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네코 후미코 수기》, 《박열재판기록》, 일본 독립운동사 자료집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903년 일본 야마구치현의 한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에 아이가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일본인 독립운동가).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린 후미코를 두고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후미코는 친척 집을 떠돌며 구박과 냉대를 받았다.
식모처럼 부려졌고, 굶주림과 매질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녀는 일찍부터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왜 나는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천대받아야 하지?”
이 질문은 어린 소녀의 가슴에 깊게 새겨졌다.
그녀는 체념하지 않았다.
작은 저항이라도 멈추지 않았다.
가르친 대로 신사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강제로 신에게 기도하라 할 때는 고개를 돌렸다.
“신이 있다면 왜 약한 자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거지?”
어린 후미코는 이미 세상의 모순을 꿰뚫고 있었다.
후미코의 어린 시절에 가장 큰 전환점은 조선으로 건너간 일이었다.
계모의 손에 이끌려 충청도의 작은 마을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제국주의가 만든 또 다른 차별을 보았다.
일본인 아이들은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았다.
조선인 아이들은 구석에 몰려 앉았다.
같은 밥상을 받아도, 일본인 아이들은 새 그릇에 음식을 받고 조선인 아이들은 남은 음식을 얻어야 했다.
후미코는 의문을 품었다.
“같은 인간인데, 왜 차별을 받아야 하지?”
그녀는 일본인 아이들 틈에 섞여 있으면서도, 마음은 조선 아이들의 편에 있었다.
아이들과 놀 때, 일본인 아이들이 조선 아이를 무시하면 그녀는 화를 냈다.
그 차별은 후미코의 가슴 깊이 새겨졌다.
“이 세상은 바꿔야 해.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세상은 잘못됐어.”
시간이 흘러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후미코는, 여전히 가난과 차별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녀는 책을 붙잡았다.
지식이야말로 자유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쓴 글을 읽었고, 아나키스트들의 선언문에 열광했다.
천황을 신으로 떠받드는 사상에 그녀는 도전했다.
“천황은 인간일 뿐이다. 인간 위에 설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녀는 단순히 반항하는 소녀가 아니었다.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1920년대 초, 도쿄.
후미코는 도쿄의 빈민가에서 청년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했다.
그곳에서 조선 청년 박열(朴烈, 조선인 독립운동가·아나키스트)을 만났다.
박열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그의 말은 불처럼 뜨거웠다.
“나는 일본 제국을 부정한다. 조선은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
후미코는 그 말에 전율했다.
그녀는 곧 그에게 말했다.
“나는 일본인이지만,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어. 너와 함께라면.”
그들의 대화는 곧 불꽃처럼 타올랐다.
둘은 동지였고, 연인이었으며, 서로의 삶을 온전히 내어준 존재가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잡지를 만들었다.
《불령사(不逞社, 아나키스트 단체의 기관지)》는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권력을 조롱했다.
글은 날카롭고, 시는 불같았다.
“천황은 신이 아니다. 그가 군림하는 것은 허상이다.”
이런 글귀가 실렸고, 일본 경찰은 매번 잡지를 압수했다.
그러나 글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도쿄의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박열과 후미코는 작은 영웅이 되었다.
그들의 삶은 가난했다.
쌀이 없어 며칠을 굶기도 했다.
겨울밤에는 이불이 없어 몸을 맞대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웃었다.
“우리는 굶어도 웃을 수 있어. 그러나 굴종하며 살 수는 없어.”
그들의 대화는 서로를 더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 무렵 일본 사회는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했다.
제국은 전쟁을 준비했고, 내부적으로는 불만을 억누르려 했다.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의 빈민들은 점점 더 분노했다.
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 권력은 희생양을 찾고 있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친 대재앙)이 도시를 삼켰다.
수십만 명이 죽고, 도시는 불길에 휩싸였다.
혼란 속에서 일본 정부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방화를 했다.”
분노한 군중은 조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칼과 몽둥이가 휘둘러졌고, 수천 명이 거리에서 죽었다.
피비린내가 도쿄 하늘에 맴돌았다.
후미코는 절망했다.
무고한 조선인들이 거짓말 때문에 죽어갔다.
그녀는 이를 두 눈으로 목격하며 치를 떨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은 박열과 후미코를 체포했다.
그들이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증거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본보기를 필요로 했다.
