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브리태니커》, 노벨재단 공식 자료,
《Alfred Nobel: The Man Behind the Prize》 등 주요 기록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장면과 대사 중심의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용어에는 처음 등장할 때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895년 11월 27일 밤,
파리의 스웨덴·노르웨이 클럽(당시 연합국 교류 공간)에서 잉크 냄새가 났다.
알프레드 노벨(1833–1896, 스웨덴 화학자·발명가·기업가)이 유언장에 서명했고,
펜촉이 종이를 지나갈 때 작은 긁힘 소리가 남았다.
“내 재산의 대부분을 기금으로 돌린다.”
그의 문장은 간단했고, 규칙은 명확했다.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평화(노벨의 유언에 명시된 다섯 분야).
그는 이유를 길게 쓰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줄에 시간이 녹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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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레드 노벨(1833–1896), 괴스타 플로르만 촬영 |
시간은 거꾸로, 파리의 겨울을 떠나 스톡홀름의 차가운 강변으로 흘러갔다.
소년 알프레드의 집은 늘 공구 소리로 깨어 있었다.
아버지 이마누엘 노벨(스웨덴 발명가·기술자)은
다리·폭파 기술을 연구하던 엔지니어였고,
어머니 안드리에테(상인 집안 출신)는 억척스러운 경영자였다.
사업이 흔들리자 가족은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제국 수도)로 옮겼고,
거기서 집은 다시 실험실이 되었다.
소년은 언어를 빨리 익혔다.
스웨덴어·러시아어·프랑스어·영어·독어를 오가며,
문장 안의 화학식을 읽는 법을 배웠다.
파리에서는 더 위험한 일이 기다렸다.
T. J. 펠루제(프랑스 화학자)의 실험실,
그리고 아스카니오 소브레로(1847년 니트로글리세린 발견)라는 이름.
소브레로는 유리병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건 너무 위험해요. 절대 실용화하지 마세요.”
병 속의 니트로글리세린(충격·마찰에 극도로 민감한 액체 폭약)이 미세하게 빛났다.
알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는 다른 문장이 생겼다.
“그래서 더 안전하게 만들 방법을 찾는다.”
귀국 후, 작은 바지선 위의 상자 하나가 폭발했다.
그 다음엔 헛간이 사라졌고, 그러고도 불길은 멈추지 않았다.
1864년 스톡홀름 헬레네보리 공장의 폭발은
그의 동생 에밀 노벨(알프레드의 남동생)과 작업자 여럿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말했다.
“이제 그만 끝내겠니.”
알프레드는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오히려 더 안전하게 하겠습니다.”
그는 두 가지를 붙잡았다.
폭발을 ‘불러오는’ 장치와, 폭발을 ‘품어 줄’ 재료.
먼저 기폭(폭발을 시작시키는 과정)을 안정시키는 뇌관(1863년경 특허, 기계적 충격으로 기폭)과
도화선의 조합이 정돈되었다.
다음은 니트로글리세린을 흡수시켜 취급성을 높이는 지지체였다.
알프레드는 규조토(Kieselguhr·규조의 화석 가루)라는 다공성 물질에
니트로글리세린을 스며들게 해 덩어리로 만들었다.
1867년, 다이너마이트(니트로글리세린을 다공성 흡수체에 흡착한 상용 폭약)가 세상에 나왔다.
민감한 액체는 이제 막대 모양으로 운반·절단·계량할 수 있었다.
광산의 암반은 더 빨리 열렸고, 터널은 두 배의 속도로 뚫렸다.
산업은 박수를 쳤고, 신문은 묻기 시작했다.
“이 발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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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종류의 뇌관(기폭장치) 구조 단면도 출처 CC BY-SA 3.0 |
세상은 늘 한 손에 건설을, 다른 손에 파괴를 쥔다.
철도·항만·수로·터널은 다이너마이트의 속도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포성의 언덕에서도 그 발명이 쓰였다.
알프레드는 이중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그는 1894년 보포스(스웨덴 군수·철강 회사)를 인수해 현대식 공장으로 바꾸었고,
동시에 무연화약 발리스타이트(1887년 특허·질산셀룰로스+니트로글리세린 기반 추진제)를 만들어
전 세계의 소송과 정치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탈리아·프랑스에서의 특허 분쟁은 그를 외톨이로 만들었고,
파리의 아파트에는 늦은 밤 잉크 냄새만 남았다.
서랍의 편지 몇 장은 오랫동안 닫혀 있었다.
어느 날 파리의 신문 1면에 부고가 실렸다.
“죽음의 상인(프랑스 신문이 쓴 표현)이 죽었다.”
그러나 죽은 이는 알프레드가 아니라 그의 형 루드비그 노벨(형, 러시아 유전 사업가)이었다.
오보는 하루 만에 정정되었지만 문장은 남았다.
알프레드는 그날 밤 자신의 이름을 읽는 법을 새로 배웠다.
“내가 떠난 뒤에도 이렇게 기억된다면.”
그는 책상을 정리했다.
오래 미루던 유언장을 쓸 시간이 왔다.
| 알프레드 노벨 유언장(1895) — p.3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Alfred_Nobel_testament_1895_page_3.JPG CC BY-SA 3.0 |
그는 세상을 두 가지로 나눴다.
