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연대기: 후백제 건국부터 공산 전투, 금산사 탈출, 왕건과 최후까지 (Gyeon Hwon)



 이 글은 [공식 연대기, 학술 해설, 그리고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을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과 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합니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이 뺨을 스쳤다.

소년은 그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바다를 응시했다.

저 너머, 아득히 멀리 보이는 섬들처럼 신라의 영광도 이젠 허상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견훤(甄萱)이었다.


상주 견훤사당 정면 전경,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 - 후백제 견훤 제향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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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남쪽 해안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보라색 옷을 입은 남자가 바친 배를 받아먹는 꿈을 꾸고 자신을 낳았다는 신비로운 이야기 (전승)는, 배고픔 앞에서 그저 전설일 뿐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썩어 있었다.

왕실은 매일같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었고, 관리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며 배를 불렸다.

병사들은 약탈자가 되어 백성들을 짓밟았다.

견훤의 아버지는 농부였지만, 아들은 무인(武人)의 길을 택했다.

그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입은 군복은 더러웠다.

백성을 지키는 갑옷이 아니라, 백성을 억압하는 도구였다.

어느 날, 굶주림에 지친 농부들이 산적떼로 변해 마을을 덮쳤다.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비명과 뒤섞였다.

견훤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칼을 뽑으려 했다.

그의 상관이 소리쳤다.

"놈들을 잡으러 가라! 이 모든 것이 그들의 탐욕 때문이다!"

견훤은 칼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탐욕'은 굶주림에서 온 것이었다.

진정한 탐욕은 수도 경주의 화려한 궁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견훤은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 돌아섰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는 더 이상 썩어빠진 나라의 군인이기를 거부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마을의 젊은이들과 뜻을 함께하는 병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견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무력과 카리스마로 무장한 그는 이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폭풍의 눈이 되었다.


전주 풍남문(Pungnammun Gate), 완산” / “Pungnammun Gate, Jeonju (Wan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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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後百濟)라는 이름은 그의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졌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나라를 되살리는 일이 아니었다.

신라의 압제에 신음했던 백제(百濟) 유민(遺民)들의 울분을 해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892년, 견훤은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신라의 영토를 잠식해 나갔다.

그는 거침없이 나아갔고, 백성들은 그를 환영했다.

견훤의 군대는 단순한 반군이 아니라, 억압받던 민중의 희망이었다.

마침내 그는 무진주(武珍州, 현 광주)를 점령했다.

어둡고 낡은 신라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새벽이 밝아오는 순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나이 마흔, 그는 더 이상 하급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피로 물든 땅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왕이었다.

견훤은 왕의 자리에 앉아 조용히 생각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 썩어빠진 세상을 모두 불태우고, 새로운 태양을 띄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동쪽에는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 운명의 라이벌, 고려(高麗)의 왕건(王建)이었다.

두 용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태조 왕건(Taejo of Goryeo, Wang Geon) 초상” / “Portrait of Taejo of Goryeo (Wang G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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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금빛 갑옷을 입고 백제의 옥좌에 앉았다.

그의 눈은 거침없는 야망으로 불타올랐다.

그는 스스로를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북쪽에도 그와 같은 야망을 품은 사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왕건(王建)이었다.

왕건은 개성(開城, 현 개성시) 지역의 호족(豪族) 출신으로, 

상인 집안에서 자라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사람을 다루는 능력을 타고났다.

두 사람은 900년대 초반부터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견훤은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려 했고, 왕건은 덕으로 민심을 얻으려 했다.

두 거대한 용은 한반도라는 하늘을 놓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927년 가을, 후백제의 군대는 거침없이 북상했다.

견훤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들이쳤다.

백제 멸망의 한을 풀려는 듯, 그의 군대는 무자비했다.

경주 시내는 불길에 휩싸였고, 사람들의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왕건은 견훤의 급습 소식을 듣고 5천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경주로 향했다.

왕건의 목표는 견훤의 후퇴를 막아 공략하고, 신라의 민심을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견훤은 이미 왕건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경주를 초토화시킨 후, 

후퇴하는 척하며 공산(公山, 현 대구 팔공산)이라는 험준한 산악 지대로 왕건을 유인했다.


