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작가사전·실록과 관련 2차 문헌』
등을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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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습 초상(Portrait of Kim Si-seup), 조선, 보물 제1497호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PD-Art). 위키미디어 공용 |
성균관(조선 최고 교육기관) 담장 너머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자는 소리요, 소리는 뜻을 부른다.”
김시습(매월당, 1435–1493, 문인·승려)은 손보다 큰 붓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종이 위를 더듬었다.
먹물은 느리게 번졌고, 조부는 그 번짐을 미소로 지켜보았다.
“여섯 살이면 시험삼아 궁에 들어가 보아라.”
한 관료가 중얼거렸고, 골목사람들 사이에 ‘오세동자(五歲童子)’라는 별명이 돌기 시작했다.
아이의 이름 옆에는 언제나 책과 노트, 그리고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등잔불이 붙었다.
“천재는 잠을 아낀다.”라고 어른들이 말하면, 아이는 낮잠으로 그 말을 반쯤 지웠다.
월광이 흐르는 어떤 밤, 부친은 아들의 손을 잡고 궁궐 쪽으로 걸었다(전승).
세종(조선 4대 왕)은 작은 손을 보고 웃었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
“삶은 종이 위에서 검게 일어납니다.”
그 대답이 사실이든 말든, 골목의 소문은 더 커졌다(전승).
아이의 앞날은 환한 듯 보였고, 주변의 기대와 예언이 한 겹씩 달라붙었다.
책장마다 그의 이름을 새기려는 듯, 글씨는 날로 단단해졌다.
낭랑한 낭송이 성균관 마당의 새벽을 깨웠다.
여름 장맛비가 하루 종일 내리던 1455년,
북한산 중흥사(사찰) 마루 끝으로 젖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조카 단종을 밀어냈다는 전갈이었다.
마루 끝에서 비가 떨어지고, 누군가는 눈을 감았다.
청년 김시습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숙소로 돌아가 과거 답안과 시초를 꺼냈다.
종이를 묶고, 다시 풀고, 한 장씩 들춰 보았다.
아궁이 앞에 앉아 등 뒤로 손을 넣어 한 장을 밀어 넣었다.
불꽃은 먼저 모서리를 먹고, 이내 한 장을 통째로 집어삼켰다(전승).
“이런 세상에 무슨 벼슬이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다음 날, 그는 삭발했다.
승려 설잠(雪岑, 법호)이 세상에 나왔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수근거렸다.
그는 일부러 해진 도포를 걸치고 서울의 큰길과 산사의 작은길을 오갔다.
길 위에서 그는 늘 같은 자리의 돌을 밟았고,
그 돌이 발의 모양을 기억할 때까지 걸었다.
“미치면 편하다.”라고 누군가 속삭였고, 그는 웃음으로만 답했다.
노량진의 새벽 공기는 짠맛이 있었다.
강가의 안개가 사람의 신음을 숨겼다.
사육신(성삼문·박팽년 등)이 처형된 뒤, 사람들은 가까이 가지 않았다.
“가까이 가면 화가 미친다.”라고 노파가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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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문 서예(Seong Sam-mun Calligraphy), 조선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김시습은 물동이를 들고 강가로 내려갔다(전승).
마른 수의, 삽, 그리고 짧은 기도.
누군가의 이름을 속으로 부르며 흙을 퍼올렸다.
새벽이 눈을 뜨기도 전에 자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그를 ‘생육신(生六臣)’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칭찬이면서 경계였다.
그는 그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고, 대신 더 멀리 걸었다.
걸음이 길어질수록 소문은 그와 반대로 퍼졌다.
관서의 길은 넓었고 바람이 건조했다.
『유관서록(西錄)』에 그는 강변의 빛을 적었다.
“물빛이 바람을 먼저 닮는다.”
그 문장은 낚싯줄처럼 여백을 길게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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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부벽루(Pubyok Pavilion), 대동강변” / “Pubyok Pavilion, Pyongyang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대한제국/일제기 사진) 표기. 위키미디어 공용 |
관동의 길은 바다를 동행자로 붙잡았다.
『유관동록(東錄)』의 페이지는 파도 소리로 넘겨졌다.
그는 평양 부벽정(정자)에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밤하늘의 흰 별을 셌다.
“이별의 한자를 배웠으나, 별의 한자는 끝이 없다.”
그 밤, 그는 ‘취유부벽정기’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평양의 술은 별빛을 빌려 마신다.”
