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도시락에서 K-푸드까지: 김밥의 모든 이야기 (Kimbap)


 이 글은 『시의전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동아일보 기사, 

대한식품사 자료 등 주요 기록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저녁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조선의 한 시골 마을, 

부엌의 아궁이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고요한 저녁을 채우고 있었다. 

아낙은 갓 짠 쌀밥을 커다란 놋그릇에 옮겨 담고, 옆에 있던 김을 집어 불 위에 얹었다. 

얇디얇은 검은 종이 같은 김에서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피어올랐다. 

아이들이 졸졸 모여들어 코를 벌름거렸다. 

“어머니, 그거 저 주세요.” 

어머니는 웃으며 김 위에 밥 한 숟가락을 올리고, 

장아찌 한 조각을 얹어 돌돌 말아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소년은 허겁지겁 한입에 넣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맛있어요!” 이름 없는 음식, 

그러나 김과 밥과 반찬이 만나 하나로 어우러진 이 소박한 덩어리는 훗날 김밥으로 불릴 씨앗이었다.


출처: Maangchi.com / CC-BY-SA


이 시기의 조리서에는 간략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시의전서』에는 “김에 밥을 싸서 먹는다”는 구절이 있다. 

화려한 요리법이 아니라, 간단한 서술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문장이 말해주는 것은 크다. 

이미 19세기 말 조선 사람들은 김을 밥과 함께 싸 먹는 습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김은 오늘날처럼 대규모 양식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수확해 손질한 뒤 불에 구워 먹는 귀한 반찬이었다.

 그 귀한 김을 밥과 함께 말아 먹는 방식은, 

농부가 들판에 나가 허기를 달랠 때나 장터에 나갈 때 준비해간 간소한 도시락이었다.


그 시대에는 아직 ‘도시락’이라는 개념조차 흔하지 않았다. 

나무로 만든 찬합이나 옹기 그릇에 밥과 반찬을 담아 다니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주먹밥 형태로 간단히 싸가는 정도였다. 

그러나 김을 이용해 밥과 반찬을 함께 싸버리면 훨씬 먹기 편해졌다. 

흩어지지도 않고, 손에 쥐기도 좋았다. 

이렇게 태어난 김밥의 원형은 누군가가 한순간에 발명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부엌과 밥상에서 조금씩 만들어지고 변형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개항과 함께 조선의 식문화도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양 음식이 조금씩 들어왔고, 일본 음식문화도 함께 스며들었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그 변화는 가속화되었다. 

일본의 스시와 노리마키는 조선의 밥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경성의 시장에는 일본인 상인들이 들어와 노리마키를 팔았다. 

색색의 속재료가 들어간 김말이는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고, 

얇게 잘라낸 단면은 마치 꽃처럼 화려했다.


조선 사람들은 그것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한쪽에서는 “저건 별 게 아니야, 우리도 김에 밥을 싸 먹었지 않느냐”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그 모양과 깔끔한 단면에 매혹되기도 했다. 

실제로 조선의 부엌에서 밥을 김에 싸 먹는 방식과 일본식 노리마키가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형태의 김밥이 굳어졌다.


출처: japan.recipetineats.com / CC-BY-SA
노리마키(마키초밥)는 에도 시대 중기(약 1750년대 이후)에 현재의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초창기에는 ‘Ryōri Sankaikyō(1749)’나 ‘Shinsen Kondate buruishū(1776)’
같은 조리서에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경성의 한 학교 운동회 날, 

아이들이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꺼냈다.

 일본인 교사의 도시락에는 노리마키가 있었다. 

반듯하게 잘린 김말이 속에는 초밥용 식초 밥과 달걀, 생선이 들어 있었다. 

그 옆에서 조선 아이의 도시락이 열렸다. 

하얀 밥에 단무지, 달걀지단, 시금치가 김으로 감싸져 있었다. 

일본인 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노리마키네.” 

아이는 대답 대신 조용히 밥을 집어 먹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노리마키가 아니라, 김밥이다. 어머니가 싸준 우리 밥이다.” 

이름은 빼앗겼으나 정체성은 잃지 않았다.


이 시기의 김밥은 단순한 음식 그 이상이었다. 

조선의 민중에게 그것은 일상 속에서 조용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 

일본식 식민지 체제 속에서 이름도 빼앗기고 언어도 빼앗긴 사람들이었지만, 

김에 밥을 싸고 참기름과 소금을 곁들여 자신들만의 맛을 지켜내는 순간, 

그들은 여전히 조선인이었다.


그러나 모순도 컸다. 

총독부는 일본의 음식을 조선에 보급하며 ‘근대적’이라 포장했고, 

김밥은 일본 음식의 변형이라는 굴레를 쓰게 되었다. 

동시에 조선 사람들은 도시락에 김밥을 싸서 다니며, 자신들만의 음식을 지켜냈다. 