팔공산 갓바위(Gatbawi), 대구·경산” / “Gatbawi Buddha, Palgongsan Range (Daegu/Gyeong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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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의 골짜기.

견훤의 매복군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들의 눈은 매서웠다.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좁은 협곡으로 진입했다.

그 순간, 견훤의 군대가 쏟아져 나오며 왕건의 군대를 포위했다.

"왕건! 내 손에 죽어라!"

견훤은 직접 선두에 서서 포효했다.

왕건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그의 부하 장수들이 "폐하, 저희는 이곳을 지키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차례로 전사했다.

왕건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쳐야 했다.

그의 붉은 갑옷이 피로 물들었고, 그의 눈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공산 전투는 견훤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였고, 왕건의 생애에서 가장 뼈아픈 패배였다.

견훤은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포효했다.

"이제 이 천하는 내 것이다!"


견훤산성(Gyeonhwon Fortress) 성벽과 산릉선, 상주” / “Ramparts of Gyeonhwon Fortress, Sa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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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승리는 독이 든 성배였다.

공산 전투에서 보여준 견훤의 무자비함은 백성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를 심었다.

반면 왕건은 패배했지만,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자신을 지킨 부하들의 충성심에 감동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건의 이러한 모습은 백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백성들은 왕건에게서 인간적인 면모와 지도자의 덕목을 보았다.

견훤은 힘으로 천하를 지배하려 했지만, 백성들은 덕을 가진 왕을 원했다.

그때부터 민심은 서서히 견훤의 곁을 떠나 왕건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견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오직 자신의 힘과 무력만이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 승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곧 비극의 서막이었다.

견훤의 내면에서부터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후계자 문제(논쟁)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여러 아들과 아내들이 왕위를 두고 서로를 견제하며 칼을 갈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 전투(Battle of Mt. Kongsan) 신숭겸·왕건 도상” / “Battle of Mt. Kongsan (17th-c.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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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 전투의 승리는 견훤의 권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는 백제 부흥의 꿈을 이룰 유일한 왕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가장 단단해 보여야 할 왕관은, 그의 가족이라는 가장 연약한 실타래에 묶여 있었다.

견훤에게는 여러 명의 아내와 스무 명이 넘는 아들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왕위를 두고 은밀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이는 첫째 부인의 아들인 신검(神劍)이었다.

그는 뛰어난 무인이었고, 이미 여러 전투에서 아버지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신검은 자신이 당연히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견훤의 마음은 달랐다.

그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었다.

금강은 신검과는 달리 학식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견훤은 금강의 온화함에서 새로운 나라의 미래를 보았다.

그는 여러 번 신하들 앞에서 금강을 칭찬하며 후계자로서의 뜻을 내비쳤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신검의 마음속에 질투와 분노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노력과 공로가 모두 무시당하는 것만 같았다.

금강의 등장은 신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칼날이었다.

신검은 자신의 동생인 양검(良劍), 용검(龍劍) 등과 함께 비밀리에 모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아버지를 제거하고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궁궐의 복도에는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귓속말이 오고 갔고, 눈빛만으로 서로의 야심을 확인했다.

아버지 견훤은 이러한 불길한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왕관을 물려줄 아들을 고르는 일에만 몰두했다.

935년, 마침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견훤이 지방을 순행하고 있는 동안, 신검은 거사를 일으켰다.

새벽의 어둠 속, 신검이 이끄는 군사들은 금강의 처소로 향했다.

금강은 자신의 형제들이 들이닥친 것을 보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의 눈빛에서 이미 죽음을 읽었다.

신검은 칼을 들고 서 있는 동생들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다. 반역을 꾀한 금강을 처단하라."

금강은 형의 거짓말을 들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형님, 이 모든 것이 제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부디 이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려 주십시오."

칼날이 번뜩였고, 금강은 쓰러졌다.

궁궐의 바닥은 순식간에 피로 얼룩졌다.

신검은 금강을 죽인 후, 곧바로 돌아온 아버지 견훤을 붙잡아 금산사(金山寺, 현 김제시)에 유폐시켰다.

