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세나(이븐 시나)의 생애와 유산: 중세 의학의 아버지 (Avicenna)



 이 글은 『의학전범(알 까눈 피 앗 티브)』, 『치유의 서(알 시파)』, 

주즈자니(제자)의 전기 기록과 현대 학술 연구를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의사·철학자 이븐 시나(아비센나)의 전통 초상
Wellcome Collection, CC BY 4.0.


그의 이름은 이븐 시나(서구에서 ‘아비세나’로 알려짐)였다.

980년 무렵, 

부하라 인근의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는 일찍부터 낡은 서책의 냄새와 별빛의 궤도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철학과 신비사상에 관심 많은 페르시아인 관료였고, 

집엔 늘 학자들과 이야기꾼이 드나들었다.

소년은 열 살이 되기 전에 쿠란을 통암했고, 성가를 읊는 틈틈이 논리학 문제를 풀었다.

“만약 세계가 필연으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필연의 가장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른들이 입술을 다물 때, 소년은 더 깊이 물었다.

“왜 병은 사람을 고르는가, 왜 별은 떨어지지 않는가.”


열여섯으로 접어들 무렵, 소년의 관심은 의학으로 기울었다.

그는 약초의 냄새와 맥박의 리듬, 환자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미세한 두려움을 동시에 읽어내고 싶었다.

시장 골목에서 기침하는 남자를 보면 혀 아래의 색을 떠올렸고, 

저물녘의 한기를 느끼면 담즙과 점액의 균형을 상상했다.

그는 병을 신의 징벌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사슬로 이해하고 싶어 했다.

“원인이 있으면 진단이 있다. 진단이 있으면 처방이 있다.”

이 간결한 신념이 평생 그의 촉을 이끌었다.


그의 재능은 곧 부하라 궁정의 귀에 들어갔다.

젊은 의사가 군주의 병을 고쳐 보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더 많은 책보다 한 사람의 맥을 선택했다.

군주(사마니드 왕조 누흐 2세)는 오래된 복통과 소화 장애로 누워 있었고, 

궁정의 명의들도 약발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이븐 시나는 조용히 맥을 재고 혀를 살폈다.

“군주께선 음식보다 두려움을 먼저 삼키십니다. 식사 시간의 리듬을 되찾게 해드리죠.”

그는 복잡한 처방 대신 식이·습관을 먼저 바꾸게 했고, 

약초를 배합해 소화의 불씨를 다시 피웠다.

며칠 뒤, 군주는 일어났다.

사마니드 궁정은 젊은 의사에게 왕립 도서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곳엔 그리스와 인도, 페르시아의 지식이 언어의 층을 넘어 쌓여 있었다.

소년은 서가 사이를 오가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숨을 들이마시고, 

갈레노스의 맥을 짚고, 인도의 식물학을 베껴 적었다. 


도서관의 문은 지식의 축복이었지만, 축복은 언제나 시샘을 낳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서관이 화재로 사라졌을 때, 몇몇은 그를 향해 속삭였다.

“천재를 만든 책을 불태워 출처를 감추려 한 거다.”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불길은 문서 위를 훑었지만, 머릿속의 도서관은 타지 않았다.

그의 손은 더 빨리 움직였고, 새벽의 눈은 더 많이 읽었다.

(해당 ‘방화’ 의혹은 동시대 적대자들의 모함으로 전해지며, 실증은 명확치 않다. 

그러나 이 일화는 그가 어떤 시선 속에서 글을 써야 했는지 보여준다.) 


맥진을 하는 의사—『의학정전』 1632년 장정 그림
Wellcome Collection, CC BY 4.0.

그의 삶은 안정과 격변의 박자로 오갔다.

부하라가 흔들릴 때 그는 책을 들고 떠났다.

고르간, 레이, 카스빈, 하마다⁠. 밤마다 다른 별 아래서 다른 궁정의 공기를 들이켰다.

하마다⁠(하마단)에 이르렀을 때, 그를 찾은 이는 부이다 왕조의 군주 (샴스 알 다울라)였다.

“의사여, 내 병을 고쳐라. 그리고 내 정치를 진정시켜라.”

왕은 그를 의원으로, 곧 재상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권력의 그림자는 활자보다 빠르게 번진다.

궁정의 귀와 입술은 언제나 누군가의 몰락을 원한다.

그는 하루는 연회를 진정시키고, 하루는 반대를 잠재웠다.

다음 날이면 자신이 그 연회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그가 쓰러뜨린 병들보다, 그를 쓰러뜨릴 음모는 더 낡고 끈질겼다.

그는 결국 하마다 외곽의 성채(파르다잔 요새)에 갇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길이 좁아졌고, 종이의 여백은 더 좁아졌다.

그러나 그는 철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글자가 선명해졌다.

“논리는 지식의 관문이고, 영혼은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그는 작은 종잇조각에 형이상학의 골격을 그려 넣었고, 의학의 분류표를 빼곡히 채웠다. 


“스승, 오늘은 무엇을 쓰십니까?”

감시병이 졸린 눈으로 물었다.

