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폴리비우스 《역사》, 리비우스 《로마사》, 아피안, 플루타르코스 등
고대 사료와 현대 연구서를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지중해 서부에는 한때 로마만큼이나 강력한 도시국가가 있었다.
카르타고(페니키아계 상인들이 티레에서 이주해 세운 해상 도시국가, 오늘날 튀니지 인근)는
기원전 9세기경부터 무역과 해상 패권을 장악하며 지중해의 ‘바다의 여왕’이라 불렸다.
그들의 배는 서쪽으로는 스페인, 북쪽으로는 갈리아, 동쪽으로는 이탈리아와 그리스까지 항해했다.
포도주, 곡물, 은, 상아, 노예. 카르타고는 무역으로 제국을 건설했고, 용병을 사들여 군대를 만들었다.
| 카르타고 유적지위치 |
그러나 지중해의 다른 강자 로마(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에서 성장한 공화정)는 달랐다.
그들은 무역보다는 육상 정복에 강했고,
라틴 동맹과 이탈리아 부족들을 묶어 강력한 시민군 체제를 만들었다.
한쪽은 바다의 제국, 한쪽은 육지의 제국.
둘은 결국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시칠리아(지중해의 곡창이자 해상 교통의 요지)는 두 제국을 맞붙게 한 불씨였다.
기원전 264년 시작된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무려 20년 넘게 이어졌다.
처음엔 바다에서 강했던 카르타고가 우세했지만,
로마는 집요하게 배를 건조하고 훈련해 결국 해상전에서조차 승리했다.
기원전 241년, 카르타고는 패배하고 시칠리아를 빼앗겼다.
로마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까지 차지하고, 카르타고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다.
이 패배는 카르타고 사회를 뒤흔들었다.
무역과 해상 제국으로서의 자존심은 꺾였고,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러나 한 집안은 패배의 불씨 속에서 더 큰 복수를 준비했다.
바르카 가문(카르타고의 군사 귀족 가문, 이름은 ‘번개’라는 뜻)은 카르타고의 재건을 책임지고 있었다.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카르타고 장군)는 로마를 증오했다.
그는 카르타고를 떠나 이베리아 반도(오늘날 스페인)에 새로운 제국을 세우려 했다.
그곳에는 은광이 있었고, 용병을 모집할 자원이 풍부했다.
하밀카르는 아들과 함께 이 땅으로 건너갔다.
소년 한니발은 아직 어렸지만, 아버지의 복수심을 온몸으로 배우며 성장했다.
어느 날, 하밀카르는 아들을 신의 제단으로 데려갔다.
피 묻은 제단 위에서 그는 아들에게 맹세를 요구했다.
“로마를 증오하라.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소년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로마를 미워하며 살겠습니다.”
이 맹세는 그의 일생을 지배하게 된다.
하밀카르가 죽은 뒤, 그의 사위 하스드루발 더 페어(Hasdrubal the Fair, 카리스마 있는 장군이자 외교가)가
이베리아에서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는 외교와 결혼 정책으로 부족들을 묶었고,
수도 카르타고 노바(오늘날 스페인 카르타헤나)를 세워 이 지역의 중심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병사들은 젊은 한니발을 새로운 지도자로 선택했다.
그는 전투와 모험을 통해 빠르게 성장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Hasdrubal Barca, 한니발의 친동생)는 함께 군을 지휘했고,
막내 마고 바르카(Mago Barca, 기습과 매복의 명수)는 후방에서 보급과 병력을 관리했다.
세 형제는 바르카 가문의 야망을 이어갔다.
하지만 로마와의 갈등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에브로 조약(카르타고는 에브로 강 이남 활동, 로마는 그 북쪽 활동을 인정)을 맺었지만,
문제는 사군툼(Saguntum)이었다.
이 도시는 에브로 강 남쪽에 있었지만 로마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니발은 로마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사군툼을 포위했다.
무려 8개월의 포위 끝에 도시는 함락됐다.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 원로원에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로마 사절은 토가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말했다.
“여기에는 평화와 전쟁이 있다. 어느 것을 고를 것인가.”
카르타고는 냉소로 답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길을 택했다.
그는 바다가 아니라, 육로로 로마를 치기로 했다.
5만의 보병, 9천의 기병, 코끼리 37두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 평야로 들어갔다.
갈리아 부족들은 처음엔 적대했지만, 한니발은 전투와 회유로 그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마침내 눈 덮인 알프스 산맥 앞에 섰다.
군대는 절망에 빠졌다.
“저 산은 인간이 넘을 곳이 아닙니다.”
한니발은 눈을 움켜쥐어 흩뿌리며 말했다.
“우리가 가는 길이 곧 길이 될 것이다.”
행군은 지옥이었다.
산악 부족들이 협곡 위에서 바위를 굴렸고, 병사와 말들이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코끼리들은 차례로 쓰러졌다.
식량은 부족했고, 추위는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앞장서서 길을 개척했다.
병사들은 그를 따라가며 “이 사내와 함께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몇 주 뒤, 살아남은 군대는 이탈리아 평야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보다 절반 가까이 줄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강철처럼 빛났다.
로마는 충격에 빠졌다.
“카르타고 군대가 알프스를 넘었다고? 불가능하다!”
기원전 218년, 티키누스 강 전투.
한니발은 로마 집정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훗날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를 부상 입혔다.
그의 아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 훗날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꺾는 로마 장군)는
이때 아버지를 구하며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이어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은 추위를 이용했다.
병사들을 강물에 일부러 노출시켜 로마군을 지치게 만들고,
마고 바르카(Mago Barca)가 이끄는 매복 부대가 후방을 덮쳤다.
로마군은 강물 속에서 수천이 얼어 죽거나 쓰러졌다.
