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창세기(히브리 성서/타나크의 첫 책)》와 쿠란의 관련 구절,
고고학·지리 연구(우르·모리아·살렘 비정)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소설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니라 장면과 대사 중심의 재구성이며,
논쟁이 있는 부분은 (논쟁)으로 표시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기독·이슬람이 함께 공경하는 족장으로 서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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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르의 지구라트(이라크) Great Ziggurat of Ur, partially reconstructed (2007)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Great_Ziggurat_of_Ur.JPG |
우르의 밤은 뜨거웠다.
아브람(개명 전 이름)이 지붕 위에서 별을 보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떠나라.”
그는 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아버지 데라의 집, 익숙한 골목, 상인들의 목소리가 뒤로 멀어졌다.
우르(칼데아의 우르로 전통적으로 비정되나 우르파설 등도 있음, 논쟁)가
과연 그의 고향이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다.
하지만 떠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란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보지 못한 땅으로 가자.”
사래(개명 전 사라)와 조카 롯은 말없이 짐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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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drei Rublev, The Hospitality of Abraham (Holy Trinity Icon)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Andrej_Rubl%C3%ABv_001.jpg CC BY-SA(원화 PD, 재현물 CC). |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더운 바람이 식탁의 빵 냄새를 흔들었다.
낯선 이 셋이 먼지를 털고 앉았다.
“물부터 드시지요.”
아브라함이 말하자 사라가 빵을 내왔다.
“내년 이맘때 아이가 있을 거요.”
낯선 이가 조용히 말했다.
사라는 천막 뒤에서 웃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내 나이에 무슨 아이.”
그러나 웃음은 이름이 되었다.
이삭(‘웃다’의 뜻)이라는 이름은 그날의 미소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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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므레의 상수리나무(역사 사진) Oak of Mamre (Abraham’s Oak), early 20th-century LOC photo 미 의회도서관 ‘No known copyright restrictions’.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Abraham%27s_Oak%2C_Hebron_LOC_matpc.06207.jpg |
그보다 앞서 집 안은 한 번 흔들린 적이 있었다.
사라는 무겁게 말했다.
“하갈과 함께 아이를 가지세요.”
하갈(이집트인 여종)은 처음에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배가 불러오자 마음속 자리가 뒤바뀌었다.
사라는 질투했고 하갈은 도망쳤다.
사막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한 샘 곁에서 천한 울음이 멈췄다.
“돌아가라.”
사막의 음성이 하갈을 불렀다.
“네 아들은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하갈은 그곳을 브엘 라하이 로이(‘나를 보시는 분의 우물’)라 불렀다.
아들의 이름은 이스마엘이었다.
사라와 하갈과 아브라함은 같은 집에 살면서도 다른 질문을 안고 잤다.
누구의 약속이 누구에게 먼저 오는가.
그 질문은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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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의 하갈’(카미유 코로, 1835, 메트) Camille Corot, Hagar in the Wilderness (1835), The Met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Hagar_in_the_Wilderness_MET_DT2013.jpg |
전쟁이 터졌을 때 아브라함은 가만있지 않았다.
연합군에게 끌려간 롯을 찾아 밤길을 나눠 이동했다.
작은 무리가 기습했고 포로들은 돌아왔다.
그 길로 이상한 만남이 있었다.
살렘의 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들고 나왔다.
“높으신 분의 복을 빕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 이를 그에게 주었다.
살렘이 예루살렘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전통적 해석이 있으나(논쟁) 확정된 한마디는 아니다.
그러나 그날 식탁의 온기는 분명했다.
전쟁 뒤 사람들은 먼저 빵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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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후 ‘빵과 포도주’ 장면의 전통적 도상. Ravenna, San Vitale – Sacrifice of Abel and Melchizedek (lunette)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Sacrifice_of_Abel_and_Melchisedek_mosaic_-_San_Vitale_-_Ravenna_2016.jpg CC 라이선스(코먼즈). |
밤에 그는 다시 별을 보았다.
손에 횃불 대신 깊은 잠이 내려왔다.
