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가 여름답지 않게 매서웠다.
버몬트주 라틀랜드의 목장 주인 해나(뉴잉글랜드 농가)는 외양간 문을 열다가 숨을 하얗게 뿜었다.
달력은 1816년 6월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풀잎에는 서리가 내려 있었다.
닭장 옆 작은 텃밭의 콩잎이 오그라들었고, 옥수수 싹은 어둠 속에서 검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해와 달에 대한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그 아침만큼은 하늘의 장난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알프스 북쪽의 루체른에서도 비슷한 아침이었다.
요한(스위스 소작농)은 창고 문을 열며 곡물 자루를 세어 보았다.
지난 가을 남은 밀은 많지 않았고, 봄에 심은 감자는 실한 잎을 키우지 못했다.
해는 떠도 따뜻하지 않았고, 바람은 낮에도 겨울처럼 불었다.
이웃은 학자들이 공기 속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많다고 말한다 전했다(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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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보라 화산 칼데라 전경, 섬 전체 스케일” / “Mount Tambora caldera from space NASA Earth Observatory · Public Domain. Earth Observatory | 
사건의 시작은 먼 바다 건너에 있었다.
1815년 봄, 인도네시아 숨바와 섬의 탐보라 화산(Mount Tambora·인도네시아 숨바와 섬)이 엄청난 분화를 일으켰다.
화산재와 가스가 하늘 높이 솟구쳐 햇빛을 가리는 막을 만들었고, 그 막은 바람을 따라 전 세계로 퍼졌다.
그 다음 해, 사람들은 낮하늘이 옅은 황갈색으로 흐릿해지는 날이 잦아졌다고 기록했다.
해질녘은 유난히 붉었고, 태양은 종종 둥근 얼룩처럼 보였다(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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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6년 유럽 여름 기온 편차(℃)” / “1816 summer temperature anomaly in Europe (°C)” Wikimedia Commons(제작: Giorgiogp2) ·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 
문제는 하늘의 색이 아니라 땅의 온도였다.
강수는 불규칙했고, 늦서리와 냉기가 농가의 계획을 계속 어긋나게 만들었다.
“수확”이라는 말은 갑자기 도박이 되었고, 마을 장터의 가격표는 사흘 단위로 새로 쓰였다.
버몬트에서는 6월에도 눈이 흩날렸고, 양떼는 여름털을 미처 다 벗지 못했다.
독일과 스위스에서는 빵집 앞 줄이 길어졌고, 오트와 감자의 값이 평년의 몇 배로 뛰었다(논쟁).
런던의 신문은 “여름이 없던 해(Year Without a Summer)”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브레겐츠호 근처의 숙소 창가에서는 비가 멈춘 뒤에도 축축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그 여름, 제네바 호수 건너편의 빌라 디오다티에서는 메리 셸리(Mary Shelley·영국 작가)가 친구들과 밤을 지새웠다.
여행은 비로 묶였고, 산책은 짙은 구름과 번개 때문에 늘 취소되었다.
그녀는 무서운 이야기 내기를 받아들였고, 전기가 흐르는 인조 인간의 악몽 같은 아이디어를 적어 두었다.
같은 도시에서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영국 시인)은 어두운 시를 썼다.
“태양이 빛을 잃고, 별들이 흔들렸다”는 식의 구절들이 노트에 박혔다.
그 글욕은 풍경에서 온 것이었고, 풍경은 날씨에서 왔다.
사람들은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빗속에서 젖은 종이는 잉크를 번지게 했고, 번진 문장은 같은 말로 끝나곤 했다.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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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6년 잘츠부르크 발행 기근 메달 / Salzburg famine medal, 1816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물 | 
정치의 언어는 더 건조했다.
영국에서는 빈민구제를 위한 국고 지출이 늘었고, 일부 지방 자치구는 공공 창고를 열었다.
알프스 북쪽의 소도시들은 곡물의 외부 반출을 잠정 제한했고, 밀가루와 빵의 중량을 규격화했다.
오스트리아 몇몇 지역에서는 빵 폭동이 일어났고, 상인들은 호위를 붙여야 했다(전승).
동유럽에서는 봄 가뭄과 여름 냉해가 겹치며 가축 사료가 모자랐고, 말 사육이 흔들렸다.
이듬해 독일에서 달리는 ‘달리기 기계(라우프마시네·Draisine)’가 눈길을 끌었는데, 말 사료 위기와의 연관성은 지금도 의견이 갈린다(논쟁).
아시아의 기록도 어두웠다.
벵골 평원에서는 비가 때를 놓쳐 논이 갈라졌다는 기록이 보이고, 다음 해에는 반대로 물난리의 탄식이 붙었다(전승).
서남중국 남부의 고원지대에는 냉해와 곡물 병충 피해가 함께 보고되었다(전승).
기후의 이상이 직접 어떤 병을 불렀는지에 대해선 학설이 엇갈리지만, 1817년에 대유행으로 번지는 병의 서막을 여기서 찾는 이들도 있다(논쟁).
어느 쪽이든 사람들의 이동은 늘었고, 장터의 소문은 지도보다 빨리 퍼졌다.
