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과 대사,
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적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합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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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덕국가표준영정 전신상(축소) 제주시 공식홈페이지 |
겨울 바람이 동복리(제주 구좌읍) 바다를 때렸다.
어린 소녀가 파도 끝을 세었다.
집은 조용했다.
아버지 김응렬(제주와 나주를 오가던 상인)은 풍랑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했다.
이듬해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소녀는 외삼촌 집으로 옮겨 갔다.
살 길은 많지 않았다.
월중선(퇴기, 기생 출신 지도자)의 손에 맡겨져 기적(妓籍)에 올랐다.
소녀는 장단을 익히고 말을 아꼈다.
스스로 양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관아에 청했다.
답은 거절이었다.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 그는 다시 관아 문을 두드렸다.
제주목사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에게 자신의 사정을 또박또박 말했다.
부모를 잃어 가난에 밀렸고, 이제는 장부를 볼 줄 아니 상업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길을 얻었다.
기생의 자리에서 상인의 자리로, 천천히 옮겨 앉았다.
| 제주목관아 하마비(Jejumok-Gwana dismounting stele), 조선 관아 유적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저자 PD-self). 위키미디어 공용 |
장부는 정직했다.
제주의 말총과 미역, 전복과 귤, 우황과 진주를 묶어 육지로 보냈다.
육지의 쌀과 포목을 다시 섬으로 데려왔다.
가격은 계절마다 달라졌고, 항로는 날씨에 달렸다.
그는 배를 만들었고, 창고를 채웠다.
이윤은 위험과 함께 왔다.
1790년대 초, 섬은 가벼워졌다.
비가 모자랐고, 바람은 세졌다.
밭이 누웠다.
1794년과 1795년, 흉년은 이름을 바꿔 재난이 되었다.
조정의 구휼미가 바다를 건넜으나 배 몇 척이 사라졌다(논쟁).
굶주림은 장터와 골목까지 내려왔다.
그녀는 계산했다.
창고에 있는 것과 장부에 적힌 것, 바다 건너 살 수 있는 양과 운임을 합쳤다.
“배를 더 빌리자.”
그는 재산을 내어 배를 마련했다.
육지에서 곡식을 사서 친척과 은인에게 먼저 보냈다.
나머지는 모두 관아로 보냈다.
굶어 쓰러지는 사람부터 건져 올려야 했다.
창고는 비었고 마을은 조금씩 움직였다.
그녀는 장부의 마지막 줄에 선을 그었다.
“남은 전부, 구휼.”
(구휼(救恤) : 가난하거나 재난을 당해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돈·물자·임시 일자리 등을 제공해 당장의 생존을 돕는 일을 말함)
그 말은 자신의 생업을 잠시 접는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 줄에 섞여 있던 아이가 말했다.
“살았다.”
짧은 한마디가 섬을 붙잡았다.
| 관덕정 전경, 제주시(Gwandeokjeong Pavilion, Jeju City) ‘구휼(죽 나눔)’의 현장으로 전해지는 핵심 배경지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위키미디어 공용 |
그 소식은 바다를 건넜다.
정조(조선 22대 임금)는 보고를 받았다.
상을 내리려 했다.
면천(賤籍을 벗기는 은전)을 제안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대신 소원을 말했다.
“한양을 보고 싶습니다. 금강산을 보고 싶습니다.”
그 시대에 제주 여인이 바다를 건너는 일은 드물었다.
정조는 길을 만들었다.
내의원 차비대령 행수의녀(내의원 임시 직책, (어원) 醫女)를 하사해 궁문을 통과할 근거를 주었다.
그녀는 한양으로 들어갔다.
우의정 윤시동의 집에 머물렀다.
혜경궁 홍씨 등 왕실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정조는 초계문신 친시에 ‘만덕전’이라는 논제로 글을 쓰게 했다.
한양의 봄이 지나자 그는 금강산으로 올라갔다.
석벽과 계곡, 물소리를 눈에 담고 섬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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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 ‘금강전도’ — Kim Man-deok’s royal reward trip to Geumgangsan (painting)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섬의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말이 생겼다.
의인(義人).
또 어떤 기록에는 의녀(義女)라 했다(어원).
의녀(醫女)라는 임시 직책을 받은 일과 겹쳐 말맛이 더해졌다.
칭호가 무엇이든, 섬은 그를 오래 기억했다.
그녀의 장사는 다시 시작됐다.
예전만큼 벌지 못해도 괜찮았다.
사람들이 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는 이윤을 줄였고, 생기를 늘렸다.
장부의 끝에는 여전히 짧은 줄이 있었다.
“고통이 큰 집 우선.”
세월이 흘렀다.
1812년,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 달 뒤 묘비문이 세워졌다.
