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브랜드 역사: 스우시 로고부터 에어조던까지. (The History of Nike)




 이 글은 [브리태니커 Encyclopedia Britannica], [Nike 공식 연혁], [Phil Knight의 회고록 

《Shoe Dog》], [Harvard Business School Case Study], [국제 NGO 보고서(노동·인권)],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 아카이브]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962년, 필 나이트는 스탠퍼드 졸업 후 일본으로 향했다.

스스로를 ‘사업가’라 부르기도 민망했던 젊은이는 얇은 서류 가방 하나를 들고 

도쿄의 오니츠카 타이거 본사 문을 두드렸다.

긴 복도를 따라 들어서자 공기에는 잉크 냄새와 낯선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그는 허술한 일본어와 서툰 영어를 섞어 말했다.

“미국 서부에 운동화를 수입해 팔고 싶습니다.”

당시 오니츠카 직원들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이 젊은이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었다.

결국 그는 대리 계약을 얻어냈고, 귀국길 비행기 안에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제 시작이다. 미국에서 아디다스와 푸마와 싸울 무기를 손에 넣었다.’

오리건에 돌아온 그는 코치 바워만과 함께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 신발을 팔았다.

대학 캠퍼스의 러너들은 새로운 신발을 신어 보고 “이건 다르다”고 속삭였다.

작은 불씨가 붙었다.

그 불씨는 곧 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번졌다.

그러나 남의 신발로는 한계가 있었다.

자신들만의 브랜드가 필요했다.




1971년, 캐롤린 데이비슨이라는 젊은 그래픽 디자인 학생이 작은 사무실로 불려왔다.

필 나이트는 말했다.

“우리는 새로운 로고가 필요합니다. 움직임을 상징하고, 힘을 상징해야 합니다.”

그녀는 연필을 굴리며 여러 곡선을 그려냈다.

그러다 종이 한쪽에 휘어진 선 하나가 자리했다.

매끈하면서도 날카로운 선.

마치 날개 같고, 마치 번개 같았다.

필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요. 이걸로 합시다.”

그녀가 받은 돈은 고작 35달러였다.

그러나 훗날 나이키는 그녀에게 주식과 보상을 선물하며 그 빚을 갚았다.


스우시가 탄생하던 바로 그 해, 바워만은 또다시 부엌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다.

와플 기계에 고무를 부어 새로운 밑창 패턴을 만들었다.

와플 모양의 홈은 놀라운 접지력을 주었고, 운동화는 가볍게 뛰어올랐다.

와플 트레이너는 러너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1984년, 나이키는 농구계의 신인을 찾아 나섰다.

마이클 조던.

그는 아디다스를 원했지만, 아디다스는 그를 가볍게 여겼다.

컨버스는 이미 슈퍼스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키는 달랐다.

“우리는 당신을 중심으로 한 라인을 만들겠다.”

결국 계약이 성사되었고, 에어 조던 1이 세상에 나왔다.

빨강과 검정이 강렬하게 대비된 그 신발은 코트 위에서 번개처럼 빛났다.

그러나 NBA는 그 색상이 규정을 어긴다며 조던이 신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조던은 경기 때마다 그 신발을 신고 나섰다.

벌금은 경기마다 5000달러.

그러나 나이키는 기꺼이 그 벌금을 대신 내주었다.

“NBA가 금지한 신발.”

이 카피는 오히려 젊은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거리의 아이들은 조던처럼 뛰고 싶었고, 조던처럼 신발을 신고 싶었다.

에어 조던은 단순한 농구화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1988년, 텔레비전 광고에서 “Just Do It”이라는 문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화면 속 장면보다 그 세 마디에 더 크게 흔들렸다.

늙은 러너가 어두운 새벽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 위에 땀이 맺히고, 숨은 가쁘게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Just Do It.

그 순간 나이키는 신발이 아니라 철학을 팔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대학 캠퍼스에는 또 다른 나이키의 얼굴이 보였다.

이번엔 시위 현수막 속이었다.

학생들은 “나이키 = 스웨트숍”이라 외쳤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공장에서 어린아이들이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하며 받는 돈은 햄버거 한 개 값에 불과했다.

땀과 눈물이 밑창에 스며 있다는 폭로가 이어졌고, 언론은 나이키를 비판했다.

뉴욕, 런던, 자카르타에서 동시에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스우시에 X 표시를 하고 운동화를 불태웠다.


필 나이트는 이 위기를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대중 앞에 나와 말했다.

“우리는 잘못을 바로잡겠습니다. 더 투명하게, 더 책임감 있게.”

이후 나이키는 공장 점검과 보고서를 공개했고, 조금씩 신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나이키는 다시 기술과 혁신을 무기로 삼았다.

에어맥스의 투명한 쿠션은 미래를 보여주었고, 

플라이니트는 한 올 한 올 짜인 경량의 마법 같은 신발을 만들었다.


애플과 손잡고 Nike+ 플랫폼을 출시하면서 

러너들은 달리기를 데이터로 기록하고 친구와 공유할 수 있었다.

이제 나이키는 운동화가 아니라 ‘경험’을 팔았다.




2010년대, 나이키는 다시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콜린 캐퍼닉이 경기 전 미국 국가 연주 때 무릎을 꿇었을 때, 

그는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을 항의하고 있었다.

미국 사회는 갈라졌고, 나이키는 그를 광고 모델로 내세웠다.


“Believe in something. Even if it means sacrificing everything.”


이 문장은 열광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왔다.

신발을 불태우는 사람도 있었고, 나이키 주가가 폭등하는 기적도 동시에 일어났다.


스우시는 이제 단순한 로고가 아니라, 사회적 발언의 아이콘이 되었다.

오늘날 나이키 매장에 들어서면, 벽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달려 있다.

여성 선수들이 땀을 흘리며 웃고, 청소년들이 코트를 달린다.

한편으로는 재활용 소재로 만든 신발이 전시되어 있다.


Move to Zero.


탄소 배출을 줄이고, 지구를 지키겠다는 캠페인이다.

오리건의 작은 트랙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이제 지구 전체를 무대로 펼쳐지고 있다.


필 나이트는 회고록 《Shoe Dog》에서 말했다.


“사업은 단순히 돈을 버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신념을 지키는 싸움이다.”


나이키의 역사는 승리의 역사만이 아니다.

실패와 비판, 착취와 책임, 그 모든 것이 얽혀 있다.

그러나 바로 그 갈등과 대립이 브랜드를 신화로 만들었다.

스우시는 승리의 날개이자, 동시에 책임의 무게다.


나는 이 이야기를 쓰며 한 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필 나이트가 그때 일본 출장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만약 바워만이 와플 기계를 부엌에서 꺼내지 않았다면,

만약 조던이 나이키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스포츠 문화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그 흐름이 오늘날의 나이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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