짐승을 둘로 가르고 길처럼 벌려 놓는 의식이 있었다.
연기 나는 화로와 횃불이 그 사이를 지나갔다.
언약(당시 근동의 맹약 의식)의 표지가 그렇게 남았다.
그리고 아흔아홉의 해에 그는 또 한 표지를 받았다.
“이름을 바꿔라.”
아브람은 아브라함(‘무리의 아버지’)이 되었고 사래는 사라(‘공주/귀부인’)가 되었다.
할례(언약의 표지)가 그의 집안 남자들에게 시행되었다.
늙은 부부가 서로의 새 이름을 부르는 장면은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단단했다.
사라는 종종 그 이름을 만지듯 발음했다.
“아브라함.”
사람들이 자주 묻는 일이 있다.
“아브라함이 함무라비와 동시대였을까.”
연대는 겹칠 수 있으나 직접 만남이나 기록의 교차 증거는 없다(논쟁).
그 시대의 공기는 비슷했을지 몰라도 인물의 얼굴까지 포개어 그리면 안 된다.
이 이야기는 겹치기보다 간격으로 살아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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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돔에서 달아나는 롯과 두 딸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Lot Fleeing with His Daughters from Sodom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3ALot_Fleeing_with_his_Daughters_from_Sodom_by_Albrecht_D%C3%BCrer |
소돔의 밤은 늘 떠들썩했다.
도시는 낯선 이들을 함부로 대했고 약한 사람을 못 본 척했다.
아브라함은 멀리서 그 불빛을 보며 조용히 기도했다.
“그 안에 착한 사람들이 있으면, 도시를 살려 주세요.”
그는 숫자를 하나씩 낮추며 물었다.
“쉰 명이면요?”
“마흔다섯이면요?”
“서른, 스무, 열 명이라도 있으면요?”
뜻은 하나였다.
“소수의 선한 이들 때문에라도, 이 도시를 봐줄 수 없나요?”
하지만 그 ‘열 명’조차 없었다.
도시는 결국 심판을 피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가족과 함께 급히 빠져나왔다.
그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떠나라 한 당부)가 있었다.
롯의 아내는 미련이 남아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처럼 굳었다.
지나간 곳에 붙잡히면 앞으로 못 간다는 경고였다.
아브라함은 먼지투성이로 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중재는 거기까지였다.
다음 날, 재와 연기가 오르는 하늘을 보며 그는 짧게 기도했다.
“뜻대로 되지 않았어도, 남은 이들은 살 길을 찾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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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존 마틴, 1852) John Martin, The Destruction of Sodom and Gomorrah (1852)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John_Martin_-_Sodom_and_Gomorrah.jpg |
이삭이 자라날 때 집 안의 긴장은 다시 불거졌다.
사라가 단호히 말했다.
“여종의 아들과 함께할 수는 없어.”
이스마엘은 떠났다.
광야의 물부대가 바닥을 보였을 때 하갈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아이의 이름처럼 목소리는 들렸다.
“크게 울지 마라.”
우물의 물이 햇빛을 반사했다.
두 길은 그렇게 갈라졌다.
한 길은 이삭에게, 한 길은 이스마엘에게.
둘 다 민족의 길로 이어졌다.
어느 날 아침, 아브라함은 말없이 장작을 챙겼다.
“아버지.”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 있지요.”
“하나님이 마련하실 것이다.”
둘은 산을 올랐다.
모리아(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산과 연결되기도 함, 논쟁)의 바람은 날카로웠다.
칼이 들렸다가 멈췄다.
“그만해라.”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이 있었다.
그날의 이야기는 이후 세 종교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풀렸다.
유대 전통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이 강조된다.
기독교의 해석에서는 ‘대속’의 예표를 읽는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시험의 아들이 종종 이스마엘로 전승되며, 순복의 의미가 더해진다(논쟁).
원문과 전승을 구분할 때 이 장면은 자주 오해를 줄인다.
