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 항우, 패왕에서 비극적 영웅으로: 생애와 문화적 유산 (Xiang Yu)




 이 글은 『사기(史記) 항우본기』, 『한서』, 그리고 후대 희곡·시문학 자료를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을 포함하였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적 긴장감을 살린 문학적 서술임을 알려드립니다.


장강 남쪽, 초나라 땅 하상(下相) 지방. 

그곳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는 일찍부터 남달랐다. 

이름은 항적(項籍), 

훗날 온 천하가 항우(項羽)라 부르게 될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삼촌 항량(項梁)의 손에서 자랐다.


Xiang Yu - Wikimedia Commons (PD)


어린 시절부터 그는 글과 학문을 멀리했다. 

삼촌이 붓을 쥐여 주었으나, 항적은 금세 내던지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다. 

글자 몇 줄을 외우는 데에도 싫증을 냈다. 

대신 그는 말 위에 오르고, 활을 쏘며, 칼을 휘두르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항량은 혀를 찼다. 

“이 아이는 책으로는 천하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무력으로는 얻을지 모른다.”


그는 장정이 되자, 이미 성인 남자 열 명의 힘을 합친 듯했다. 

키는 장대하고, 팔은 바위처럼 굵었으며, 눈빛은 번개처럼 날카로웠다. 

사람들은 속삭였다. 

“장차 이 사내가 천하를 뒤흔들리라.”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있더냐!”라는 구호가 백성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전국은 불길에 휩싸였다. 

항적과 항량도 깃발을 올렸다. 

진나라의 압정은 이미 백성들의 등을 짓눌렀고, 반란의 불길은 제어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항적은 누구보다 눈부셨다. 

단신으로 수십을 베어넘기며, 군마 위에서 창을 휘두르면 적진이 갈라졌다. 

그는 전투가 끝나면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병사들은 외쳤다. 

“하늘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삼촌 항량은 봉기군의 지도자였으나, 결국 전투에서 전사했다. 

항적은 눈물을 삼켰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기개로 일어서 초나라 부흥군의 장수로 부상했다.


Juluzhizhan map - ©Shingka,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거록대전(鉅鹿大戰). 

항우의 이름을 천하에 각인시킨 전투였다. 

진나라의 장수 장한은 수십만 병력을 거느리고 제후군을 포위했다. 

제후들은 두려움에 떨며 움직이지 못했다.


항우는 결단했다. 

그는 3만 병력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 

그러나 단순히 건넌 것이 아니었다. 

배를 불태우고, 솥을 깨뜨리게 했다. 

병사들은 경악했다. 

“돌아갈 길이 없다니?” 항우는 말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다.”


병사들은 물러설 길 없는 싸움에 목숨을 던졌다. 

전투는 처절했다. 

항우는 선봉에 서서 돌격했고, 그의 칼날은 번개처럼 번뜩였다. 

진군은 무너졌다. 

포위당했던 제후군은 구원받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천하는 항우의 이름에 떨었다.


사람들은 그를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불렀다. 

항우는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고, 제후들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승리의 환호 속에서 항우의 어두운 면모도 드러났다. 

항복한 진군 20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몰살시킨 것이다. 

그의 과감함과 잔혹함이 동시에 드러났다. 

공포는 천하를 잠식했지만, 백성들의 마음은 그에게서 멀어졌다. 

“항우는 두렵다. 그러나 유방은 믿음직하다.” 

사람들은 속으로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항우가 거록에서 진군을 꺾은 후, 그는 마침내 천하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제후들은 그의 군영으로 몰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제 더 이상 항적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불렀다. 

초나라의 후계자로, 패권의 주인으로.


천하는 이미 진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무너진 질서 위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항우는 자신의 군세를 믿고 제후들을 배치하며 왕들을 세웠다.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땅을 나누어주고, 제후들의 지위를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결코 정치적이지 않았다. 

그는 의리를 중시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자신의 감정에 크게 치우쳤다. 

자신을 거역한 자는 가차 없이 멀리 쫓았고, 마음에 든 자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자리를 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으나,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천하를 다스릴 인물인가, 아니면 힘만 앞세운 장수인가?”


이 무렵 또 다른 별이 떠올랐다. 

