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로알 아문센 자서전(My Life as an Explorer, 1927)》,
《북서항로 탐험 보고서》, 《남극 탐험사》, 노르웨이 국립도서관 자료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872년 여름, 노르웨이 보르게(오슬로 인근의 작은 해안 마을).
바닷바람이 거칠게 불어오는 이 마을에서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은 태어났다.
아버지는 배를 소유한 선주였고, 어머니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아이들을 돌보았다.
가문은 풍족했지만, 그 안에 깃든 기질은 바다와 모험이었다.
소년 로알은 어려서부터 북극의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특히 영국 탐험가 존 프랭클린 경(북서항로 개척을 시도하다 실종된 인물)의 이야기는
그의 가슴에 불씨를 심었다.
“얼음 속에서 사라진 남자들, 그러나 그 이름은 지도 위에 살아남았다.”
소년은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내들의 그림을 상상하며 잠들곤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원했다.
“너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그녀는 로알에게 해부학 책을 쥐여주었다.
하지만 소년의 마음은 늘 창 너머 바다로 향해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순간, 그는 더 이상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내 길을 간다.”
아문센은 항해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젊은 시절, 그는 노르웨이와 북해를 오가는 배에 선원으로 승선했다.
밤마다 별빛을 보며 항해술을 익혔고, 추위 속에서 체력을 단련했다.
그는 스스로를 극지에 맞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을 감내했다.
“내 몸은 얼음과 바람 속에서 단련되어야 한다.”
그는 겨울마다 스키와 사냥으로 체력을 길렀다.
1897년, 기회가 찾아왔다.
벨기에 장교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벨기에 남극 탐험대를 이끈 해군 장교)가 남극 탐험대를 조직했다.
아문센은 항해사로 합류했다.
그의 첫 대규모 탐험이었다.
벨기에 탐험대의 배 ‘벨기에카호’는 남극으로 향했다.
그러나 항해는 곧 악몽으로 변했다.
배는 얼음에 갇혔고, 탐험대는 인류 최초로 남극에서 겨울을 나야 했다.
태양은 떠오르지 않았고, 끝없는 어둠과 추위가 이어졌다.
괴혈병(설명: 비타민 C 부족으로 발생하는 질병)으로 동료들이 쓰러졌다.
공포와 광기가 배 안에 번졌다.
아문센은 이때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원주민처럼 먹고, 원주민처럼 살아야 한다.”
그는 북극 원주민들의 생존법을 연구했고, 지방과 고기를 위주로 식단을 바꾸었다.
그 덕에 그는 무사히 살아남았고, 더욱 강해졌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모든 탐험 전략의 기초가 되었다.
1903년, 그는 자신의 탐험대를 꾸렸다.
목표는 북서항로였다.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지나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항로.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탐냈지만, 모두 실패했다.
존 프랭클린의 함대는 얼음에 갇혀 전멸했다.
스코틀랜드, 스페인, 러시아의 탐험가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 길은 죽음의 항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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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Gj%C3%B8a?utm_source=chatgpt.com#/media/File:Gjoea.jpg |
그러나 아문센은 달랐다.
그는 규모를 줄였다.
단 6명의 대원과 작은 배 예아호(Gjøa).
작은 배는 얼음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고, 소수의 인원은 식량 부담을 줄였다.
그는 북극 원주민 이누이트에게 직접 사냥법과 개썰매 운용법을 배웠다.
그들의 모피옷, 지방 위주의 식단, 개와 함께 달리는 법이 그의 무기가 되었다.
탐험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얼음과 어둠 속에서 겨울을 버텨야 했다.
하지만 아문센은 계획을 지켰다.
이누이트처럼 살았고, 기록을 남겼다.
1906년, 마침내 예아호는 태평양에 닿았다.
수세기 동안 수많은 생명을 삼킨 북서항로가 열린 순간이었다.
아문센은 환호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조용히 일기에 적었다.
“우리는 성공했다. 역사 속에서 나는 내 이름을 찾았다.”
1909년, 아문센은 북극점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북서항로를 완주한 영웅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북극점 최초의 인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놀라운 소식이 날아왔다.
프레데릭 쿡(미국 탐험가, 북극점을 주장했으나 진위 논란이 많음)과
로버트 피어리(미국 해군 장교, 북극점 도달을 주장한 인물)가
각각 자신이 북극에 도달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순간 아문센의 가슴은 얼어붙었다.