견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검아, 어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신검은 아버지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갑고 비정한 눈으로 아버지를 응시할 뿐이었다.

견훤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이룬 모든 것이, 자신의 피를 나눈 자식들의 손에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라를 세운 왕이었지만, 자식 농사에는 실패한 한 명의 초라한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는 절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곱씹었다.

왕관은 그의 머리에서 떨어져 핏자국이 묻은 채 아들의 손에 쥐어졌다.

그의 분노는 타오르는 불길 같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금산사 오층석탑(Geumsansa Five-story Stone Pagoda), 김제” / “Geumsansa Ocheung Seoktap, Gim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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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금산사(金山寺)의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했지만, 마음속은 불타는 지옥과 같았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후백제의 왕은, 이제 아들이 파놓은 감옥에 갇힌 노인이었다.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무너진 꿈에 대한 좌절이 그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복수를 다짐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배신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되갚아주리라.

견훤은 기회를 엿보았다.

그의 감옥은 철옹성 같았지만, 견훤은 끈질겼다.

세 달 후, 마침내 운명의 여신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딸 부부의 도움을 받아 몰래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어둠을 뚫고 나온 견훤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복수심으로 가득 찬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북쪽을 향해 걸었다.


후삼국 시대 지도(915) — 후백제·고려·신라” / “Map: Later Three Kingdoms (c.915 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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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모두가 그의 다음 행보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자신이 평생을 싸워온 숙적, 왕건(王建)의 궁궐이었다.

왕건은 견훤의 귀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견훤을 직접 맞이하고, 그를 아버지처럼 지극히 존경했다.

왕건의 마음속에는 견훤에 대한 존경과 함께, 동정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영웅이, 자식의 배신으로 몰락한 비극적인 모습은 왕건의 마음을 움직였다.

왕건은 견훤을 깍듯이 대하며 말했다.

"폐하, 제가 비록 폐하의 적이었지만, 이제는 폐하의 아들처럼 모시겠습니다."

견훤은 왕건의 진심 어린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왕건의 품에서 복수를 위한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936년, 왕건은 견훤의 제안을 받아들여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다.

견훤은 왕건의 선봉에 서서, 자신이 세운 나라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그의 눈앞에는 자신이 쌓아 올린 찬란한 왕국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왕국은 이미 자신의 손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 견훤은 아들의 군대를 향해 소리쳤다.

"신검아! 어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신검은 냉정했다.

이미 왕위에 앉은 그는 아버지의 분노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신검은 항복했고, 후백제는 멸망했다.

견훤은 자신이 세운 나라가 자신의 손으로 멸망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의 복수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승리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사실상 그는 패배자였다.

견훤은 나라를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정을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삶은 비극적인 권력욕과 부성애가 충돌한 드라마였다.

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혈육을 믿지 못하고 다루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채, 병을 얻어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그의 이름은 후백제의 창업주로 기록되었지만, 그의 삶은 배신과 복수의 대명사로 역사에 남았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결국 그 자신을 무너뜨리는 가장 잔인한 복수였을지도 모른다.


개성 왕건릉 석상(Statues at Tomb of King Wanggon)” / “Stone Statues at King Wanggon’s Tomb, Kae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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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 Hwon's life was a tragic drama born from the decay of Silla. 

A low-ranking officer, he grew disillusioned with a corrupt state and founded Later Baekje in 892. 

His rival, Wang Geon of Goryeo, was his antithesis—a ruler who won hearts. 

Their struggle for power culminated in a brutal victory for Gyeon Hwon at the Battle of Gongsan. 

Yet, his ruthless tactics alienated the people, who turned to Wang Geon's compassion.

 The true betrayal came from within: his sons staged a coup and imprisoned him. 

Filled with rage, Gyeon Hwon escaped and surrendered to his lifelong enemy, Wang Geon. 

In a final act of vengeance, he fought his own son, witnessing the fall of his kingdom at his own hands. 

Though he won his revenge, Gyeon Hwon lost everything—his family, his kingdom, and his legacy forever marked by ambition and betray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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