다'는 첫 번째 쓰라린 교훈을 안겨주었다.
캔자스는 필라델피아와 달리 인종 분리가 더욱 노골적인 지역이었다.
윌트는 캠퍼스에서는 스타였지만, 도시로 나가면 식당에서조차 서비스받을 수 없는 현실에 직면했다.
그는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주변 흑인 친구들과 함께 시위(Protest)를 주도하고 식당 보이콧을 벌였다.
그의 외로운 투쟁은 그의 사회적 책임감을 키웠지만, 동시에 그를 냉소적이고 고립된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겉으로는 유쾌한 거인이었지만, 속으로는 사회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다.
![]() |
캔자스 시절(1957 NCAA) 위키미디어 |
대학 생활의 종언과 프로 진출 (NBA 드래프트)
윌트는 대학을 3년 만에 중퇴하고 프로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대학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며, NCAA의 아마추어리즘 규정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논란) 당시 대학 리그는 그의 압도적인 플레이를 막기 위해 규칙을 개정(예: 자유투 라인에서의 덩크 금지)해야 할 정도로 그의 존재는 리그 자체를 위협했다.
1958년, 그는 NBA 규정상 아직 드래프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잠시 NBA의 전신 격인 할렘 글로브트로터스(Harlem Globetrotters, 전 세계를 돌며 농구 묘기를 선보이는 팀)에 합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쇼맨십과 팀워크를 배웠고, 프로 경기의 거친 세계를 경험했다.
![]() |
글로브트로터스(프로 전환 전 과도기) 위키미디어 공용 |
1959년, 윌트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Philadelphia Warriors, 현재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전신)의 지역 연고 지명(Territorial Pick, 연고 지역 선수를 우선 지명하는 제도)으로 NBA에 입성했다.
그의 연봉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30,000달러였는데, 이는 그가 단순히 선수 이상의 흥행 보증 수표임을 의미했다.
NBA는 이 거인의 등장을 숨 막히는 기대감 속에 맞이했다.
그는 NCAA 무대가 자신의 압도적 신체 능력에 맞춰 규정을 ‘해석’하자 곧바로 역(逆)적응이 뒤따른다고 느꼈다.
실제로 대학·프로 무대는 그의 시대를 거치며 골텐딩·공격자 간섭 규정을 강화했고(대학은 자유투 시 슈터가 림·백보드 접촉 전 ‘라인 평면’을 넘지 못하도록 집행을 엄격화), NBA는 훗날 1964년에 라인을 12피트에서 16피트로 넓히는 이른바 ‘윌트 룰’까지 도입한다. (덩크 자체 금지는 1967–76년 NCAA의 ‘덩크 금지’로, 이는 알신더(카림) 시대 조치다.)
100점의 신화와 영원한 라이벌
코트를 지배한 괴물: 압도적인 스탯
1959년, 윌트 체임벌린이 NBA에 데뷔하자마자 리그는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그는 첫 시즌에 평균 37.6득점과 27.0리바운드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곧바로 신인상(Rookie of the Year)과 정규 시즌 MVP를 동시에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했다.
그의 플레이는 단순히 잘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골밑에서 240cm가 넘는 팔 길이를 이용해 덩크와 레이업을 꽂아 넣었고, 리바운드는 그의 손에 끌려오는 공처럼 보였다.
수비수들은 그의 몸에 부딪히기만 해도 나가떨어졌다.
그는 농구의 신체적 한계를 재정의했다.
![]() |
워리어스 루키 시즌 무드(1960 전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ilt_Chamberlain_1960.jpg |
1961-1962 시즌, 윌트는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 기록을 세운다.
그는 한 시즌 평균 50.4득점과 25.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썰) 이 시즌 그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단 8분만 쉬었고, 이는 그의 스태미나와 체력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1967–68 시즌에는 센터로는 사상 최초로 리그 어시스트 1위(평균 8.6)를 기록해 ‘득점 괴수’에서 ‘전천후 중심’으로의 변신을 증명했다.
![]() |
1963 덩크 장면 |
100점 게임의 탄생
1962년 3월 2일, 윌트는 허시(Hershey, 펜실베이니아의 소도시)에서 뉴욕 닉스(New York Knicks)를 상대로 NBA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경기를 펼쳤다.