기원전 217년 트라시메네 호수 전투.
짙은 안개 속에서 로마군은 길게 늘어져 행군했다.
그 순간 한니발의 군대가 양쪽 언덕에서 덮쳤다.
집정관 플라미니우스(Flaminius, 로마 장군)는 현장에서 전사했고, 로마군은 몰살당했다.
역사상 가장 큰 매복 전투였다.
로마는 충격 속에서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 ‘지연자’, 전면전을 피하고 소모전으로 대응한 로마 장군)를 독재관으로 세웠다.
그는 결전을 피하며 보급로를 끊고, 한니발을 소모시켰다.
로마 시민들은 조롱했지만, 이 전술은 한니발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로마군은 병력에서 두 배 가까이 많았다.
하지만 한니발은 중앙을 일부러 약하게 배치해 후퇴시키며 적을 끌어들였다.
양익의 아프리카 보병이 직각으로 접혀 들어와 로마군의 옆구리를 찔렀다.
누미디아 기병(Numidian cavalry, 북아프리카 기병, 기동력으로 유명)이
후방을 차단하자 로마군은 포위망에 갇혔다.
그날, 로마군 5만 명 이상이 쓰러졌다.
칸나에 전투는 지금도 군사학교에서 가르치는 고전이 되었다.
칸나에 전투의 악몽 이후, 로마는 꺾이지 않았다.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 ‘지연자’, 지연전술로 한니발을 소모시킨 로마 장군)의 전술과 원로원의 끈질긴 의지가 로마를 지탱했다.
한니발은 여전히 이탈리아에 머물렀지만,
보급은 줄었고 동맹 도시들의 이탈은 예상보다 더디었다.
로마는 이베리아 전선으로 눈을 돌렸다.
젊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 칸나에에서 살아남아 훗날 자마에서 승리하는 장군)는 에스파냐로 건너갔다.
그는 카르타고 노바(오늘날 스페인 카르타헤나)를 기습 점령했고,
이베리아에서 카르타고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하스드루발 바르카(Hasdrubal Barca, 한니발의 친동생)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형과 합류하려 했으나,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로마군에 패배했다.
전투 후 그의 머리가 잘려 한니발 진영으로 던져졌을 때, 병사들은 침묵했다.
한니발은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로마 원로원에 아프리카 침공을 제안했다.
로마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기로 했다.
스키피오의 군대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하자, 카르타고 원로원은 급히 한니발을 불러들였다.
15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싸우던 그가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
한니발은 수천의 노련한 병사와 코끼리를 전열에 세웠다.
스키피오는 병사들의 대열 사이에 길을 열어 코끼리들이 빠져나가도록 했다.
마시니사(Masinissa, 누미디아의 왕, 한때 카르타고의 동맹이었으나 로마 편에 선 인물)가
이끄는 기병은 카르타고 기병을 몰아내고 후방을 덮쳤다.
한니발은 최선을 다했지만, 전장은 무너졌다.
로마는 승리했고, 카르타고는 무릎을 꿇었다.
강화 조건은 가혹했다.
카르타고는 함대를 빼앗기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도 없었다.
카르타고는 더 이상 제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수펫테(Suffete, 카르타고의 최고 행정관)로 선출되어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귀족들의 부패를 단칼에 베어냈다.
과세 제도를 개혁해 귀족이 독점하던 부를 회수했고,
배상금을 시민들에게 공정하게 분담했다.
덕분에 수십 년 걸릴 배상금을 불과 10년 만에 갚을 수 있었다.
민중은 열광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로마에 속삭였다.
“한니발이 다시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압박을 가했다.
카르타고 귀족들은 한니발을 버리기로 했다.
한니발은 결국 스스로 망명을 택했다.
그의 첫 망명지는 시리아였다.
안티오코스 3세(Antiochus III,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는 한니발을 환영했다.
그는 로마와 맞서려 했지만, 한니발의 전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코스는 패배했다.
한니발은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소아시아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 1세(Prusias I, 소아시아의 왕)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곳에서 그는 여전히 로마의 적과 싸우려 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흙단지에 독사를 가득 담아 적선에 던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는 집요했다.
그들은 프루시아스에게 사절을 보내 압박했다.
“그를 넘겨라.”
기원전 183년 혹은 182년, 한니발은 자신의 저택이 포위된 것을 알았다.
그는 비밀 통로가 막힌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독약을 꺼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인들의 근심을 끝내주자.”
그는 잔을 비우고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로마에서는 한니발의 이름이 아이들을 위협하는 말로 쓰였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한니발이 문 앞에 온다.”
Hannibal ad portas.
그 문장은 로마인들의 무의식에 깊게 새겨졌다.
중세 유럽의 학자들은 그의 전술을 연구했고,
근대에 이르러 나폴레옹(Napoleon, 프랑스 황제)은 그를 존경했다.
독일 장군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참모총장)은
그의 칸나에 전술을 현대 전격전의 모델로 삼았다.
군사학에서 한니발은 오늘날까지도 교본이다.
문화에서도 그는 살아남았다.
라틴 문학에서는 공포의 상징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문학에서는 비극적 영웅으로 등장했다.
19세기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프랑스 작곡가)는 그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교향곡을 작곡했고, 심리학에서는 ‘한니발 콤플렉스’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는 예상치 못한 적이 갑자기 등장한다는 불안감을 뜻한다.
오늘날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는 그는 민족 영웅으로 기려진다.
카르타고 유적을 찾은 관광객들은 여전히 한니발의 이름을 듣는다.
알프스를 넘은 장군, 칸나에의 승리자, 자마의 패배자, 그리고 끝내 로마를 공포에 떨게 한 그림자.
그가 바로 한니발 바르카였다.
.jp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