시가 소설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그는 말의 질량을 조절했다.
현실은 무거웠고, 환상은 가볍지 않았다.
|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Seated Buddha at Yongjangsa site, Namsan)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
경주 남산 금오산(남산의 별칭) 자락의 용장사(사찰)에는 밤이 깊어도 바람이 달았다.
그는 거기 앉아 ‘이생규장전’을 썼다.
담장 너머의 시선, 종이에 찍힌 한 줄의 시, 만남과 결절, 그리고 나중의 이별.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에는 시대가 덧칠되지만, 이별은 늘 같은 목소리를 냈다.
만복사(절)의 넓은 마당에서는 주사위가 구슬 소리를 냈다.
‘만복사저포기’의 양생이 손에 든 저포를 던지는 장면을 그는 몇 번이나 고쳐 썼다.
한 수의 이김과 평생의 지기를 맞바꾸는 순간.
“이긴 자가 지는 법을 배우는 데 평생이 든다.”
어느 밤에는 ‘남염부주지’의 박생이 꿈속 지옥을 돌아다녔다.
염라대왕이 묻고, 박생이 대답했다.
“죄는 무게를 다는가, 방향을 다는가.”
그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며 문장을 닦았다.
그의 방에는 불경과 주석서가 쌓였다.
『십현담요해』, 『조동오위요해』 같은 책등이 어둠 속에서 눕고 일어섰다.
세조 정권의 불서 언해 사업에 관여했다는 소식이 돌기도 했다(논쟁).
그는 책의 언어에서 사람의 언어로, 다시 사람의 언어에서 책의 언어로 돌아왔다.
비가 오면 절집 처마밑에서 물방울이 청동바닥을 두드렸다.
그는 물방울 수를 세다가, 어느 순간 졌다.
낮의 글이 밤의 글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길을 걷기로 했다.
길 위의 김시습은 말수가 적었다.
대신 그는 물건을 기억했다.
상인의 손때 묻은 저울추, 나무다리의 못, 여관 주인의 재떨이.
그런 것들이 그의 문장에 실려 다녔다.
“정치가 싫다.”
이 문장은 그가 말한 적도, 쓰지 않은 적도 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늘 그 말과 같았다.
권력은 그를 부르지 않았고, 그는 권력을 부르지 않았다.
성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어느 해, 그는 한양의 지붕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관직의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전승).
그는 미소를 지었다.
길이 열리는 때에 길을 벗어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다시 산사로.
책상 위에는 『매월당집』이라는 표제가 놓였다.
종이가 늘고, 먹이 줄었다.
그는 때때로 병을 앓았고, 병은 그를 길게 눕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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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사 오층석탑(Muryangsa Five-story Pagoda), 부여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 |
부여 홍산의 무량사(사찰)에서 마지막 겨울을 맞았다.
눈이 오면 범종 소리가 멀리 갔다.
그는 종소리의 끝에 종소리의 처음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숨을 고르고, 손가락으로 종이 끝을 만졌다.
“오늘은 못 쓰겠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손등의 힘줄이 얇아졌다.
먹물은 언제나의 냄새였지만, 오늘은 조금 희미했다.
사람들은 그가 죽던 날의 날씨를 전해 주지 않았다.
대신 그 다음 날의 조용함을 전했다.
절집 마당의 눈이 잘 녹지 않았고, 개 한 마리가 참았던 울음을 길게 뱉었다(전승).
그의 방에서는 ‘매월당’ 도장과 ‘설잠’ 호가 새겨진 봉함문서가 몇 장 나왔다.
장례는 크지 않았다.
그는 커다랗게 살지 않았으므로, 마지막도 그랬다.
비석에는 그의 뜻을 담은 한 문장이 새겨졌다는 전승이 있다.
“죽는 날까지 꿈꾸던 늙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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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신화 목판본 스캔(Geumo Sinhwa woodblock edition scan), 1884 일본 간행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PD-scan, PD-Korea). 위키미디어 공용 |
그의 죽음이 끝인 줄 알았으나, 책이 남았다.
『금오신화(金鰲新話, 한문 소설집)』, 『유관동록』, 『유관서록』, 『유호남록』, 시문집, 불교 주석.
책은 사람의 손을 건너며 조금씩 읽히고, 조금씩 상한다.
그 상한 가장자리에서 새 독자의 손가락이 다음 문장을 찾아간다.
평양 부벽정의 밤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없다.
하지만 그 밤은 문장으로 남았고, 문장은 다음 밤을 만든다.