“내 꿈이 이미 빼앗겼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방향을 바꿨다.
세상은 북극점을 두고 논란으로 시끄러웠지만, 아직 아무도 발을 디디지 못한 곳이 있었다.
바로 남극점이었다.
영국의 로버트 스콧도 그곳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아문센은 결단했다.
“나는 남쪽으로 간다. 남극점은 내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이 계획을 비밀에 부쳤다.
탐험대원들에게조차 북극으로 간다고 속였다가, 배가 출항한 뒤에서야 진짜 목적지를 밝혔다.
영국의 스콧에게는 전보 한 통만 보냈다.
“친애하는 스콧, 나는 남쪽으로 향한다.”
그 짧은 메시지는 탐험 경쟁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1910년, 아문센의 배 ‘프람호(Fram, 노르웨이 극지 탐험용 선박)’는 남극을 향해 항해했다.
그와 동시에, 로버트 스콧의 ‘테라노바호’도 출발했다.
세계는 두 개의 깃발이 남극에 꽂히기를 기다렸다.
아문센은 전략에서 완전히 달랐다.
그는 북극에서 배운 대로 개썰매와 스키를 활용했다.
식량은 철저히 준비했고, 보급 창고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해 귀환길에도 생존을 보장했다.
대원들의 옷은 이누이트식 모피였다.
모든 것은 실용적이고 효율적이었다.
반면 스콧은 영국식 전통을 고수했다.
그는 조랑말을 데려갔고, 썰매를 인력으로 끌게 했다.
조랑말은 추위에 약했고, 곧 쓰러졌다.
대원들은 무거운 짐을 직접 끌며 지쳐갔다.
보급 창고는 계획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식량은 부족했다.
영국식 자존심은 극한 환경 앞에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1911년 12월 14일.
아문센과 그의 대원들은 마침내 남극점에 도달했다.
눈보라 속에서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였다.
“이 순간을 조국에 바친다.”
아문센은 일기에 차분히 적었다.
그의 이름은 영원히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선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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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콧과 대원들이 남극점에서 포즈를 취한 장면 (1912년 1월 18일). 순서대로 오츠, 보워스, 스콧, 윌슨, 에반스. |
한 달 뒤, 스콧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문센의 흔적과 노르웨이 국기를 발견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귀환을 시도했지만, 폭풍과 추위, 영양실조가 그들을 덮쳤다.
하나둘 쓰러졌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스콧은 눈보라 속 텐트에서 일기를 남겼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운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그 뒤로 영국 전역은 스콧을 비극적 영웅으로 추모했다.
아문센은 승리했지만, 스콧의 죽음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래서 그의 승리는 때때로 ‘차갑다’는 평가와 함께 기억되었다.
훗날 그의 유명한 명언이 이부분에서 비롯되었다.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 부른다.
패배는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것을 불운이라 부른다.
남극의 정복으로 아문센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다시 북쪽을 향했다.
1926년, 아문센은 비행선 ‘노르제호(Norge,이탈리아 노빌레 장군이 제작한 비행선)’에 올라탔다.
노르웨이, 이탈리아, 미국이 함께한 국제 탐험이었다.
비행선은 북극 상공을 지나갔고, 그는 하늘에서 북극점을 최초로 통과한 인물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남극과 북극을 모두 정복한 유일무이한 인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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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s://www.secretatlas.com/handbook/culture-and-history/arctic/roald-amundsen-conquering-the-north-and-south-poles?utm |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비극이었다.
1928년, 이탈리아 탐험가 움베르토 노빌레가 비행선 사고로 북극에서 조난당했다.
아문센은 구조를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이미 은퇴할 나이였지만, 모험가의 심장은 여전히 불타고 있었다.
“동료를 두고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비행기는 바렌츠해 어딘가에서 실종되었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얼음과 바다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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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실종전 마지막사진 |
아문센은 냉혹할 만큼 치밀한 사람이었다.
경쟁자를 속이고, 철저히 준비하며, 감정을 억눌렀다.
그의 승리는 스콧의 비극과 대비되었고, 그래서 더 극적으로 빛났다.
그는 영웅이자 논쟁적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탐험 정신의 결정체였다.
오늘날 오슬로의 아문센 기념관에는 그의 지도, 일기, 깃발이 전시되어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를 “얼음의 아들”이라 부른다.
그의 삶은 여전히 탐험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아문센은 그 질문에 자신의 삶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아직도 극지의 바람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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