당시 허시는 필라델피아와 뉴욕의 중간 지점이었고, 경기장에는 불과 4,000명 미만의 관중만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경기가 TV로 중계되지 않았고, 기록을 위한 카메라맨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논란) 이 전설적인 경기는 오직 라디오 중계와 당시 현장에 있던 소수의 기자들의 증언만으로 남아있다.
경기는 펜실베이니아 허시 스포츠아레나에서 관중 4,124명 앞에 열렸고 TV 중계는 없었다(라디오 중계 일부 음원이 현재까지 전한다).
경기 내내 윌트는 득점을 멈추지 않았고, 경기 종료 46초를 남기고 역사적인 100점을 달성하는 덩크슛을 성공시켰다.
100점이 되는 순간, 관중들이 코트로 쏟아져 들어와 경기는 중단되었고, 그가 100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찍은 흑백 사진만이 그날의 신화를 증명한다.
![]() |
100점 경기(허시 아레나) |
잠시 뒤 경기는 재개되어 정식으로 끝났다.
당일 28/32의 자유투 성공(시즌 평균과 대비되는 이례적 정확도)도 신기록의 결정적 변수였다.
숙명적 라이벌: 빌 러셀과의 그림자
윌트의 시대는 동시에 빌 러셀(Bill Russell, 보스턴 셀틱스의 전설적인 센터)의 시대였다.
빌 러셀은 윌트보다 2년 먼저 데뷔했으며, 셀틱스 왕조(Celtics Dynasty,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셀틱스의 절대적 지배 기간)를 이끈 인물이었다.
체임벌린 vs. 러셀의 라이벌 관계는 농구 역사의 가장 큰 주제였다.
윌트: 개인 기록, 공격력, 신체적 우월성의 상징.
러셀: 팀워크, 수비, 우승 반지(Championship Rings)의 상징.
![]() |
윌트 & 빌 러셀 매치업 |
정규 시즌에서 윌트가 러셀을 압도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러셀이 이끄는 셀틱스가 윌트의 팀을 번번이 좌절시켰다.
언론과 대중은 윌트에게 '이기적인 선수'라는 비판을 가했다.
"왜 윌트는 50득점을 하고도 지는가? 러셀은 15득점만 하고도 우승하는가?"
이 비난은 윌트의 심장을 깊이 파고들었고, 그의 경력 내내 '우승'에 대한 강박을 심어주었다.
개인적인관계
놀랍게도 코트 밖에서 윌트와 러셀은 친한 친구였다.
그들은 상대방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언론의 마찰은 그들의 우정을 훼손했고, 한때 서로 연락을 끊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코트 밖에선 식사와 통화를 나누던 벗이었지만, 언론의 ‘반지 vs. 기록’ 구도가 때로는 우정을 상하게 해 한동안 절연하는 일도 있었다.
윌트는 자신이 코트 밖에서 겪는 인종차별에 대한 고뇌를 러셀과만 나눌 수 있었다.
![]() |
알리 대 체임벌린 1967 보도사진 |
스캔들의 시작: 통제되지 않는 사생활
윌트의 코트 밖 생활은 그의 경기력만큼이나 폭발적이었다.
그의 거대한 체격, 부와 명성은 수많은 여성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한때 "나는 여자들에게 매료되었고, 여자들도 나에게 매료되었다"고 서슴없이 말했으며, 이는 그의 성적인 자유분방함을 상징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결혼하지 않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사생활은 항상 파티, 사치, 그리고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미 이 시기에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한 썰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이는 20세기 미국 스포츠 스타의 자유로운 사생활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과 도덕적 비난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거인의 이주와 20,000의 폭풍
필라델피아로의 귀환, 그리고 LA로: 팀의 방랑과 이적
1965년, 윌트는 필라델피아 76ers(Philadelphia 76ers, 워리어스가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긴 후 창단된 팀)로 이적했고, 마침내 1967년 첫 번째 NBA 우승을 차지하며 러셀의 셀틱스 왕조를 잠시 멈춰 세웠다.