만복사의 저포 소리도, 용궁의 잔치도, 염부주의 문답도 그러하다.
현실을 비켜간 이야기가 결국 현실의 중심을 찌른다.
어느 스님이 물었다.
“시습, 왜 그렇게 걷느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더 멀리 걸었다.
어떤 유생이 물었다.
“선생님, 왜 그렇게 쓰십니까.”
그는 웃었다.
“쓰지 않으면 내가 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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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목판(Korean wood printing block), 19세기 Wikimedia Commons, CC0(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공용 |
그 길은 오늘도 남아 있다.
성균관 담장, 북한산 중흥사, 평양 부벽정, 경주 용장사, 부여 무량사.
이름이 남은 자리에 이야기가 붙고, 이야기가 붙은 자리에 사람이 선다.
발을 디디는 곳마다, 그는 한 줄씩 남겼다.
그의 남긴 줄들 사이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종이를 넘기고, 종이는 사람을 넘긴다.
사람은 이야기를 넘기고, 이야기는 다시 우리를 넘긴다.
넘김의 기술이 곧 문학의 기술이다.
그가 떠난 뒤에도 살아남은 것은 절개만이 아니었다.
비극을 감상으로 흐리지 않는 태도, 환상을 현실의 복사본으로 쓰지 않는 절제.
사랑을 찢어 감정의 조각으로 내놓는 대신, 사랑을 한 덩어리로 들고 끝까지 버티는 힘.
그 힘이 그의 인물들을 서 있게 했다.
밤의 등잔불 아래, 누군가 그의 책을 읽는다.
“사랑은 이어지지만, 생은 떠난다.”
그 문장을 읽는 사람의 숨이 조금 느려진다.
읽는다는 것은 속도를 조절하는 일임을, 그는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지고, 성균관 골목 어귀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난다.
“문자는 소리요, 소리는 뜻을 부른다.”
먼 시대의 소리가 가까운 방으로 돌아온다.
그 돌아옴이 문학의 시간표다.
오늘 우리가 그를 부를 때, 이름이 많아도 주인은 한 사람뿐이다.
김시습, 매월당, 설잠, 동봉, 청한자.
그 많은 이름은 한 사람의 길 위에 놓인 표시였다.
표시는 방향을 주고, 방향은 다시 발을 움직인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전승은 가벼워지고, 모든 논쟁은 조용해진다.
남는 것은 한 사람의 문장과 몇 개의 장소뿐이다.
그 문장과 장소가 만나면, 소설은 또 한 번 시작된다.
오늘은 그 시작을 우리가 맡는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다시 만복사에서 저포를 던질 것이고,
누군가는 부벽정에서 밤새 시를 읊을 것이다.
누군가는 염부주를 여행하고, 누군가는 용궁의 잔치에 앉아 잔을 들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단종의 이름을 조용히 부를 것이다.
그 순간, 불은 다시 종이의 모서리를 먹기 시작할 것이다(전승).
누군가는 그 불을 말릴 것이고, 누군가는 그 불을 지켜볼 것이다.
김시습은 둘 다 해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현재형으로 읽힌다.
우리는 오늘도 그 현재형의 문장에 발을 올려놓는다.
걷는다.
본다.
쓴다.
그 뒤의 일은 문장이 안다.
문장은 늘 다음 장을 준비하고, 독자는 늘 다음 장을 넘긴다.
김시습은 그 ‘넘김’의 전문가였다.
첫 줄에서 마지막 줄까지, 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첫 줄까지.
이렇게 한 번 더 도는 동안, 그의 이름이 속삭인다.
“벼슬 대신 길을, 길 대신 글을.”
그 선택이 우리에게 남겨준 건 재미와 단단함이다.
재미는 읽게 하고, 단단함은 오래 남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읽는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불을 끈다.
불빛이 사라져도 문장은 남는다.
그 문장이 바로, 김시습이다.
Kim Si-seup (1435–1493), a prodigy who later became the monk Seoljam, refused office after Sejo usurped King Danjong in 1455.
Legend says he burned his exam papers and tended the slain Six Martyred Ministers.
He roamed the peninsula, writing travel notes, verse, and the landmark tale collection Geumo Sinhwa—“Manboksa Jeopogi,” “Iseong Gyujangjeon,” “Chuyu Bubukjeonggi,” “Namyeombujuji,” “Yonggung Buyeonrok.”
He died at Muryangsa, remembered for integrity: walk, witness, wr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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