그는 미소만 지었다.

“너에게 필요한 건 잠이고, 나에게 필요한 건 문장이다.”


운명은 아이러니를 사랑한다.

그를 가두었던 권력은 곧 무너졌다.

그리고 그는 수피의 옷차림으로 요새를 빠져나왔다.

머리와 수염을 다듬고, 지팡이를 짚은 채, 바람에 실린 먼지처럼 성문을 지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이스파한이었다.

카쿠이드 왕조의 (알라 알 다울라)라는 통찰력 있는 후원자가 그를 맞았다.

“당신의 책상은 여기다. 병자와 병든 정치를 동시에 치료해다오.”

이 시기, 그의 삶은 가장 안정됐다.

군주의 원정에 동행하며도 밤이면 램프 아래 앉아 원고를 고쳤다.

페르시아어로 쓴 백과서 『다니슈나메 예 알라이』(‘알라 알 다울라를 위한 학문의 책)를 헌정했고, 

맥박에 관한 의학서도 바쳤다. 


하메단 아비센나 박물관의 『의학정전』 페르시아어 사본
Coffeetalkh, CC BY-SA 3.0.

그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두 권이 함께 놓였다.

하나는 의학, 하나는 철학.

의학의 책은 몸을 진단했고, 철학의 책은 존재를 진단했다.

『의학전범』은 다섯 권으로 인간의 몸과 질병을 분류했다.

증상의 연쇄를 해부하고 약물의 성정을 시험하는 원칙을 세웠다.

“복합 질환자에게 신약을 시험하지 말 것, 서로 반대되는 조건에서 시험할 것, 

약의 강도는 병의 세기에 대응할 것, 발현 시간을 따질 것, 

대체로 같은 효과가 반복될 것, 동물과 인간의 몸은 다를 수 있음에 유의할 것.”

그의 문장은 임상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 실험의 윤곽을 그려두었다.

또한 그는 결핵의 전염성을 명확히 기술하고, 

감염자의 격리·고립(설명: 오늘날 ‘격리/쿼런틴’에 해당)을 권고했다.

오염된 물과 토양이 병을 옮길 수 있음을 언급하며 위생의 의미를 강조했다. 


철학의 책상 위엔 『치유의 서』가 있었다.

제목은 의학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논리·자연학·수학·천문·형이상학을 아우른 거대 백과였다.

그는 이 책의 ‘영혼론’에서 한 사유실험을 세심하게 전개한다.

“떠 있는 인간(플로팅 맨)의 상상을 해보라. 

감각을 모두 차단해도 ‘나는 있다’는 자각은 남는다.”

자기 의식의 자명성을 통해 영혼의 실재와 독립성을 논증하는 이 사유는 

중세와 근대를 가로질러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밤마다 그는 별을 올려다봤다.

한밤의 뜨거운 핵을 지나오며도 꺼지지 않는 점들이 하늘을 걷고 있었다.

그는 어느 기록에 “태양 위의 작은 점으로 보이는 금성”을 보았다고 썼다.

그 날이 1032년 5월의 금성 일식(금성의 태양면 통과)이었는지, 

또는 흑점을 오인한 것인지 후대는 논쟁한다.

중요한 건 그가 하늘을 ‘현상으로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간의 그늘이 있었다.

그는 술과 음악, 친구와의 밤을 사랑했다.

돌이켜보면 그 열정은 그를 북돋우기도, 때로는 병을 부추기기도 했다.

적들은 그를 방탕하다고 했고, 제자들은 스승의 피로를 염려했다.

그는 스스로를 몰아붙여 글을 쓰고 진료하며 논쟁장으로 나갔다.

몸이 부서지는 소리가 속에서 들릴 때에도, 그는 더 깊은 원인을 찾기 위해 사건과 문장을 분해했다.

“나는 아직 세계의 반만 썼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 그의 위(胃)는 불을 품었다.


그의 삶에는 찬양과 비판이 공존했다.

정통 신학자들은 그가 이성을 신앙과 경쟁시키며 신비를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신을 증명하려는 논증(진실한 자의 증명)에 몰두했다.

그의 인식론과 존재론은 알 가잘리 같은 강력한 논객의 공세를 불렀다.

“그는 위험한 철학자다.”

이 말은 그를 이단으로 선언하려는 입술에서, 

혹은 그를 더 치열하게 읽으려는 학생의 가슴에서 동시에 울렸다. 


정치도 그를 쉬게 놓아주지 않았다.

하마다의 권력은 그를 재상으로 앉혔다가 끌어내렸고, 

이스파한의 통치자는 그에게 가장 안정된 안식처를 내주었다.

요새의 차가운 돌바닥과 이스파한 궁정의 따뜻한 양탄자 사이를 오가는 동안에도, 

그는 하루에 쉰 장을 써내리던 시기가 있었다.

그 문장들은 결국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으로 건너갔고, 

수세기 동안 의과대학의 손바닥 위에서 닳아 없어졌다.

그의 이름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각주에 오르고, 

갈레노스의 옆줄에 앉았을 때, 그는 이미 수많은 시대의 제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남긴 실천의 유산 가운데 오늘 우리가 특별히 또렷이 읽는 대목은 두 가지다.

