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것 없는 지혜, 한국인의 순대국밥 이야기 (Sundae Gukbap)



 이 글은 《동국세시기(1849, 홍석모, 설명: 조선 후기 풍속을 기록한 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1924, 방신영, 설명: 한국 최초의 종합 요리책)》, 

《세계 음식문화사》, 각종 음식사 연구자료를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뜨거운 뚝배기 위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선지와 곱창, 순대와 머릿고기가 가득 담긴 국물 위로 다진 파가 뿌려진다.

한 숟갈 국물을 떠 입안에 넣으면, 뼈와 살을 오랜 시간 고아낸 깊은 맛이 입안을 감싼다.

밥을 말아 크게 떠먹으면 허기와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순대국밥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니다.

그릇 속에는 한국인의 생활사, 가난과 지혜, 공동체의 흔적이 녹아 있다.

“도대체 순대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걸까.”


출처 : https://blog.naver.com/croxriver/130181135385

돼지의 창자에 곡물이나 고기를 채워 넣는 방식은 인류 공통의 지혜였다.

로마 시대의 《아피시우스 요리서》(로마 제정기의 대표적 요리책)에도 

피를 넣은 소시지 요리가 기록돼 있다.

게르만 부족들은 축제에서 피소시지를 먹었고, 독일의 블루트부르스트(피 소시지), 영국의 블랙푸딩, 

프랑스의 부댕 누아르, 스페인의 모르시야, 폴란드의 카슈카가 지금도 전해진다.

몽골 초원에서도 양의 내장에 곡물과 피를 넣어 삶아낸 음식이 있었다.

고기를 한 번에 다 소비할 수 없었던 시대, 내장을 활용한 ‘소시지’는 저장과 영양의 지혜였다.


한국의 순대 기록은 조선 후기 문헌에서 확인된다.

《동국세시기》에는 돼지의 창자에 선지와 잡곡, 채소를 넣어 삶아 먹는 풍습이 실려 있다.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거나 잔치를 할 때, 버릴 것이 없도록 내장까지 음식으로 활용했다.

겨울철 농한기, 뜨끈한 순대는 농민들의 영양 보충에 귀중했다.

즉, 한국 순대는 서민의 생활 속에서 ‘버릴 것이 없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흔히 보는 당면 순대는 근대 이후의 발명이다.

1924년 방신영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순대’ 조리법이 소개되었으나, 

속재료는 메밀, 선지, 두부, 채소였고 당면은 없었다.

해방 이후 감자가 대량 재배되고, 전분 가공 기술이 퍼지면서 값싸고 

배부른 당면이 순대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한국전쟁(1950~1953) 직후, 미군 물자와 전분 산업이 결합하며 당면 순대는 빠르게 대중화되었다.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Sundae_(sausage)#/media/File:Sundae-guk.jpg


순대국밥은 또 다른 길을 걸었다.

돼지를 잡으면 뼈와 머리, 내장이 남았다.

농민과 상인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뼈와 머리를 오래 고아 구수한 국물을 만들고, 순대와 내장을 넣어 끓였다.

거기에 밥을 말아 먹으면 하루를 버틸 힘이 생겼다.

막노동꾼과 상인들의 한 끼로, 순대국밥은 일상 속에서 살아났다.


지역별 차이도 흥미롭다.

전라도식은 새우젓을 풀어 감칠맛을 냈다.

충청도에서는 매콤한 양념장을 넣어 얼큰하게 즐겼다.

경상도는 들깨가루를 듬뿍 넣어 고소한 맛을 살렸다.

서울은 사골 위주의 맑고 담백한 국물을 추구했다.

각 지역의 농산물과 입맛, 기후가 순대국밥에 반영된 것이다.


‘순대’라는 이름은 ‘순(腸, 창자)’과 ‘대(袋, 주머니)’의 합성으로 본다.

즉, ‘창자 주머니 음식’이라는 뜻이다.

서민의 말 속에서 오래 굳어져 내려왔다.


근현대 순대의 역사는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빼놓을 수 없다.

전쟁 직후, 배고픔 속에서 값싼 당면과 잡재료로 만든 순대는 서민들의 허기를 달랬다.

1950~60년대 서울 청계천, 인천 부두, 부산 자갈치시장에는 순대국밥집이 늘어서 있었다.

노동자들이 점심에 한 그릇을 비우고 다시 일터로 향했다.

순대국밥은 산업화 시대의 연료였다.




1970~80년대 도시의 밤거리, 포장마차가 늘어나며 순대는 또 다른 아이콘이 되었다.

김이 오르는 냄비 속 순대는 떡볶이와 어묵과 함께 한국 길거리 음식을 대표했다.

술자리를 마친 회사원, 시험을 끝낸 학생, 연인들까지 순대 앞에 모였다.

순대는 더 이상 잔치 음식이 아니라, 일상의 위로였다.


정치와 문화 속에서도 순대국밥은 자주 등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근처 순대국밥집을 자주 찾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소탈한 이미지와 맞물려 순대국밥은 ‘서민 대통령’의 상징이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선거 유세에서 시민들과 순대국밥을 함께 먹으며 ‘국밥 정치’라는 말이 나왔다.

정치인뿐 아니라 배우와 가수들도 예능에서 “해장하면 순대국밥”을 외쳤다.

순대국밥은 소통과 친근함의 코드였다.


한류와 함께 순대는 국경을 넘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처음 도전하는 한국 길거리 음식 중 하나가 순대다.

유튜브에는 “처음 먹어본 순대” 반응 영상이 수없이 올라온다.

“blood sausage”라는 설명에 놀라지만, 막상 먹고는 “생각보다 부드럽다”고 평한다.

드라마와 영화 속 해장 장면에서 순대국밥은 빠지지 않는다.

한류 팬들에게 순대국밥은 “진짜 한국”을 느끼게 하는 아이콘이다.

미국 LA, 일본 도쿄 신오쿠보, 베트남 호치민 한인타운에도 ‘Sun Dae Soup’ 간판이 걸려 있다.

순대국밥은 해외에서 가장 도전적인 메뉴이자, 동시에 한국을 상징하는 메뉴가 되었다.


프랜차이즈의 확산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가 순대국’, ‘토종 순대국’, ‘선릉순대국’ 같은 브랜드가 전국적으로 퍼졌다.

노포의 맛을 그대로 옮겨오진 못했지만, 위생과 일관된 맛으로 대중성을 넓혔다.

체인점은 해외 진출도 시작했다.

미국, 일본, 호주 등지에서 ‘Sundae Soup’ 간판이 낯설지 않다.

순대국밥은 이제 글로벌 음식 산업의 일부다.


국밥 가격의 변화는 시대상을 보여준다.

1960년대 서울 종로시장에서 순대국밥 한 그릇은 20-30원이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200원 남짓이었으니, 서민이 먹을 수 있는 저렴한 한 끼였다.

1980년대에는 500-700원, 1990년대에는 2천 원대, 2000년대 초반엔 3천,4천 원대였다.

지금은 8천-1만 원에 이른다.

“국밥도 서민 음식만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여전히 순대국밥은 가성비 있는 든든한 한 끼다.


순대와 순대국밥의 역사는 곧 한국인의 생활사다.

조선의 잔치와 제사 음식에서 출발해, 전쟁과 산업화를 거쳐, 정치와 문화의 상징, 한류의 아이콘이 되었다.

버릴 것이 없는 지혜, 가난 속에서도 나누어 먹던 정, 오늘날 글로벌 식탁에 오른 한식의 얼굴.

그릇 속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속삭인다.

“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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