아이들은 소풍 날 김밥을 먹으며 웃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빼앗긴 이름과 정체성의 무거움이 있었다.


광복이 찾아왔을 때, 사람들은 빼앗겼던 이름을 되찾았고 음식도 다시 자기 색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며 사람들의 삶은 다시 가난과 결핍 속으로 밀려났다. 

전선으로 끌려간 이들을 기다리는 가족의 도시락에도 푸짐한 반찬은 없었다.

 그럼에도 김과 밥이 있으면 최소한의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소금에 절인 무, 김치 한 조각, 달걀 부침 하나면 충분했다. 

밥을 김으로 싸서 말아 들고 나가면 길 위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었다. 

김밥은 전쟁 속에서도 허기를 달래주는, 소박하지만 강인한 음식이었다.


1950년대 후반,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사람들은 다시 학교와 시장을 세워갔다. 

어린아이들이 다시 소풍을 가기 시작했고, 도시락 싸는 문화가 확산되었다. 

한 아이는 소풍날 아침 어머니의 부엌에서 김밥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엄마, 계란도 넣어주세요!” 

어머니는 얇게 부친 달걀지단을 잘라 밥 위에 올리고, 시금치와 당근을 곁들였다. 

소박하지만 알록달록한 속이 드러난 김밥은 아이의 도시락에서 빛을 발했다. 

친구들과 돗자리 위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펼치면, 

김밥은 어린 시절 추억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1960~70년대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이루어진 시기였다.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며 분식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바쁜 도시인들에게 값싸고 든든한 한 끼가 필요했다. 

김밥은 바로 그 역할을 했다. 

분식집의 유리 진열장에는 김밥이 가지런히 놓였다. 

한 줄에 100원, 조금 더 재료가 들어간 건 150원. 

학생들도, 노동자들도 부담 없이 지갑에서 꺼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시절 학생들은 학교 앞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을 사 먹고 우동 국물에 말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점심시간마다 

김밥과 떡볶이를 함께 시켜 빠르게 먹고 다시 기계 앞에 섰다. 

김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음식이자, 계층을 가리지 않는 서민의 대표 음식이었다.


소풍과 운동회의 풍경에서 김밥은 빼놓을 수 없었다.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 뚜껑을 열면, 

바삭한 김이 밥을 감싸고 그 속에는 단무지의 노란빛, 

시금치의 초록빛, 당근의 주황빛, 달걀지단의 노란빛이 어우러졌다. 

친구들은 서로의 도시락을 비교하며 “너희 집은 햄도 넣었네?” 하고 부러워했다. 

그 시절 햄은 귀한 재료였다. 

도시락 속 김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집안 형편과 어머니의 정성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출처 HISTORY OF KOREA 페이스북


1970년대 후반이 되자 김밥은 더욱 대중화되었다. 

분식집에서는 참치 통조림을 속에 넣어 만든 참치김밥이 등장했고, 

치즈를 넣은 변형도 생겨났다. 

가격은 여전히 200원을 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이 동전 두어 개만 쥐고 있어도 김밥 한 줄을 사 먹을 수 있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김밥은 도시인의 일상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대학 앞 분식집에서 학생들은 김밥과 라면을 함께 시켜 늦은 밤까지 토론을 이어갔다.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에 김밥과 잔치국수를 함께 먹으며 잠시 숨을 돌렸다. 

김밥은 빠르고 저렴하며, 무엇보다 익숙한 맛이었다. 

사회가 요동치던 시기에도 김밥은 한결같이 사람들의 곁에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김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거리의 시위 현장에서, 가족들이 싸온 김밥은 학생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나눠 먹는 김밥 한 줄은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서로 낯선 사람들이었지만, 같은 김밥을 나누며 “우리는 함께 싸우고 있다”는 마음을 공유했다. 

김밥은 그렇게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희망 속에도 늘 존재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김밥 한 줄은 200원 남짓이었다. 

물가가 조금씩 오르면서도 여전히 서민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사람들은 김밥을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손맛, 친구들과의 추억, 그리고 사회적 연대까지 담아낸 특별한 음식이었다.


1990년대는 김밥에게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급격히 도시화가 진전되고, 

프랜차이즈 분식점이 늘어나면서 김밥은 “표준화된 대중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동네 골목마다 ‘분식집’ 간판이 걸렸고, 유리 진열장 안에는 갓 말아낸 김밥이 줄지어 놓였다. 

그 속은 더 다양해졌다. 

참치, 치즈, 불고기, 멸치볶음, 오징어채, 심지어 김치볶음까지 속으로 들어갔다. 

김밥은 이제 단순히 소풍 도시락의 상징이 아니라, 점심과 저녁을 책임지는 한 끼가 되었다.