첫째, 원인-증상-진단-처치라는 임상적 사고의 서사화.

그는 병의 과정을 이야기처럼 배열하여, 의사가 따라가야 할 길을 지도처럼 남겼다.

둘째, 약효 검증에 관한 규칙들.

그는 혼합질환자·복합약 처방의 혼선을 피하고, 대조와 반복을 강조했다.

그 규칙은 오늘날의 임상시험 설계에 닿는 선(線)으로 자주 소환된다.

그가 돌려놓은 나침반은 ‘권위’에서 ‘검증’으로 향했다. 


물론 한계도 있다.

그의 체계는 갈레노스의 유산을 정교하게 다듬었으나, 

해부학적 금기와 기술 제약 때문에 실험 생리학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그가 걷어올린 거대한 그물은 시대가 허락한 만큼의 물고기만을 담았다.

근대 이후, 현미경과 화학이 열어젖힌 세계는 그의 분류표에 새로운 문장을 덧붙였다.

그러나 새 문장이 등장한다고 해서 낡은 문장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낡은 문장은 여전히 ‘어떻게 질문하는가’를 가르친다.


그가 말년에 이스파한의 궁정과 원정을 오가던 중, 격통이 찾아왔다.

그가 평생 겨뤄온 복부 산통이었다.

그는 스스로 처방을 바꿔가며 통증을 누그러뜨리려 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1037년, 하마다로 향하는 길 위에서 그의 걸음은 느려졌고, 결국 멈췄다.

장례는 소박했으나, 그의 책들은 성대했다.

사후의 독자들이 그에게 바치는 만년필의 조문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이어진다. 


하메단의 아비센나 영묘 전경
Nick Taylor, CC BY 2.0.

이제, 독자는 물을지 모른다.

“그는 영웅인가, 기회주의자인가.”

정답은 어느 쪽에도 갇히지 않는다.

그는 궁정의 재상이었다가 죄수였고, 신비주의에 호기심을 보이다가도 논리의 문지기였다.

그는 가끔 지나치게 마셨고, 더 자주 지나치게 썼다.

그의 모순은 인간의 모순이며, 그 모순과 싸운 방식이 그의 위대함이다.


그를 둘러싼 논란 중엔 흥미로운 뼈대가 몇 가지 더 있다.

첫째, 사마니드 도서관 화재 이후의 ‘지식의 출처’를 둘러싼 모함.

둘째, 요새 탈출과 수피 변장이라는 전기적 일화가 보여주는 생존 본능.

셋째, 금성 태양면 통과 관측 주장을 둘러싼 과학사 논쟁.

“그가 정말 봤는가, 흑점을 착각했는가.”

학자들은 지도와 날짜, 지평선의 각도를 계산해가며 논쟁을 이어간다.

나는 이 논쟁들에서 그가 얼마나 자주 ‘관찰하고 기록하려 했다’는 태도만은 분명히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격리의 발상.

그는 결핵 같은 병의 전염성을 말했고, 감염자의 격리를 권했다.

물론 그의 시대에 ‘세균’은 아직 이름조차 없었다.

하지만 ‘전파’라는 현상을 포착해 공동체적 조치로 연결한 상상력은, 

학자 이븐 시나의 사려 깊음을 증명한다. 


한밤의 서재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의술을 통해 몸을, 철학을 통해 존재를, 관찰을 통해 하늘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더 많은 것을 남겼다.

그는 질문하는 법을 남겼다.

증상의 서사에서 원인의 문장을 추론하는 법, 

혼탁한 주장 속에서 검증의 실 가닥을 뽑아내는 법, 신앙과 이성 사이의 좁은 다리를 건너는 법.

그의 뒤를 잇는 이들은 각자 다른 시대의 도구를 들고 그 다리를 건넜다.

현미경과 해부칼, 논리학과 수학, 언어학과 천문학이 그 다리 위에서 차례로 발자국을 남겼다.


Adam Jones, CC BY-SA 2.0 / PD-Mark 병기. 


이븐 시나의 초상은 오늘 우리의 교과서에서 점점 얇아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여전히 오래된 병원 복도와 철학 강의실의 첫 장에 있다.

의사는 환자의 맥을 짚으며, 철학자는 떠 있는 인간을 상상하며, 

과학사는 하늘의 점을 되짚으며 그를 떠올린다.

그가 결국 증명한 것은, 인간의 지성은 유한하지만 

유한한 것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다리는 서가와 서가 사이, 병상과 책상 사이, 별과 눈동자 사이를 연결한다.

그 다리를 건너는 수많은 발걸음 속에서, 그의 문장은 여전히 기침처럼, 

그러나 멈추지 않는 심장박동처럼 되풀이된다.


그리고 이제 책장을 덮는 독자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은 하나일지 모른다.

오늘 우리의 병은 무엇이고, 우리의 철학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이븐 시나는 대답 대신 방법을 남겼다.

원인을 찾아라.

관찰하라.

반증을 준비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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