바로 유방(劉邦)이었다. 

유방은 항우와 달리 무용으로 천하를 떨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평민 출신으로, 늘 술에 취해 거리를 떠돌던 사내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이한 매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는 잘 웃었고, 부하들에게는 관대했으며, 백성들에게는 온화하게 다가갔다.


Liu Bang — Wikimedia Commons (PD)


유방은 진나라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함양에 입성했다. 

그는 진나라의 수도에 들어서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항우와 달리 불필요한 살육을 하지 않았고, 궁궐의 보물에도 손대지 않았다. 

대신 “나는 오직 백성들과 함께 살겠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마음은 서서히 유방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항우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의 힘에 취해 있었다. 

범증(范增), 항우 곁의 책사만이 끊임없이 경고했다. 

“유방은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후일 큰 화가 될 것입니다.”


이 충고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홍문연(鴻門宴) 또는 홍문의 회(鴻門之會)였다.


Hongmen Banquet mural — Luoyang Museum via Wikimedia Commons (PD)


항우는 유방을 불러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겉으로는 화해의 자리였지만, 실상은 함정이었다. 

항우의 진영은 불빛으로 가득했고, 병사들은 칼을 쥐고 있었다. 

범증은 항우에게 눈빛을 보냈다. 

“지금이다.” 

그는 거듭 손가락으로 목을 베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항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회장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유방은 땀을 흘리며 술잔을 들었다. 

그의 부하 장량은 속으로 ‘이제 끝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적처럼 유방은 살아남았다. 

항우는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고, 유방은 구실을 대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후 역사가들은 모두 입을 모았다. 

“홍문연에서 칼을 뽑지 않은 것이 항우의 패착이었다.”


연회가 끝나자 범증은 분노했다. 

그는 항우에게 말했다. 

“패왕께서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치셨습니다. 유방은 반드시 천하를 위협할 자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오히려 그 말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들었다. 


유방은 항우에게 범증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고, 

범증을 제거하기 위해 항우의 사신을 일부러 홀대했다.

유방의 이간질에 넘어가 항우는 범증을 의심하게 되었고, 

결국 범증은 항우 곁을 떠나게 되었다.


항우는 범증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범증은 병을 핑계로 떠나버렸다. 

항우 곁을 지킨 마지막 현자마저 떠나간 것이다.


홍문연 이후, 천하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항우의 서초와 유방의 한(漢). 

이제 본격적인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시작된 것이다.


초기에는 항우가 압도적이었다. 

그의 기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전장에서 항우가 말을 타고 돌격하면 적진은 갈라졌다. 

유방은 번번이 패했고, 도망치듯 물러났다.


그러나 유방은 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패배해도 다시 일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믿었다. 

그는 패했지만, 백성들에게 약탈을 하지 않았고, 부하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패전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의 곁에 모였다.


반면 항우는 승리했으나, 잔혹함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항복한 군을 몰살시키고, 도시를 불태웠다.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했으나, 마음은 점점 멀어졌다.


유방의 곁에는 뛰어난 인재들이 있었다. 

장량은 계략을 내었고, 소하는 행정을 안정시켰으며, 한신은 전장의 신이라 불렸다. 

유방은 이들을 포용했다. 

반면 항우는 뛰어난 부하가 있어도 의심했고, 끝내 그들을 몰아냈다. 

범증의 사례가 바로 그랬다.


여기서 후대 사람들이 항우와 관련해 자주 인용하는 고사가 있다. 바로 토사구팽(兔死狗烹)이다.


원래 이 말은 춘추시대 범려(范蠡)가 월왕 구천에게 남긴 말이었다.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높이 나는 새가 다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진다. 

적국이 멸망하면 모신은 버려진다.” 

즉, 큰일이 끝나면 공신도 버려진다는 뜻이다.


후대는 이 말을 항우와 범증의 관계에도 빗대었다. 

범증은 누구보다 충성스럽게 항우를 보좌했으나, 끝내 의심을 받아 쓸쓸히 물러났다. 

항우의 고립은 이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초한전쟁은 점점 격렬해졌다. 

항우는 여전히 강했으나, 유방은 지칠 줄 몰랐다. 

전장은 수없이 뒤집혔다. 