당시 대학가 앞에는 학생들이 줄을 서는 김밥집들이 있었다. 

낡은 나무 탁자와 시멘트 바닥, 작은 주방에서 어머니 같은 주인장이 쉼 없이 김밥을 말아냈다. 

“참치 하나, 치즈 하나요!”라는 외침이 이어졌고, 

그 소리는 곧 한국 사회의 분식 문화와도 연결되었다. 

한 줄에 500원, 조금 더 재료가 풍부하면 700원. 학생들이 주머니 사정을 계산하며,

 “라면은 포기하고 김밥 두 줄 먹자”라고 이야기하는 풍경이 흔했다. 

김밥은 여전히 서민적이고, 여전히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음식이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고, 음식 문화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가정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고, 외식은 사치가 되었다. 

그러나 김밥은 위기 속에서도 빛났다. 

저렴하면서도 영양을 챙길 수 있었고, 무엇보다 손에 쥐기 편했다. 

사람들은 고급 레스토랑 대신 분식집으로 몰려들었다.

 IMF 시대의 분식집은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라, 서로의 고단함을 달래는 공간이었다. 

좁은 식당 안에서 김밥과 라면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나누었다.


이 무렵 “김밥천국”이라는 이름의 프랜차이즈가 등장했다.

 24시간 영업하는 김밥 전문점은 한국 사회에 작은 혁명을 일으켰다.

 메뉴판에는 수십 가지 김밥이 나열되어 있었다. 

고기김밥, 돈까스김밥, 불고기김밥, 야채김밥, 치즈김밥, 날치알김밥…. 

가격은 1,000원부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천 원 김밥”은 누구나 알던 상징이었다. 

학생들, 직장인, 심지어 밤늦게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까지 김밥천국 간판을 찾아 들렀다. 

김밥은 이제 단순히 소풍 음식이나 분식집 한 끼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먹을 수 있는 24시간의 동반자가 되었다.


출처: https://kollectionk.com / CC-BY-SA


이 시기에 편의점 문화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후반 편의점 삼각김밥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낯설었다. 

일본 오니기리를 변형한 형태였지만, 속 재료는 한국인 입맛에 맞게 바뀌었다. 

김치볶음밥, 참치마요, 불고기, 제육볶음이 들어간 삼각김밥은 

금세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가격은 500원 남짓. 

시험기간 도서관에서 삼각김밥을 먹으며 밤을 새우는 대학생들, 

지하철역 앞에서 급히 하나 사 들고 출근길에 오르는 직장인들, 모두 삼각김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삼각김밥은 “빠르고 값싼 한 끼”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2000년대 초반, 김밥은 한국 사회의 모든 풍경에 존재했다. 

아침 등굣길 학생들의 도시락, 점심시간 직장인들의 식탁, 

저녁 술자리 뒤 허기를 달래는 간식, 새벽 편의점 진열대 위까지. 

김밥은 계층도, 나이도, 상황도 가리지 않았다. 

그 누구도 소외하지 않는 음식, 한국 사회의 보편적 상징이 된 것이다.


출처: koreabridge.net / CC-BY-SA


이 무렵 해외에서도 김밥의 존재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외 유학생들이 친구들에게 김밥을 소개했고, 

한국 드라마 속 소풍 장면이 방영될 때마다 외국 팬들이 “저게 스시인가?”라고 물었다. 

한국인들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저건 김밥이에요.” 

김밥은 서서히 한국인의 일상에서 세계인의 호기심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김밥의 가격은 시대를 반영하는 지표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200원 남짓이던 한 줄이 1990년대엔 500원에서 700원,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는 1,000원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김밥 한 줄 값이 천 원이나 한다”며 혀를 찼지만, 동시에 그것이 일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김밥은 언제나 서민의 친구였고, 그 가격은 사회 경제의 맥락 속에서 늘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밥은 새로운 차원을 맞이했다. 

한국 사회에서 김밥은 이미 소풍과 분식집, 편의점의 대표 음식으로 굳어져 있었지만, 

이제는 세계인의 입으로 향했다. 

한류 열풍과 함께 한국 드라마와 K-팝이 전 세계에 퍼지자, 김밥도 함께 주목을 받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돗자리를 펴고 소풍 가서 김밥을 먹는 장면, 

연인끼리 공원에서 김밥 도시락을 나누는 장면은 해외 팬들에게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 게시판과 유튜브에는 

“스시 같은데 왜 다르지?”, “밥이 참기름 냄새가 나고 속이 다양하다”라는 외국인들의 감상이 쏟아졌다.


토론토의 김밥집 출처: torontolife.com / CC-BY-SA


뉴욕의 한 한식당 앞에는 ‘Kimbap’이라는 간판이 걸렸다. 

현지인들은 처음에는 스시와 헷갈렸지만, 곧 차이를 알아차렸다. 

