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흑사병의 모든 것: 발병 원인부터 르네상스의 시작까지 (the Black Death)



 이 글은 『데카메론』, 『흑사병 연대기』, 『장 보카치오 기록』, 

그리고 여러 중세 사료를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적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347년, 검은 죽음이라 불린 병은 유럽의 항구에 상륙했다. 

페스트균이라는 작은 미생물이 쥐의 벼룩을 타고 전해진 것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병에 걸린 이는 림프절이 검게 부풀고, 고열과 고름에 시달리다 단 며칠 만에 죽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흑사병”이라고 불렀다. 

병의 시작은 중앙아시아라 했고,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흘렀다. 

몽골 군이 흑해 연안 카파 항구를 포위했을 때, 병든 시체를 성 안에 던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어쨌든 배가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에 닿자, 죽음은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피렌체의 여름은 뜨겁고 향기로운 바람이 가득했지만, 

흑사병의 그림자는 아름다운 도시를 순식간에 침묵시켰다. 

보카치오는 기록했다. “부모는 자식을 버리고, 자식은 부모를 버렸다.” 

시장의 가판대는 비어 있었고, 성당의 종소리는 장례를 알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하루 수백 명이 쓰러졌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구분 없이 쓰러졌고, 그들의 집 앞에는 십자가와 검은 표시가 남았다.


런던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사람들은 템스 강을 따라 시체를 운반했다.

 장례를 치를 수 없어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고, 수백 구의 시체가 함께 던져졌다. 

그곳에서는 계급도, 직업도, 나이도 의미가 없었다. 

기사와 농노가 같은 구덩이에 묻혔다.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실이 이토록 명확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아비뇽의 교황청은 절망의 심장부였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매일 장례 미사를 집전했고, 사제들은 연일 무너졌다. 

사람들은 병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믿었다. 

별자리와 공기의 부패, 신의 진노가 원인이라 생각했다. 

교황은 거대한 불길 속에서 기도하며 병이 다가오지 않기를 빌었다. 

이 무력한 모습은 사람들의 신앙을 흔들었다. 

교회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서서히 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


독일의 쾰른에서는 광신이 치달았다.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다. 

집과 회당이 불탔고, 살아남은 자들은 추방되었다.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한 대중은 희생양을 만들며 두려움을 달랬다. 

그러나 병은 멈추지 않았다.


프라하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처음엔 병이 덜 번졌고, 사람들은 “신의 은총”이라 믿었다. 

순례자들이 몰려들었지만, 이내 병은 도시를 덮쳤다. 

순례자들은 쓰러졌고,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흑사병은 신의 선택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사람들의 대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의사들은 가죽 마스크에 긴 부리를 달아 그 안에 약초를 채워 넣고 거리를 걸었다. 

나쁜 공기(미아스마)가 병을 옮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은 구원자가 아니라 죽음을 예고하는 새처럼 보였다. 

민간 요법도 다양했다. 

마늘과 식초, 향을 몸에 두르고, 심지어는 병든 자의 피를 마시면 면역이 생긴다고 믿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효과가 없었다.




종교적 대응도 달랐다. 

어떤 수도자들은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때리며 거리를 돌았다. 

피 흘리는 행렬은 신의 분노를 달래려 했지만, 오히려 병을 확산시켰다. 

이들은 ‘플라겔란트’라 불렸다. 

반대로 일부는 쾌락에 빠졌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술과 향락으로 남은 삶을 즐기자는 것이었다. 

도시는 공포와 광신, 쾌락과 절망이 뒤섞인 혼돈의 무대가 되었다.




예술과 문학은 이 재앙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응답했다. 

성당의 벽에는 해골이 사람들과 함께 춤추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가 그려졌다. 

이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경고였다. 

“죽음은 너희 모두를 데려간다.” 

문학에서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대표적이다. 

열 명의 젊은이가 병을 피해 교외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작품은, 

공포 속에서도 인간이 삶과 유희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경제와 사회는 완전히 달라졌다. 

노동력이 줄자 농노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깨달았다. 

영주는 더 이상 명령할 수 없었고, 농노들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떠났다. 

영국에서는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나 “우리는 더 이상 예속되지 않는다”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봉건제의 근간이 흔들렸고, 장원 경제는 붕괴했다. 

대신 도시 상공업과 무역이 힘을 얻었다. 

이는 르네상스의 토대가 되었다.




종교 권위의 붕괴는 사상적 변화를 낳았다. 

교회가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절대적 신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신앙 운동이 태어났다. 

일부는 신비주의에 빠졌고, 일부는 개인과 신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했다. 

이 변화는 훗날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루터가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쳤을 때, 

그 배경에는 흑사병으로 무너진 교회의 권위가 있었다.


의학에서도 새로운 싹이 움텄다. 

베네치아에서는 항구에 들어오는 배를 40일간 격리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quaranta giorni(40일)’에서 유래한 ‘quarantine(검역)’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때 생겼다. 

이후 도시들은 하수도와 상수도를 정비하고, 거리 청소를 행정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보건 행정의 기초는 흑사병의 참극 위에서 세워졌다.




흑사병은 인류의 인구 구조를 바꾸었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고, 어떤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개인의 가치가 강조되었고, 예술과 학문은 인간 중심으로 이동했다. 

르네상스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 죽음의 바다에서 솟아난 꽃이었다.


현대의 팬데믹은 흑사병을 떠올리게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격리, 마스크, 백신이 일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14세기를 기억했다. 

바이러스와 세균을 아는 시대조차 흔들렸듯, 

원인을 모른 채 공포에 휩싸였던 중세인들의 절망은 훨씬 더 깊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새로운 길을 찾았다. 

병의 원인을 몰랐지만, 검역과 위생 제도를 만들었고, 사회를 바꾸었으며, 르네상스와 근대를 열었다.


흑사병은 인류에게 묻는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공포와 광신, 폭력과 희생, 창조와 혁신. 모든 답이 동시에 나왔고, 

그 모순된 답들이 오늘의 세계를 만들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의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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