그는 승리의 순간, 자신이 '이기적인 루저'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 |
1967 필리 시절 윌트 |
그러나 그의 방랑은 멈추지 않았다.
1968년, 그는 서부의 화려한 도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LA)의 레이커스(Los Angeles Lakers)로 이적했다.
LA는 윌트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사생활을 받아들이기에 완벽한 도시였다.
레이커스에서 그는 제리 웨스트(Jerry West, 레이커스의 전설적인 가드), 엘진 베일러(Elgin Baylor, 우아한 플레이로 유명했던 포워드)와 같은 슈퍼스타들과 팀을 이루었다.
이제 윌트의 목표는 득점왕이 아니라 우승이었다.
그는 득점 대신 리바운드와 수비, 패스에 집중하며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참고로 1971–72 시즌 도중 ‘레이커스의 또 다른 기둥’ 엘진 베일러가 개막 9경기 뒤 은퇴했지만, 팀은 이후 33연승의 대기록을 쓰며 오히려 결속을 다졌다.
![]() |
엘진베일러, 윌트체임벌린, 제리웨스트 |
1970년대: 20,000 여성과의 스캔들
윌트 체임벌린의 경력 중 가장 큰 논란이자, 그의 사생활이 사회적 비난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은퇴 후였다.
1991년, 윌트는 자신의 자서전 《나를 보라(A View From Above)》를 출간하면서 "나는 20,000명의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논란) 이 주장은 미국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당시 55세였던 윌트의 말을 단순히 계산하면, 그가 15세 이후부터 매일 거의 1.2명의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는 의미가 된다.
이 주장은 곧바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여성 단체와 평론가들은 그의 주장이 여성을 성적 도구로 대상화하고, 자신의 성적 정복을 자랑하는 극도의 이기심의 발로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1990년대 초반은 에이즈(AIDS)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의 주장은 무책임하고 위험한 성생활을 조장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썰) 윌트는 이 주장을 '진실을 말한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그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일부 전기 작가들은 윌트가 당시 스포츠 스타들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한 위선적인 사회적 시선에 의도적인 충격 요법을 가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스캔들은 윌트의 도덕적 평가에 영구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훗날 “숫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취지로 수습을 시도했지만, 대중적 이미지는 쉽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1972년: 레이커스의 위대한 승리
수많은 논란 속에서도 윌트는 코트 위에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려 했다.
그는 LA 레이커스에서 세 차례 파이널(Finals)에 진출했지만, 번번이 뉴욕 닉스에게 패배하며 '파이널 징크스'에 시달렸다.
1971-1972 시즌, 마침내 레이커스팀은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NBA 역사상 최다인 3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리그를 지배했다.
윌트는 이 시즌 평균 득점은 14.8점으로 낮아졌지만, 평균 19.2개의 리바운드와 놀라운 수비를 기록하며 팀의 기둥 역할을 했다.
파이널에서 레이커스는 다시 뉴욕 닉스를 만났다.
윌트는 노련한 플레이와 리더십으로 팀을 이끌었고, 마침내 닉스를 꺾고 두 번째 NBA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은 윌트에게 단순한 승리 이상의 의미였다.
'개인의 영광'만을 좇던 괴물이 마침내 '팀을 위한 희생'을 통해 얻어낸 승리였기 때문이다.
이 순간, 윌트는 비로소 '이기적이다'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우승 후 기자회견에서 "이 반지가 가장 달콤하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나만을 위해 뛰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레이커스의 우승과 함께 체임벌린은 1972년 파이널 MVP를 수상했다(그가 통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파이널 MVP).
은퇴와 불멸의 유산
은퇴 후의 삶: 코트 밖의 거인
1973년, 37세의 윌트 체임벌린은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는 배구 선수(프로 배구 리그에 참여)로 활약하기도 했고, 영화《코난 더 디스트로이어(Conan the Destroyer)》에서 배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와 함께 출연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의 이색적인 이력은 그의 인생이 코트 위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
코난 더 디스트로이어 |
윌트는 LA의 벨 에어(Bel Air) 언덕 위에 '빅 디퍼'라는 이름의 초호화 저택을 지었다.