스시는 간장과 와사비에 찍어 먹는 섬세한 요리라면, 

김밥은 참기름과 깨소금이 은은히 퍼지는 향기로운 음식이었다. 

무엇보다 속재료의 자유로움이 매력이었다. 

햄, 달걀, 시금치, 당근 같은 기본 재료에서부터 

불고기, 김치볶음, 심지어는 퀴노아나 아보카도까지 들어갔다. 

김밥은 국경을 넘으며 새로운 옷을 입었다.


유럽의 마켓에서도 김밥은 K-푸드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파리의 한 마트에서는 “Kimbap”이라는 이름으로 포장 김밥이 팔렸고, 

런던의 푸드 페스티벌에서는 김밥 말기 체험 부스가 큰 인기를 끌었다. 

외국인들은 김 위에 밥을 올리고 재료를 얹어 조심스럽게 말아냈다.

 어설프게 잘린 김밥을 들고 환하게 웃는 그들의 얼굴은, 

수십 년 전 한국 어린이들이 소풍날 돗자리 위에서 웃던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김밥은 이제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코드가 되었다.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반드시 먹어봐야 할 음식 목록에는 김밥이 늘 들어갔다. 

특히 편의점 삼각김밥은 “한국 여행의 필수 체험”으로 자리 잡았다. 

외국인 유튜버들이 편의점에 들어가 삼각김밥을 꺼내며 

“이 작은 삼각형이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라고 감탄하는 영상은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했다.


2010년대 이후 김밥은 가격과 사회 현상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김밥 한 줄의 가격은 2,000원, 3,000원을 넘어섰다. 

고급 김밥 전문점에서는 한 줄에 5,000원이 넘는 경우도 흔해졌다. 

사람들은 “이제 김밥도 서민 음식이 아니다”라고 푸념했지만, 

여전히 김밥은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한 끼였다. 

언론에서는 “김밥 지수”라는 표현을 썼다. 

김밥 한 줄 값이 오르면 국민은 생활 물가가 올랐음을 실감했다. 

김밥은 경제적 지표로까지 기능했다.


김밥과 관련된 문화적 에피소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나눠 먹던 김밥은 이제 촛불집회와 같은 대규모 시민 집회에서도 등장했다.

 누군가 돗자리 위에 김밥 도시락을 펼치면, 옆 사람과 자연스럽게 나누어 먹었다. 

김밥은 낯선 이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음식이었다. 

한 줄을 잘라 여러 명이 나누어 먹는 구조 자체가 나눔과 연대를 상징했다.


한편, 김밥은 해외에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미국의 일부 식당에서는 김밥을 스시 메뉴에 함께 올려두었고, 

외국인들은 두 음식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한국 문화가 알려지면서, “김밥은 스시와 다르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김밥은 스시보다 더 일상적이고, 더 자유롭고, 더 서민적인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2020년대,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인의 식문화를 바꾸었다. 

배달과 포장이 늘어나며 김밥의 인기도 더욱 높아졌다. 

집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도시락 메뉴로 김밥이 사랑받았고, 

배달 앱에서 김밥 전문점 주문은 급증했다. 

혼밥 시대에도 김밥은 외로움을 덜어주는 음식이었다. 

작은 포장 용기 안에 가지런히 담긴 김밥은,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한 끼가 될 수 있었다.


이제 김밥은 K-푸드의 선두주자로 세계 식탁에 올랐다. 

CNN, BBC 같은 해외 언론이 한국 음식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메뉴가 김밥이다.

 “Healthy, portable, delicious”라는 평가와 함께 김밥은 글로벌 푸드 트렌드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음식이지만, 세계인에게는 새롭고 흥미로운 음식이었다.


출처: weekly.khan.co.kr / CC-BY-SA


그러나 김밥의 진정한 매력은 화려한 세계화가 아니라, 

여전히 변함없이 한국인의 일상 속에 있다는 점이다. 

소풍 가는 날 아침 부엌에서 어머니가 말아주던 김밥, 

분식집에서 친구와 나누던 김밥, 도서관에서 밤새우며 먹던 삼각김밥, 

시위 현장에서 이웃과 함께 나누던 김밥. 

김밥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김밥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것은 한 사회의 역사와 겹친다. 

조선 후기의 기록 속에서 소박하게 태어나, 일제강점기의 모순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켜냈고, 

해방 이후 전쟁과 가난 속에서 희망을 이어갔다. 

산업화 시대에는 서민의 한 끼로,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는 연대의 상징으로, 

IMF 위기 속에서는 값싼 희망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오늘날, 김밥은 국경을 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음식이 되었다.


김밥은 말한다. 

“나는 단순한 밥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의 삶이고, 추억이고, 연대다. 

나를 먹는 순간, 너는 한국의 한 조각을 맛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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