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엄과 고구마 보급의 전말: 18세기 조선을 바꾼 감저 이야기 (Jo Eom)



 이 글은 『승정원일기·일성록·조선통신사 관련 기록』과 농정 관련 2차 문헌을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설명합니다.

조엄(1719–1777) 초상, 감저 전래와 동래부사 활동 소개용 / Cho Eom portrait for sweet-potato introduction & Dongnae magistrate context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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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그친 항구에 푸른 빛이 번졌다.

조엄(조선 외교관·관료, 1719–1777)이 배에서 내리자, 

포구의 냄새 속에 바닷바람과 젖은 볏짚 냄새가 섞였다.

“곡식값이 또 뛰었습니다.”

부산포로 달려온 아전이 장부를 덮었다.

남부 지방에 흉작 소문이 돌았고, 쌀자루는 사람들 손에서 더 빨리 비어 갔다.


조엄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가느다란 뿌리가 흙에 반쯤 묻혀 있었다.

“이것이 감저(甘藷, 고구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감…저요?”

그는 씨줄과 날줄처럼 짧게 설명을 깔았다.

“덩이줄기를 땅에 눕혀 키운다. 모래 많고 비가 적어도 버틴다. 

맛은 달다. 무엇보다 흉년에 끈질기다.”


1748년 에도 시내를 행차하는 조선통신사 / Joseon Tongsinsa procession in Edo (1748)
Kobe City Museum 소장 재현 이미지,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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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조엄은 일본 사행단의 부사(副使)로 대마도(쓰시마)를 거쳐 서쪽 섬나라에 닿았다.

항구의 장정들이 들고 나르던 자루에 이상한 표식이 찍혀 있었다.

“사쓰마(薩摩)의 뿌리작물.”

그는 그곳에서 처음 감저를 제대로 보았다.

몸집이 작아도 삶으면 포만감이 컸고, 척박한 밭에서도 수확이 드물지 않았다.

조엄은 통역을 붙여 재배법을 콕 찍어 물었고, 포만과 저장, 병해의 대처를 빠르게 메모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대마도 거점을 통해 싹눈 붙은 줄기를 분양받았다

(논쟁: 직수입인지 대마도 경유인지에 학설 차이).


부산 초량 왜관 전경, 18세기 교역·외교 현장 / Choiryang Waegwan (Japanese Trading Post) in Busan, 18th c.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상,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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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하룻밤 눈을 붙인 그는 바로 땅을 봤다.

“모래가 많은 밭부터.”

그가 첫 시험지로 고른 곳은 동래와 기장, 거제와 통영의 따뜻한 구릉이었다.

“이 작물은 시작이 얕아야 한다.”

조엄은 막걸리 잔을 내려놓고 논밭 주인들을 설득했다.

“봄에 가지를 눕히고, 여름에 김을 매고, 첫 서리 전 수확하라.”

말끝마다 그는 ‘입 안의 맛’보다 ‘창고의 버팀’을 강조했다.


첫해의 수확은 조심스레 웃었다.

바구니마다 붉고 노란 덩이가 울퉁불퉁하게 올랐다.

“쌀처럼 씻지 않아도 굶지 않는다.”

한 노인은 불 위에 올린 덩이 하나를 반으로 갈랐다.

수증기가 새어 나왔고, 단내가 허공에서 선회했다.

그날 밤, 조엄은 되새겨 썼다.

“송곳처럼 날이 선 작물. 넘치지 못해도 모자라지 않게 하는 작물.”


아침마다 관아 앞에 사람들이 몰렸다.

“씨를 나눠 달라 하옵니다.”

조엄은 보급 요령을 세 조각으로 나눠 읍성에 뿌렸다.

첫째, 따뜻한 개간지부터 시작할 것.

둘째, 논이 아닌 밭, 모래 섞인 곳 우선.

셋째, 씨줄기 보관은 그늘과 통풍.

또한 그는 아전에게 귀띔했다.

“밥상에서 쌀을 욕보이지 말되, 감저의 몫을 늘리자.”

사람들은 밤마다 감저를 구웠고, 낮에는 감저 잎을 뒤적였다.

아이들이 먹을 것은 먼저 쪄서 나눴다(전승).


그러나 반발도 있었다.

“왜놈 작물을 조선 밥상에 올리자는 것이냐.”

몇몇 사족들은 턱을 치켜들었다.

조엄은 고개를 저었다.

“곡식은 국경을 모른다.”

그는 기록에 밭 주인의 말을 덧붙였다.

“아이를 살려야 논밭이 산다.”

쌀과 보리는 체면이고, 감저는 생명이라는 언어가 서서히 익어 갔다.


그 겨울, 경상도 어귀마다 작은 저장 구덩이가 생겼다.