그러나 천하의 민심은 유방 쪽으로 기울어갔다. 

항우는 여전히 패왕이었지만, 그의 왕좌는 서서히 모래 위에 세운 탑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Chu-Han Contention map — ©SY,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초한전쟁은 몇 년 동안 이어졌다. 

항우는 여전히 전장에서 무적이었다. 

그러나 유방은 끈질겼다. 

패하면 다시 일어났고, 잃으면 되찾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람을 얻는 데 탁월했다. 

장량의 지략, 소하의 내치, 한신의 전술. 이 셋은 유방의 양 날개였다.


반대로 항우는 점점 고립되었다. 

그는 범증을 의심하여 잃었고, 다른 모사들도 멀리했다. 

유방의 진영이 점점 단단해지는 동안, 항우의 진영은 강하되 좁아졌다. 

그는 힘으로는 언제나 승리했으나, 전략과 민심에서는 점점 패배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한신(韓信)의 등장이었다. 

한신은 원래 무명 병졸에 불과했으나, 소하가 그를 발탁했다. 

유방은 처음에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장량과 소하의 강력한 추천에 결국 장군으로 삼았다. 

이후 한신은 기적 같은 승리를 연이어 쌓아갔다. 

배수진(背水陣), 기습, 기만전술… 그의 이름은 전장을 뒤흔들었다.


항우가 천하의 절반을 손에 넣을 때, 한신은 나머지 절반을 유방의 깃발 아래 모았다. 

초나라의 세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항우는 여전히 굴하지 않았다. 

그는 전투가 있을 때마다 직접 앞장섰다. 

창을 들고 돌격하는 그의 모습은 전장의 신과 같았다. 

수천의 적이 그의 앞에서 무너졌다. 

병사들은 여전히 그의 용맹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전쟁은 단순히 용맹으로만 결정되지 않았다. 

보급, 전략, 외교, 민심. 항우는 이 모든 부분에서 점점 뒤처지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장면이 다가왔다. 

해하(垓下) 전투.


항우의 병력은 이제 수만에 불과했다. 

반면 유방과 한신, 그리고 제후들의 연합군은 수십만이었다. 

전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밤이 되자, 사방에서 노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초나라의 노래였다. 

유방이 포로로 잡은 초나라 사람들을 모아 노래하게 한 것이었다. 

항우의 병사들은 고향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 집이 이미 모두 함락된 것인가?” 

사기가 꺾였다.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흩어졌다.


이 장면에서 생겨난 말이 바로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뜻한다.


항우는 여전히 결연했다. 

그는 남은 병사들과 함께 돌격했다. 

그러나 수적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하나둘 쓰러지고, 마침내 항우는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강가로 내몰렸다.


그곳이 바로 오강(烏江)이었다.


강을 건너면 살 수 있었다. 

배를 지키던 사람은 항우에게 말했다. 

“패왕이시여, 어서 강을 건너십시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맑았다. 

“하늘이 이미 나를 버렸구나. 어찌 강을 건너 부끄럽게 살겠는가?”


그의 곁에는 마지막까지 남은 연인, 우미인(虞美人)이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항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항우는 검을 들어 노래했다.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건만, 때가 오지 않으니 말이 달리지 않는구나.

 말이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 것인가.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하랴.”


그 목소리는 밤하늘을 울렸고, 병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우미인은 그의 노래가 끝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항우는 그녀의 시신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그는 마지막 돌격에 나섰다. 

백여 명의 적을 베고, 수십의 적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끝내 그는 포위당했다. 

항우는 스스로 목을 찔러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항우의 죽음은 곧 유방의 승리였고, 한나라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유방조차 항우를 가볍게 보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항우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다만 하늘이 그를 돕지 않았을 뿐이다.”


해하 전투의 패배와 오강에서의 자결은 항우 개인의 몰락이자, 동시에 초나라의 몰락이었다. 

유방은 천하를 손에 넣었고, 마침내 한 왕조의 기틀을 세웠다. 

그러나 승자가 패자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유방은 항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항우는 천하의 영웅이었다. 다만 하늘이 그를 돕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말에는 경외와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유방은 항우를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존중했다. 

항우가 보여준 힘과 기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나라가 세워진 뒤, 항우의 이야기는 곧 전설로 바뀌었다. 