집 전체에 그의 키에 맞춰 제작된 가구와 문들이 있었고, 집 안에는 수영장이 집 안으로 이어지는 등 그의 기이한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은퇴 직후엔 ABA 샌디에이고 콘키스타도어스 감독을 맡아(1973–74) 벤치에도 섰다.
영원한 논쟁의 중심
윌트 체임벌린은 농구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가장 큰 과실은 팀워크와 코칭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코치보다 더 똑똑하다고 여겼으며, 팀 시스템에 완벽하게 녹아들기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더 중요시했다.
이것이 그의 우승 횟수(총 2회)가 라이벌 러셀(11회)에 비해 현저히 적은 주된 이유로 지목된다.
20,000명 스캔들은 그의 사후까지도 그의 이름을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의 사생활은 문란함의 대명사가 되었고, 그의 업적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또 한 가지 공정성 논점은 ‘참가 시간’이다.
그의 기록은 엄청난 출전 시간(1961–62 시즌 평균 48.5분)에 기대어 쌓였다는 반론이 있으나, 이는 동시에 ‘그럴 체력·내구성을 갖춘 선수’였다는 역증명이기도 하다.
윌트 체임벌린이 남긴 문화적 영향은 그의 기록만큼이나 거대했다.
그는 덩크슛을 대중화시킨 선수였다.
그의 압도적인 플레이는 NBA가 룰을 개정하고, 경기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예: 골텐딩 규칙 강화)
1960년대 윌트는 농구 코트에서 백인 선수들을 압도하는 흑인 운동선수의 상징이었다.
그의 성공은 후대 흑인 운동선수들이 프로 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불멸의기록
그가 남긴 기록들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평균 50.4득점 시즌, 100점 한 경기 득점, 한 경기 55리바운드, 그리고 3만 점 이상 득점 등, 대부분의 기록은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멸의 평가를 받는다.
윌트는 기록의 측면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 선수이다.
그의 존재는 덩크·골텐딩·3초 수비 규정 해석과 페인트존 폭 변화 등 제도 자체에 손질을 가하게 했고, 흑인 슈퍼스타가 북미 스포츠의 정점에 서는 선례를 만들었다.
고독한 거인의 최후
1999년 10월 12일, 윌트 체임벌린은 63세의 나이로 LA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은 그의 삶처럼 조용하고 갑작스러웠다.
그의 장례식에는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빌 러셀을 비롯해 수많은 농구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러셀은 추도사에서 그들의 복잡했지만 깊었던 우정을 회고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사인은 울혈성 심부전으로 기록되었다.
장례식장 연단에 선 러셀은 “우린 서로를 필요로 했고, 서로 덕에 더 높이 올랐다”고 회고했다.
윌트 체임벌린의 삶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천재성'과 '고독'이라는 영원한 정치학적, 사회학적 주제를 던져준다.
그는 자신이 세운 기록의 탑 아래에 스스로를 가두었고, 100점이라는 영광과 20,000명이라는 논란을 모두 짊어진 채 역사에 남았다.
그는 냉소적이었고, 때로는 오만했지만, 누구보다 조국과 자신의 재능을 사랑했던 '농구 코트의 마지막 거인'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과 성취, 그리고 그 대가에 대한 가장 극적인 영화적 서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본 글은 NBA 공식 기록·박스스코어, Basketball-Reference 등 통계 아카이브와 동시대 신문·전기(자서전 포함)를 바탕으로, 확인 가능한 사실 중심으로 서술했습니다.
불확실하거나 이견이 큰 대목은 본문에서 (논쟁)·(전승)·(추정) 등으로 즉시 표기했습니다.
경기 규정 변화(예: 골텐딩·페인트존 확대)처럼 ‘개인 한 명의 영향’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사안은 대표 해석을 병기하고 과도한 인과관계를 지양했습니다.
인터뷰 인용과 회고담은 출처가 상이할 때 보수적으로 요약했으며, 인물의 내면·대화 등 극적 장면은 사실 흐름을 해치지 않는 최소 범위의 재구성입니다.
오류 제보와 추가 사료 제시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