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베를린에서 고개 숙인 마라톤 영웅의 삶과 유산 (Son Ki-jung)




 이 글은 『손기정 일기』,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관련 기사』, 

대한체육회 기록 등 주요 사료를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912년 8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손기정. 

그는 평범한 농가의 아들로 자랐지만, 일제강점기의 그늘 아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학교에 가면 교실마다 일장기가 걸려 있었고, 교과서에는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글이 빼곡했다. 

아이들은 일본어를 강제로 배워야 했고, 조선어로 떠들면 벌을 받았다.


Public domain, Asahi Shinbun, c. 1936


소년 손기정은 몸이 유난히 날쌨다. 

들판에서 뛰노는 걸 좋아했고, 친구들과 달리 지칠 줄 몰랐다. 

신발도 없이 흙길을 달리면,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느낌에 그는 자유를 느꼈다. 

그 자유는 식민지의 무거운 공기를 잠시 잊게 해주었다.


그가 마라톤을 처음 접한 건 신의주 보통학교 시절이었다. 

일본인 교사가 운동회를 열며 달리기를 시켰을 때, 손기정은 압도적인 속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관중석의 일본인 교사들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조선인 아이들은 속으로 환호했다.

 “저 녀석은 다르다.” 

그날 이후 그의 별명은 ‘바람보다 빠른 아이’가 되었다.


그는 우연히 일본 스포츠 잡지에서 마라톤 기사를 접했다. 

“42킬로미터를 달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경기.” 

어린 소년에게 그것은 신화처럼 다가왔다. 

그는 신발도 제대로 없는 몸으로, 동네 뒷산과 강둑을 달리며 훈련을 흉내 냈다. 

때로는 나무 껍질을 깎아 만든 나막신을 신고, 때로는 맨발로 자갈길을 달렸다. 

발바닥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단단해졌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그는 경성으로 올라왔다. 

YMCA와 체육단체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며 주목받았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 선수들의 성장을 경계했지만, 동시에 식민지의 ‘성과’를 이용하려 했다. 

손기정은 그렇게 식민지 조선의 모순 속에서, 한편으로는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의 도구로 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끔 밤마다 혼잣말을 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그러나 내 이름은 일본식으로 불려야 한다. 내가 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달리는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대답은 점점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1936년 여름, 

베를린은 거대한 축제의 무대로 변해 있었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올림픽을 통해 세계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했다. 

도시 곳곳엔 나치 깃발이 걸려 있었고, 경기장에는 군가가 울려 퍼졌다.


그 무대에 조선 청년 손기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손기정이 아니었다. 

일본 대표단 명단에 그는 ‘손 기테이(일본식 발음)’로 등록되어 있었다. 

가슴에는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어야 했고, 기자들은 그를 일본 선수로 소개했다. 

그는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8월 9일, 마라톤 결승이 열렸다.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모여 스타트 라인에 섰다. 

총성이 울리자, 손기정은 차분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선두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페이스를 지켰다. 

“마라톤은 처음에 이기는 경기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익힌 원칙이었다.


코스는 베를린 시내를 지나 교외로 뻗어 있었다. 

거리는 군중으로 가득했고, 나치 깃발이 물결쳤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 그는 호흡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절반을 지나면서 선두 그룹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스 후반부에 그는 경쟁자들을 하나둘 따돌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2킬로미터, 그는 이미 선두였다. 

독일 군중의 환호와 나치 군악대의 소리가 섞여 들렸지만, 

그의 귀에는 고향 신의주의 강바람이 들려오는 듯했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전광판에 기록이 떴다. 

2시간 29분 19초 2. 

세계 신기록이었다.


경기장 안은 환호로 뒤덮였지만,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으나, 조선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일본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일본 국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그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세계는 그 장면을 보았다. 

조선 청년의 숙인 고개는 침묵 속 항거였다.


시상식이 끝난 뒤, 일본 대표단은 손기정을 나치 고위 인사들과 함께 세워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들의 웃음 속에서 그는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이 금메달은 내 것이 아니다. 조선의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은 지워졌다.” 

그의 가슴 속엔 금메달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슬픔이 내려앉았다.



베를린에서 돌아온 손기정은 영웅이었다. 

조선 민중은 신문에 실린 그의 사진을 보며 환호했고, 그의 이름을 속삭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신문에 적힌 이름은 ‘손 기테이’, 가슴에는 일장기가 선명했다. 

민중은 그 사실에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였던 이상협은 올림픽 시상식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결심했다. 

“이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자. 조선의 아들로서 그를 기록해야 한다.” 

그는 사진 속 손기정의 유니폼에서 붉은 원을 말끔히 지워냈다. 

기사로 나간 사진에는 고개 숙인 손기정만이 남아 있었다.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일장기를 지운 채 게재된 손기정 시상식 사진


신문이 발행되자, 조선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가 곧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게 바로 우리의 손기정이다!” 

식민지 조선의 민중은 그날 처음으로 제국의 상징이 지워진 영웅의 얼굴을 보았다. 

그 한 장의 사진은 단순한 스포츠 뉴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항거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은 신문사를 급습했고, 사진기자 이상협과 편집국장 송진우 등을 체포했다. 

동아일보는 정간 처분을 받았다. 