칼이 멈췄다는 사실과, 자비가 그 자리를 채웠다는 사실은 공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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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라바조의 모리아 이삭의 희생 (우피치 버전) Caravaggio (attributed), Sacrifice of Isaac (Uffizi)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Sacrifice_of_Isaac-Caravaggio_%28Uffizi%29.jpg |
사라는 오래 살다 눈을 감았다.
아브라함은 장례를 간단히 치르지 않았다.
막벨라 굴(헤브론 인근)을 에브론에게서 정식으로 샀다.
은 사백 세겔의 무게가 가늠되었다.
“왜 사십니까.”
누군가 물었다.
“여기 묻고, 여기 산다.”
문서와 증인이 모였다.
땅에 대한 권리는 메모가 아니라 거래로 남았다.
그의 늙은 손이 땅을 쥐었고, 그 손은 흙먼지를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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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벨라 굴(헤브론, 족장들의 묘) Cave of the Patriarchs, Hebron – exterior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Hebron_Cave_of_the_Patriarchs.jpg |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이 집안에서 각자의 길을 골랐다.
이삭의 길은 이스라엘의 족장들로 이어졌다.
이스마엘의 길은 아라비아로 번져 큰 민족의 계보로 전승되었다.
아브라함은 유대·기독·이슬람이 함께 조상으로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를 유대교의 창시자라고 불러도 되나.”
율법과 제의 체계를 세운 이는 모세로 전승된다.
그래서 학술적으로는 아브라함을 ‘족장’이라 부르는 편이 정확하다.
그러나 신앙의 언어에서 그는 약속의 시작점으로 기억된다.
별과 모래의 비유가 그 증언이다.
밤이 오면 그는 여전히 별을 본다.
“저렇게 많을까.”
사라는 웃음을 닮은 이삭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한다.
“이미 많아.”
하갈은 사막의 샘가에 앉아 물의 그림자를 내려다본다.
“보시는 분은 여전히 보신다.”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걸어 두고 말없이 문을 닫는다.
롯은 아이들의 손을 더 세게 잡는다.
아브라함은 마지막으로 땅을 한 줌 집어 올린다.
사람의 이야기는 흙에서 시작해 흙으로 돌아간다.
약속은 흙 위에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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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 여정 지도(SVG) - 우르–하란–가나안 경로 빠른 이해용 Map – Abraham’s Journey to Canaan (CC BY-SA)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3AAbraham%27s_Journey_%28en%29.svg CC BY-SA(코먼즈, 2023 제작) |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을 남긴다.
아브라함이 실제로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우르의 위치는 여전히 논쟁이다.
모리아가 어디인가.
성전 산으로 보는 전통이 있지만 확정은 어렵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살렘과 예루살렘의 연결은 오래된 추정이지만 결정적 증거가 부족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말하는 중심은 같다.
떠남과 환대와 약속과 시험과 회복.
그 네 단어가 아브라함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한 세대도 그런 단어들로 움직인다.
이야기를 닫기 전 마지막 장면을 그린다.
해가 기울고, 천막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불러 옆에 앉힌다.
“두려움이 올 때가 있다.”
그는 말한다.
“그때는 먼저 나누고, 다음에 붙잡아라.”
빵을 나누고, 땅을 붙잡는 일.
그 두 가지가 그의 생애를 정리한다.
그리고 어디서나 같은 결말이 나온다.
별은 늘 손에 잡히지 않지만, 손을 올려 본 사람에게는 빛이 남는다.
*중요*
이 글은 《창세기》와 관련 전승·연구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재구성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대사와 장면은 기록을 ‘요약·해설’한 것이지
원문과 1:1로 일치하는 텍스트가 아닙니다.
특히 지명 비정(우르·모리아·살렘)과 사건 해석(아케다의 대상, 소돔의 죄의 성격 등)은
전통·학계마다 견해가 다르므로,
정확한 사실 확인은 경전 원문과 신뢰할 만한 주석·학술서를 함께 참고해 주십시오.
본문에 (논쟁)으로 표시한 대목은 확정되지 않은 해석임을 뜻합니다.
이 글의 목적은 특정 종교적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요 서사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문학적 입문’입니다.
재미로 읽되, 사실 판단은 반드시 원전과 2차 문헌을 함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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