짚과 흙을 켜켜이 덮은 감저 구덩이는 얼음 밑에서 답을 준비했다.

봄이 오자 줄기는 다시 살아났다.

“살아서 돌아오는 작물.”

마을의 장정은 감탄했고, 늙은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엄은 감영 뜰에 간이 논밭을 만들고 관리들에게 재배법을 반복 훈련시켰다(전승).

“굽히지 말고 눕혀 심어라. 물은 줄이고 햇빛은 늘려라.”

품앗이로 심고, 나누어 먹고, 저장하는 법까지 한 번에 가르쳤다.

그는 보고서를 올릴 때도 말끝을 눌렀다.

“과세를 서두르지 말고, 굶주림이 덜해지는지 먼저 보소서.”


몇 해가 흐르자, 감저는 섬과 해안에서 내륙으로 스며들었다.

제주와 남해, 전라도의 포구에서 시작된 줄기는 낙동강과 섬진강을 타고 안쪽으로 올라왔다

(전승: 제주 선행 전래설도 있으나 대량 보급의 전기는 조엄 시기를 드는 견해가 우세).

한 사또가 조엄에게 인사를 보냈다.

“올해 흉년에도 밥상에 빈틈이 적었습니다.”

그 편지 끝에는 짧은 문장이 적혔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밤마다 배를 두드리지 않습니다.”


『성혜도설(成形図説, 1804)』 고구마 도해
Leiden University Library, Wikimedia Commons, CC BY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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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저의 이름은 여러 군데서 자랐다.

문서에는 감저(甘藷), 백성들은 고구마라 불렀다

(어원: ‘고구마’의 방언 기원과 문자 표기는 지역·시기에 따라 달라졌으며 정확한 어원은 (논쟁)).

사쓰마이모(さつま芋)라는 일본식 호칭이 ‘왜감저’로 전해졌다는 말도 돌았다(논쟁).

그러나 밥상 위에서 이름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찜통에서 김이 오르면, 이름은 달고 따뜻해졌다.


그의 보급 방식에도 뒷말은 붙었다.

“조엄이 첫 도입자냐.”

학계는 고개를 갸웃한다.

조선 전기 중국·류큐 경로를 통한 소규모 전래설, 제주 내 생존 전통설을 거론하는 연구도 있다(논쟁).

또 “조엄이 ‘감저보급서’를 직접 저술했는가, 혹은 지시·감수만 했는가”에 대한 기록도 엇갈린다(논쟁).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평가는 겹친다.

그가 부임지에서 ‘대량·체계’ 보급의 속도를 냈다는 점이다.

알음알음 키우던 생존 작물을 ‘행정의 언어’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그의 공은 분명했다.


말년의 조엄은 한 번 더 남쪽 바람을 들여다봤다.

“쌀과 보리는 체면이고, 감저는 만일의 벗이다.”

그는 젊은 관리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밥상은 법령으로 넓어지지 않는다. 밥상은 밭에서 넓어진다.”

그 문장은 서랍 속에서 누렇게 익어 갔다.


세월이 흘렀다.

사람들은 ‘흉년’이라는 말을 덜 쓰게 되었고, 감저는 간식과 반찬 사이를 가볍게 오갔다.

그러나 가끔 기후가 기울 때마다, 조엄의 그림자는 밥상 끝에서 조용히 떠올랐다.

“오늘 저녁의 포만감이 내일의 안심이 된다면, 씨앗을 넓혀라.”

그의 당부는 늘 같은 곳을 가리켰다.

땅과 밥과 사람.


밤, 장독대 뒤의 작은 구덩이에서 서늘한 냄새가 올라왔다.

감저가 겹겹이 잠들어 있었다.

멧새가 울고, 아이들이 웃었다.

아이의 손에는 반으로 쪼개진 고구마가 들려 있었다.

김이 올라가는 그 순간, 조엄의 긴 사행과 짧은 문장들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이야기를 덮는다.

조엄이란 이름을 뛰어넘어 기억해야 할 것은 방법이다.

국경을 넘어 들어온 씨앗을 서둘러 ‘우리의 밭말’로 번역하고, 메모를 보급서로 바꾸고, 

흉년의 언어를 밥상의 언어로 되돌리는 일.

그 실용의 겸손이, 많은 저녁을 살렸다.


Jo Eom (1719–1777), a Joseon diplomat-official, encountered sweet potatoes in Satsuma while traveling via Tsushima. 

He secured slips, trialed them in Korea’s warm, sandy coastal fields, and taught planting methods, storage pits, and staged distribution so the crop could outlast drought and famine. 

Early resistance—“a Japanese plant”—faded as yields rose. 

Though scholars debate prior small introductions and who authored manuals, consensus holds Jo Eom sped systematic diffusion across the south, easing lean sea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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