그의 이름은 ‘패왕(覇王)’으로 남았고, 

백성들은 그를 두려움보다는 애틋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항우가 남긴 고사와 속담


사면초가(四面楚歌)

해하 전투의 마지막 밤, 

항우의 병사들이 초나라 노래를 듣고 사기가 무너진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이 말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상황을 뜻하게 되었다.


오강자결(烏江自決)

강을 건너면 살 수 있었으나, 

항우가 끝내 건너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에서 유래했다. 

오늘날까지 비극적 최후, 혹은 자존심을 지킨 죽음을 의미한다.


토사구팽(兔死狗烹)

원래 춘추시대 범려가 월왕 구천에게 한 말이다.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높이 나는 새가 다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진다. 

적국이 멸망하면 공신은 버려진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항우가 충직한 책사 범증을 내친 사건에 빗대어 이 고사를 즐겨 인용했다. 

항우가 범증을 버린 순간부터 그의 몰락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문학 속의 항우


사마천은 『사기』 항우본기에서 그를 비극적 영웅으로 그렸다. 

그는 항우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기록했다. 

무력과 기개는 천하제일이었으나, 정치와 덕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동시에 사마천은 항우를 누구보다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사기』의 수많은 인물 중 항우의 본기는 가장 문학적이고, 독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당·송대에 들어서 시인들은 항우를 즐겨 읊었다. 

이백은 항우의 기개를 노래하며 “영웅은 시대를 만나야 한다”고 탄식했다. 

두보는 항우의 패배를 두고 “호걸도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고 적었다. 

항우는 시인들에게 있어 ‘비극적 영웅’의 원형이었다.


예술과 연극 속 항우


중국 전통 예술에서 항우는 특히 경극과 희곡을 통해 살아남았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패왕별희(覇王別姬)이다. 

해하 전투의 패배 직후, 항우와 연인 우미인의 마지막 이별을 그린 이야기다. 

우미인이 자결하자 항우는 통곡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중국 예술에서 가장 슬프고 장엄한 장면으로 전해진다.


Peking Opera ‘Farewell My Concubine’ — ©Vinko Li, CC BY-SA 2.0, via Wikimedia


패왕별희는 원래 경극 무대에서 연기되던 장면이었지만, 청대 이후 더욱 널리 퍼졌다. 

20세기에는 경극의 대표 레퍼토리가 되었고, 나중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항우와 우미인의 이야기는 사랑과 영웅의 비극이 결합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민간 전승과 항우의 이미지


중국 민간에서는 항우를 여전히 힘과 용맹의 상징으로 기억했다. 

아이가 장사(壯士)처럼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는 종종 “항우 같다”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동시에 “항우처럼 끝내지 말라”는 말도 전해졌다. 

즉, 힘은 강했으나 덕이 부족해 결국 몰락했다는 교훈이었다.


항우의 고향 일대에는 지금도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제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이고, 술잔이 올려진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패자의 제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중국인들의 마음속에서 항우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에 남긴 흔적


항우의 이야기는 중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와 일본에도 전해졌다. 

고려와 조선의 학자들은 『사기』를 통해 항우의 삶을 접했고, 그의 기개와 비극을 동시에 배우려 했다. 

“항우는 힘은 있었으나 덕이 없었다”는 교훈은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자주 인용되었다.


일본에서도 항우는 무사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비록 패자였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존심을 지킨 영웅. 

이는 사무라이 정신과 맞닿아 있었기에 일본 문학과 극예술 속에서도 항우는 자주 언급되었다.


끝으로..


항우는 천하를 얻을 기회가 있었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그는 산을 뽑을 힘을 지녔으나, 민심을 얻지 못했고, 전장을 지배했으나 정치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젊은 나이에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비극이 항우를 영원히 살게 했다. 

만약 그가 천하를 얻었다면, 그는 단지 한 왕조의 시조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패배했고, 패배 속에서 전설이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항우의 이름은 울림을 가진다. 

그의 최후는 인간의 한계를, 동시에 영웅의 고귀함을 보여준다. 

힘과 기개, 사랑과 절망, 승리와 패배가 뒤섞인 삶. 

그것이 바로 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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