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브리태니커·옥스퍼드 영어사전(OED)·아일랜드 토지전쟁 자료』 등
주요 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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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nty Mayo highlighted on map of Ireland(아일랜드 지도에서 강조된 메이요) Wikimedia Commons, PD-self. 위키미디어 공용 |
아일랜드 메이요 주 로흐 마스크 하우스(Lough Mask House, 메이요 카운티) 앞들에 가을바람이 불었다.
곡식이 익었고, 수확은 급했다.
그러나 일꾼은 오지 않았다.
마부는 말을 빌려주지 않았고, 대장간은 못 한 봉지를 그냥 밀어두었다.
우체부는 편지를 건네지 않았고, 상점은 외상을 끊었다.
집 주변엔 조용한 빈 공간이 생겼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비켜 선 공간, 사회적 단절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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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rles C. Boycott caricature, Vanity Fair 1881(찰스 보이콧 캐리커처, 1881)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 집의 관리인은 찰스 커닝엄 보이콧(영국인 지주대리인, Charles C. Boycott)이었다.
그는 런던의 주인, 얼 오브 언(Erne)의 땅에서 소작료를 거두고
미납자에게 퇴거 통지를 보내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해 1880년, 흉작으로 생활이 흔들린 소작인들이 25% 인하를 요구했지만
보이콧은 거절했고, 일부 세입자에게 퇴거를 명했다.
그 순간, 마을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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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rles S. Parnell addressing a meeting(파넬의 연설 장면) Library of Congress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폭력 말고, 외면으로 싸워라.”
아일랜드 토지연맹(Irish Land League)과
민족지도자 찰스 스튜어트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의 호소가 메이요에 번졌다.
교회에서, 시장에서, 길 위에서 모두가 같은 방법을 선택했다.
그와 거래하지 말 것.
그의 집을 방문하지 말 것.
그의 말을 듣지 말 것.
그의 이름을 부르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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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mer house of Charles Boycott on Achill Island(찰스 보이콧의 옛 집, 아킬 섬)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NL. 위키미디어 공용 |
며칠 사이, 그 집은 섬이 되었다.
수확철인데 인부가 없으니 곡식이 들판에서 늙어 갔다.
보이콧은 궁지에 몰려 북쪽 얼스터(Ulster)에서 자원자 50명을 불러들였다.
그들이 도착할 때 군경과 기병, 수백의 무장 호송대가 길을 열었다.
그 수확의 비용은 500파운드짜리 곡물을 건지기 위해 10,000파운드가 들었다고 전한다.
학자들의 계산은 대동소이하다.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이 싸움은 “마을의 침묵”이 완승을 거둔 사건이었다.
그 무렵, 새로운 말이 태어났다.
“보이콧(boycott).”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는 설이 갈린다(논쟁).
미국 기자 제임스 레드패스(James Redpath)가
1880년 9월 23일 현지 성직자 오말리 신부가 이 말을 제안했다고 기록했고,
그는 시카고의 《인터-오션(Inter-Ocean)》 10월 12일자 기사에 처음 썼다고 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ED)은 1880년 글래스고 헤럴드(Glasgow Herald)와
런던 타임스(The Times) 등 동시기 신문을 가장 이른 증거로 든다.
그해 11월 영국 신문들은 벌써 “to Boycott”을 동사로 설명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성(姓)이, “조직적으로 거래·교류를 끊어 압박하는 일”의 일반명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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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es Redpath portrait(제임스 레드패스 초상) Library of Congress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그날 이후, 보이콧 씨의 일상은 작은 장면들로 이루어졌다.
대문 앞에서 뒤돌아선 우체부.
“오늘은 편지가 없네요.”
실은, 편지가 와도 건네지 않았다.
곡마단처럼 몰려온 수확대가 떠난 뒤, 집은 더 고요해졌다.
그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내리고, 이 새로운 전술이 섬에서 도시로,
아일랜드에서 영국과 미국으로 번지는 동안에도 메이요의 바람은 그냥 불었다.
단어의 길을 따라가 보면 더 분명해진다.
보이콧(boycott)은 고유명에서 보통명사·동사로 바뀐 사례다(어원).
“특정 인물·단체·상품과의 거래·교류를 중단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고,
20세기 노동·인권·소비자 운동의 기본어가 되었다.
사전을 보면 “최초 사용 1880년”이라고 적는다.
영어권 이후의 다수 언어로도 원어 그대로 들어갔다.
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폴란드어 등에 ‘보이코타주’ ‘보이코티룬’ 같은 발음으로 변주되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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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lliam Barnes Wollen, Captain Boycott’s Corps, 1880(윌리엄 B. 월런, ‘보이콧 부대’, 1880)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물론 이 전술은 더 오래된 관습에서 뻗어 나왔다.
마을 전체가 한 사람을 “도덕적 코번트리(Coventry)”로 보내는 관행, 즉 사회적 추방은 중세부터 있었다.
그러나 1880년 메이요에서 일어난 일은 조직화·명명·전파라는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했다.
이름을 얻은 관행은 곧 전략이 된다.
전략이 된 이름은 금세 국경을 넘는다.
보이콧이라는 이름의 진짜 힘은 “비폭력의 설득력”에 있었다.
총도 칼도 들지 않고, 일상에서 고리를 끊는 것.
편지와 장바구니, 구두쇠의 장부와 부엌의 소금이 그 전선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말했을지 모른다.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오.”
마을은 더 간단히 답했다.
“우리는 우리 일을 하지 않을 뿐이오.”
그리고 단어는 남았다.
오늘 우리는 “불매운동” “학술회의 불참” “광고 중단” 같은 형태로 그 단어를 말한다.
정치적 지지와 신념의 차이를 일상적 선택으로 표현하는 방법.
1880년 가을, 메이요의 한 집을 비켜 서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유산이다.
간혹 묻는다.
보이콧은 언제 유효한가.
정답은 없지만, 단어의 출발지는 몇 가지 힌트를 준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 때.
경제적 신호가 분명히 전달될 때.
그리고 그 요구가 “삶을 지키려는 인간의 조건”에 닿아 있을 때.
그럴 때 단어는 도덕이 되고, 도덕은 행동이 된다.
다시 로흐 마스크 하우스를 떠올려 본다.
그 가을, 수확의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사람 대신 침묵이 일을 했고, 그 침묵이 하나의 이름을 만들었다.
Boycott.
그 이름이, 오늘도 우리가 쓰는 말의 뿌리다.
In 1880 in County Mayo, Ireland, land agent Charles C. Boycott refused rent reductions and issued evictions.
The Irish Land League answered with a non-violent tactic: no labor, no mail, no trade, no talk. Isolated, Boycott imported harvesters under armed escort at huge cost.
Journalists then popularized a new word—“to boycott”—which quickly entered British and American papers as noun and verb.
Today it means organized refusal of dealings to exert pressure, a lasting tool of peaceful pro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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