도시의 시계공과 농가의 여자는 서로를 모르지만 같은 물건을 세었다.
시간과 곡식.
요한은 창고에서 마지막 자루를 열어 어린 딸 앞에서 반죽을 만들었다.
해나는 통나무 지붕 밑에 옥수수 이삭을 매달아 서리 피해에서 한 줌이라도 더 살리고자 했다.
그녀의 남편은 오하이오로, 혹은 캐나다 서남부로 떠날 생각을 했고, 동네 친구는 “여긴 더는 살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다(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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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6–1817년 곡물 가격 변동을 담은 인쇄물과 “엄마, 빵을 주세요” 도상 / Bread-price ring broadside, 1816–1817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DHM) | 
여름이 하반기로 기울자 사람들은 허리를 더 졸랐다.
수확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자 가축을 먼저 줄였고, 다음 해 파종용 종자를 따로 숨겼다.
곡창이 얇아진 집에서는 저녁을 하루 건너뛰는 날이 생겼다.
곡물 거래상은 먼 항구로 눈을 돌렸고, 강과 운하에는 곡물을 실은 평저선이 더 자주 보였다.
그러나 배가 들어올 때마다 바람과 물길의 사정이 달라, 수요와 공급은 회의장에서 계산한 것과 늘 어긋났다.
가을은 평소보다 빨리 추웠다.
포도 수확이 줄었고, 히터 대신 장작과 석탄이 먼저 팔렸다.
교회와 시청은 구제 목록을 만들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수프가 돌아갔지만, 성인 남자에게 돌아갈 빵은 모자랐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견뎠다.
어떤 이는 얇은 빵에 물을 더 많이 섞었고, 어떤 이는 훈제 고기를 아주 얇게 저며 며칠을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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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 셸리 흉상 초상” / “Portrait of Mary Shelley” Wikimedia Commons(국립초상화미술관)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물 | 
한 해가 넘어가는 마지막 날, 메리 셸리는 손바닥만 한 노트에 한 문장을 더 보탰다.
눈앞의 세상은 밝지 않았지만, 상상 속의 번개와 실험실은 무섭게 생생했다.
그녀는 인간의 창조 욕망과 책임을 묻는 이야기를 꺼내 들 준비를 했다.
이윽고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1818)』이 세상에 나왔다.
바이런은 ‘어둠(Darkness)’을 남겼고, 존 폴리도리는 ‘뱀파이어(The Vampyre)’의 씨앗을 얻었다.
나쁜 여름은 기이하게도 새로운 장르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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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7년 라벤스부르크에서 첫 수확 마차 행렬 / First harvest-wagon parade in Ravensburg, 1817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물 | 
하늘은 영원히 어둡지는 않았다.
대기 중의 미세한 얼룩은 해마다 이탈했고, 계절은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이에 몇 가지를 바꾸었다.
곡물 비축 창고를 크게 하고, 지방 간 교역로의 관문을 손봤다.
“날씨”라는 말을 주술에서 숫자로 옮기는 움직임도 빨라졌다.
기상 관측소의 기록이 촘촘해졌고, 각 도시의 학회는 온도와 강우를 지도 위에 점으로 찍기 시작했다.
| “1817년 스위스의 식량난 장면” / “Hunger year 1817 scene in Switzerland”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물 | 
그렇다고 교훈이 한 줄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어느 아이는 추위를 견디다 봄을 맞았고, 어느 아이는 겨울 전에 떠났다.
어느 마을은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고, 어느 마을은 남은 이들이 서로의 빵을 나눴다.
한스와 해나는 다음 해에 다시 씨를 뿌렸다.
그 씨앗 중 일부는 서리에도 버텼고, 일부는 또 실패했다.
누군가는 일기를 닫으며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하늘에 기대고 땅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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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6년 기근을 기록한 석문” / “Stone inscription commemorating the 1816 hunger year”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위키미디어 공용물 | 
1816년의 여름은 그래서 “사건”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한 대륙의 비와 서리, 다른 대륙의 가뭄과 장마, 그리고 전 세계를 덮은 얇은 장막이 한 해의 계획을 바꾸었다.
사람들은 시간을 팔아 빵을 샀고, 생각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었다.
짐마차의 바퀴가 새로운 길을 더듬었고, 관청의 장부에는 새로운 규정이 적혔다.
그 뒤로도 화산은 분화했고, 기후는 변덕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이 없던 해”라는 별명만큼 간결하게 삶의 취약함을 가르친 여름은 드물다.
그 별명은 과학의 설명을 만나 더 단단해졌고, 이야기를 만나 더 오래 남았다.
오늘의 독자에게 남는 질문은 단순하다.
하늘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바꿔야 하는가.
곡식의 흐름과 이야기의 흐름을 동시에 돌볼 수 있는가.
1816년은 말한다.
하늘을 읽는 기술과 서로를 돌보는 제도, 그리고 실패해도 다시 뿌리는 손.
그 셋이 모였을 때만, 다음 여름이 찾아온다고.
이 글은 1815년 탐보라 화산 분화 이후의 기상·사회 변화를 다룬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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