손기정 자신도 가혹한 감시 속에 놓였다. 

그는 자신 때문에 기자들이 옥에 갇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달리기밖에 모르는데, 이 무게는 너무 무겁다.”


일제는 손기정을 ‘황국의 영웅’으로 포장하려 했다. 

군국주의 행사에 불려다니며 억지로 웃음을 강요받았고, 

제국 신민으로서 금메달리스트라는 이미지를 선전에 이용당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늘 굳은 표정이 남았다. 

어느 연회에서 장군이 술잔을 내밀자, 그는 억지로 잔을 들었지만 시선은 멀리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은 속삭였다. 

“그의 눈은 이미 일본이 아닌, 잃어버린 조선을 향해 있다.”


손기정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민중의 가슴을 흔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은 식민지 권력의 감시망 속에 있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불온한 조선인’이라는 낙인이 찍힐 상황이었다. 

그는 침묵 속에 버텼다. 

“내가 다시 달릴 수 있다면, 이번엔 내 이름으로, 내 나라의 깃발 아래에서 달리고 싶다.”


1945년, 

해방이 찾아왔다. 

조선 사람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만세를 외쳤다. 

손기정 역시 가슴 벅찬 감정으로 그날을 맞았다.

 더 이상 일본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되었고, 달릴 때마다 억지로 일장기를 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서른셋, 선수로서의 절정은 이미 지나 있었다.


그는 달리는 대신, 젊은 세대를 키우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한국 마라톤의 지도자로서 코치를 맡아 제자들을 길러냈다. 

1947년, 그는 서윤복을 지도했다. 

서윤복은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했고, 결승선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그 순간, 손기정은 눈물이 솟구쳤다.

 “드디어… 우리의 이름으로 세계의 결승선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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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그는 한국 마라톤을 이끌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1950년 보스턴, 1952년 헬싱키… 

손기정의 제자들은 세계 무대에 섰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기록을 추구하는 코치가 아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늘 말했다. 

“마라톤은 발로 뛰는 게 아니다. 심장과 정신으로 달리는 것이다. 네가 누구인지 잊지 말고 달려라.”


그의 훈련 방식은 혹독했다. 

새벽마다 한강 둔치를 달리게 했고, 식단까지 관리했다. 

선수들은 때로 불평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서 누구도 대꾸할 수 없었다. 

그 눈빛은 베를린의 스타디움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였다.


그러나 해방 후의 한국은 순탄치 않았다.

 분단과 전쟁이 이어졌고, 체육계 역시 혼란 속에 휘말렸다. 

지원은 부족했고, 국제 대회에 나갈 선수들을 보내는 데조차 돈이 모자랐다. 

손기정은 직접 발로 뛰며 후원금을 모았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훈장을 팔아 훈련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그는 늘 선수들에게 당부했다. 

“우리는 달리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달리기를 통해 우리가 조선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의 무게를 느끼며 트랙 위에 섰다. 

기록의 숫자 뒤에는 늘 민족의 이름이 있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추고 난 뒤에도 그는 선수들을 불러 세웠다. 

황폐해진 운동장을 돌며, 흙바닥 위에 희미한 트랙을 그렸다.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그에게 달리기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행위였다.


세월은 흘렀다. 

선수도, 코치도, 지도자도 차례로 무대를 떠났지만, 손기정의 이름은 잊히지 않았다. 

그의 삶은 이미 하나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1986년,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성화가 운동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트랙에 선 이는 바로 손기정이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천천히 걸었지만, 관중석은 폭발하듯 환호했다. 

베를린에서 고개 숙였던 그 청년이, 

반세기 뒤 해방된 조국의 트랙에서 성화를 들고 있었다.


출처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 

전 세계의 시선이 한국에 쏠린 그날, 손기정은 다시 성화를 들고 나타났다. 

그의 손은 떨렸지만,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수십 년 전, 일장기 아래서 울려 퍼졌던 함성이 이제 태극기 물결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굽은 허리로 성화를 높이 들었다. 

전 세계가 그 장면을 보았다. 

한국은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니었다.


그의 삶은 스포츠 영웅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민족의 비극과 자존심, 두 얼굴을 동시에 짊어진 인물이었다.

 올림픽 금메달은 영광이었지만, 그 위에 덧씌워진 일장기는 평생의 상처였다. 

그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내세우기보다, 늘 조심스러운 언어로 자신을 평가했다.

 “나는 조국을 위해 달렸을 뿐이다. 그러나 조국과 내 발걸음을 빼앗겼다.”


2002년, 손기정은 세상을 떠났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의 유산은 단순한 메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의지, 민족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는 몸짓이었다.


서울 올림픽공원에 세워진 손기정 기념 동상


오늘날 그의 이름은 경기장, 체육관, 그리고 마라톤 대회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서 숙였던 그의 고개는 더 이상 수치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항거의 몸짓,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후대 평가는 엇갈릴 여지도 있다. 

어떤 이는 그가 일제의 선전에 이용당했던 과거를 지적한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그가 보여준 침묵의 저항, 

해방 후 지도자로서 남긴 발자취를 높이 평가한다. 

그는 완벽한 영웅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더 큰 울림을 남겼다.


손기정의 삶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승리는 결승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승리는 그 길을 어떻게 달렸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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