혼란 속에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두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른바 대역사건(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 정부가 조선인과 아나키스트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
박열과 후미코는 그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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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세 다쓰지(1880–1953), 재판 변호를 맡은 인권변호사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Tatsuji_Fuse.JPG?utm |
재판정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청석을 메웠고, 언론인들이 펜을 들고 대기했다.
박열(조선인 독립운동가·아나키스트)과 후미코(일본인 독립운동가)는 철창 안에 나란히 서 있었다.
판사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묻자, 후미코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다. 천황이 신이라면, 왜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리고 조선인들은 짓밟히는가.”
순간 법정은 술렁였다.
방청석 일부는 박수를 치려 했고, 판사는 얼굴을 붉혔다.
“피고는 감히 황제를 모독하는가!”
후미코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황제의 노예일 뿐이다.”
일본 언론은 그녀를 ‘일본인 배신자’라 불렀다.
그러나 젊은 지식인들은 그녀의 용기에 열광했다.
신문 사설에는 그녀를 비난하는 글이 실렸지만, 골목 어귀의 뒷신문에는 그녀의 발언이 비밀리에 돌았다.
“나는 단두대 위에서도 웃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신념에 죽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박열 역시 당당했다.
그는 재판장에서 “나는 조선의 독립을 원한다. 나는 일본 제국을 무너뜨리고 싶다”라고 소리쳤다.
두 사람은 함께 법정을 혁명 연극의 무대로 만들었다.
결국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국제 사회와 일본 내 일부 지식인의 압력으로 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옥중의 삶은 혹독했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야 했고, 썩은 음식이 식사로 나왔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강제 노동은 몸을 쇠약하게 했다.
그러나 후미코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글을 썼다.
《가네코 후미코 수기》에는 어린 시절의 고통, 여성으로서 겪은 억압, 조선에서 본 차별,
신과 권력에 대한 부정, 그리고 조선인과의 연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녀는 글 속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나는 인간답게 죽고 싶다.”
옥중에서도 두 사람은 사랑을 지켰다.
쇠창살 사이로 눈을 바라보며 결혼을 맹세했다.
꽃도 없고 하객도 없었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결혼이었다.
“우리는 끝까지 동지로 남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감방 벽을 울렸다.
하지만 감옥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곳이었다.
간수들은 모멸적인 언사를 퍼부었고, 그녀의 신념을 꺾으려 했다.
그러나 후미코는 웃으며 맞섰다.
“당신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나의 생각을 죽일 수는 없어.”
1926년 7월 23일, 후미코는 감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공식 기록은 자살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철저히 감시받던 그녀가 혼자 자살할 수 있었단 말인가.”
박열과 동지들은 타살이라 믿었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겨우 스물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은 한국과 일본에 큰 울림을 남겼다.
한국인들은 일본인임에도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여성으로 그녀를 기억했다.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대역죄인’으로 기록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권력에 맞선 양심의 목소리로 재평가되었다.
박열은 해방 후 회고록에서 말했다.
“그녀는 나보다 더 강했다. 그녀는 일본인이었지만 일본보다 조선을 택했다.”
오늘날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일본인이라는 경계를 넘어,
억압받는 자들과 연대한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항일 운동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한 여인의 선언이다.
2026년, 그녀의 서거 100주년을 맞아 우리는 다시 묻는다.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짓눌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녀의 생애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뜨거운 대답 중 하나일 것이다.
후미코는 옥중에서 스스로를 **“박문자(朴文子)”**라고 불렀습니다.
성은 박열의 ‘박(朴)’을 따왔고, 이름 ‘문자(文子)’는 본래 자신의 이름
‘문자(文子, 후미코의 훈독)’를 그대로 살렸습니다.
이 이름에는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의 딸이자,
박열의 동지로서 살고 죽겠다”라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1. 옥중 결혼과 함께
두 사람은 감옥 안에서 결혼을 맹세했습니다.
당시 후미코가 스스로를 “박문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어요.
단순히 아내가 되었다는 의미를 넘어서, 조선인으로서의 삶을 택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2. 재판 발언 속 정체성
재판정에서 판사가 국적과 신분을 물을 때, 후미코는 일본인임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나는 박문자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조선 민중 편에 서겠다는 태도는 재판관을 당황하게 했고,
일본 언론도 ‘국적을 버린 배신자’라 비난했습니다.
3. 동지들의 기억 속에서
박열과 불령사의 조선인 동지들은 그녀를 가네코 후미코라기보다 ‘문자’로 불렀다고 합니다.
일본인임에도 차별받는 조선 청년들과 같은 이름을 쓰며 연대한 상징이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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