“사람을 죽게 하는 기술”과 “사람을 살게 하는 지식”.
그리고 자신의 돈을 두 번째 쪽으로 밀어 넣었다.
유언장은 간결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물리·화학), 카롤린스카 연구소(생리의학),
스웨덴 아카데미(문학), 노르웨이 노벨위원회(평화).
해마다 인류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준다.
돈은 기금이 되고, 기금의 이자는 상이 된다.
지식이 나눠지는 속도가 미움이 나눠지는 속도를 앞지르길 바란다는
문장이 보이지 않는 잉크로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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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타 폰 주트너(노벨 평화상 수상자·노벨의 지인) |
그의 삶은 도망과 탐구, 우정과 침묵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였다.
베르타 폰 주트너(1843–1914, 오스트리아 평화운동가·소설가)는 잠시 그의 비서로 일했고,
이후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가 되었다.
“평화는 과학의 속도를 닮아야 한다”는 그녀의 문장은 알프레드의 생각을 자주 바꿔 놓았다.
1905년, 그녀는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알프레드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그 가능성을 설계했다.
사적인 감정은 포장되지 않았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한때 오스트리아의 소피 헤스(노벨과 장기간 서신을 주고받은 여성)와 오랜 편지를 주고받았고,
문학을 사랑해 희곡 「네메시스(1896년경 비공개 인쇄된 비극)」를 남겼다.
서랍 속 원고는 그가 과학자이자 사업가였고,
동시에 문장을 가꾸는 사람이었다는 조용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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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다이너마이트 공장 ‘크뤼멜’ 관리동(게슈타흐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Dynamitfabrik_kruemmel_verwaltung.jpg CC/GFDL |
그의 회사들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니트로글리세린 AB(스웨덴의 초기 회사)와 함부르크 근교 크뤼멜 공장(독일 게슈타흐트 일대),
다이너마이트 생산을 위한 합작사들이 지도 위에 점처럼 찍혔다.
공장 옆 묘지에는 초창기의 희생자들이 누워 있었다.
알프레드는 매번 같은 지시를 내렸다.
“더 안전하게.”
안전은 ‘기억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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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라 노벨, 산레모 - 말년의 집/박물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Villa_Nobel%2C_Sanremo.jpg CC BY-SA 2.0 |
1896년 12월 10일, 산레모(이탈리아 리비에라 해안)에서
알프레드 노벨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스톡홀름의 노라 묘지(Norra begravningsplatsen)에서 치러졌다.
유언의 집행자 라그나르 숄만과 루돌프 릴리에퀴스트(비서이자 사업 동료)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공장·특허·채권을 모아 기금으로 바꾸었다.
사람들은 그 과정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회사들은 각국의 법에 묶여 있었고, 상속인들은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유언은 간단했다.
“이 돈은 지식의 속도를 올리는 데 쓰라.”
1901년, 첫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과학자들의 이름, 문학가의 제목, 그리고 평화의 메시지가 무대 위에서 발표되자
그의 유언장은 현실의 문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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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레드 노벨 묘, 노라 묘지(스웨덴 솔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Nobel_grav_2009.jpg CC BY-SA 3.0 |
그의 상은 다섯 개였다.
경제학상(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이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 추모 경제학상’)은
그의 유언장이 아닌 별도의 기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뒤늦게 자주 설명되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여섯 개를 모두 ‘노벨상’이라 부르지만, 법적으로는 구분된다.
그는 다섯 개의 상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다섯 개는 ‘세상을 움직이는 문장’들의 모음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지식, 사람을 설명하는 언어, 사람을 치유하는 기술,
사람을 이해하는 눈, 사람을 화해시키는 용기.
그는 폭발의 기술자였지만, 마지막에는 시간을 다루는 작가가 됐다.
다시 파리의 그 밤으로 돌아가 보자.
서명은 끝났고, 봉투가 봉해졌다.
창밖에서는 마차 바퀴가 소리를 냈다.
노벨은 짧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모든 폭발은 끝에 빛을 낳는다.”
그 빛을 어디에 비출지, 그가 선택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오늘도 매년 12월에 울린다.
스톡홀름과 오슬로의 무대 위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불린다.
박수 소리 사이로 한 문장이 들린다.
“지식이 미움보다 빨리 퍼지기를.”
알프레드 노벨을 영웅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를 ‘죽음의 상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두 표현 사이에는 언제나 그의 이름이 끼어 있다.
산업의 속도를 높인 발명, 전쟁의 속도를 높인 기술,
그리고 그 속도를 인간의 존엄으로 되돌리려는 유언.
그의 마지막 발명은 폭약이 아니라 제도였다.
제도는 매년 한 번씩, 세상 앞에서 터지는 온화한 폭발이 되었다.
그 폭발의 파편은 장난감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동기다.
그는 그것을 알고 떠났다.
그가 남긴 숫자는 355건의 특허(노벨 생애 누적 특허 수)였다.
그가 남긴 한 줄은 더 짧았다.
“문제는 속도다.”
폭발의 속도를 제어하는 기술, 지식의 속도를 올리는 제도,
오보가 남긴 속도, 그리고 유언장이 만든 속도.
알프레드 노벨의 생애는 네 개의 속도가 한 문장에 묶이는 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그 속도 중 하나에 이름을 붙인다.
노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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