수십 년이 지나 추사 김정희가 유배 중 그의 양자에게 편액을 써 주었다.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세상에 번진다는 뜻이었다.
네 글자가 오래 남았다.
이후의 시간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제주는 그의 기일 무렵 만덕제를 올렸다.
제관은 덕망 있는 여성들이 맡았다.
만덕상은 해마다 봉사와 나눔의 여성을 찾아 상을 올렸다.
도시의 박물관에는 그의 이름을 딴 전시실이 생겼다.
아이들이 질문했다.
“왜 쌀이 중요했나요.”
설명은 간단했다.
한 그릇이 겨울을 건너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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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에 방영된 KBS2의 드라마 "거상 김만덕" |
사람들은 그를 이야기로 다시 만들었다.
방송국은 사극을 찍었다.
무대에는 뮤지컬 포스터가 붙었다(전승).
이야기는 포장지를 바꿔도 내용은 같았다.
장부를 덮고 창고를 비운 사람.
소원을 돈이 아니라 길로 바꾼 사람.
잠깐, 숫자 이야기를 하자.
그가 얼마나 많은 곡식을 냈는지에 대해선 자료가 갈린다(논쟁).
관아 보고에는 수십 섬이 보이고, 구전에는 수백 섬이 오른다(전승).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순서였다.
자기 것을 먼저 내놓고, 칭찬은 나중에 받았다.
그는 누구의 부탁도 없이 나섰다.
섬 안의 경제가 멈추면 생명이 멈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곡물의 유통을 끊지 않았다.
배를 불러오고, 운임을 치르고, 분배를 맡겼다.
상업의 기술이 구호의 기술이 되는 순간이었다.
한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바다를 오래 바라보았다.
섬과 육지, 창고와 들판, 장부와 밥그릇.
그 모든 것을 잇는 선이 눈앞에 있었다.
그 선을 따라 배가 움직였다.
그의 생애도 그 선을 따라 움직였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
봄비가 내리고, 곡식 창고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조용히 줄을 선다.
첫 사람에게 그릇이 간다.
그가 말했다.
“살아야 합니다.”
그 말이 구휼의 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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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만덕기념관 상설전 — 생애 연표·객주 재현(Display inside Manduk Museum) 기념관·전시사진(제주일보 좌동철기자) |
1739 제주 출생. 부모 상실 후 기적에 오름 → 관아 청원으로 상업 전환.
1790–1795 흉년·태풍 반복, 섬 전역 식량난 심화.
1795 재산 동원, 배 마련, 육지 곡물 매입·구휼 집행.
1796 공로 보고, 정조가 한양 입경 및 금강산 유람 허락.
내의원 임시 직책으로 궁문 통과. 초계문신 친시 논제로 ‘만덕전’ 출제.
1812 사망. 훗날 추사 김정희가 ‘은광연세’ 편액. 현대의 만덕제·만덕상으로 기념.
#참고#
제주 여성의 높은 경제 참여(해녀·시장 네트워크)가 그의 상업 기반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논쟁).
그가 운영한 객주가 말총·해산물·우황·진주·포목까지 묶어 거래한 복합 상점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795년 조정이 내려보낸 구휼미의 일부가 난파로 도착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공백을 그의 사재가 메웠다.
정조가 면천을 상으로 제안했으나 그가 거절하고 “길”을 청했다는 대목은 여러 문헌에 반복된다.
한양 체류 때 우의정 윤시동의 집에서 머물렀고, 혜경궁 홍씨를 알현했다는 세부가 전한다.
정조는 초계문신 친시에 ‘만덕전’을 논제로 냈다. 그의 이름이 시험 문제에 올랐다.
‘의녀’ 표기는 두 겹이다.
제주에선 의인(義人)의 여인이라는 뜻으로도 불렸고,
한양 입경 때는 내의원 의녀(醫女) 직책을 부여받았다(어원).
사후, 김정희가 ‘은광연세’ 편액을 써 주었다. 제주 묘비와 편액 일화가 함께 전해진다.
제주는 그의 기일 무렵 만덕제를 봉행하고, 덕망 있는 여성들을 제관으로 세운다.
만덕상은 봉사·나눔의 여성에게 수여된다.
현대 대중문화에서 드라마·뮤지컬화가 이루어져 그의 서사가 재조명되었다(전승).
이야기의 핵심은 간단하다.
첫째, 상업은 생계의 기술이면서 위기의 기술이다.
둘째, 구휼은 숫자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다.
자기 것을 먼저 비우고, 남을 먼저 채웠다.
그래서 섬이 살았다.
On famine-struck Jeju (1794–95), merchant Kim Man-deok—once an orphan who petitioned out of the gisaeng register—liquidated her assets, chartered boats, and bought mainland grain, sending it first to kin, then to the magistracy for public relief.
King Jeongjo offered emancipation; she declined, asking only to visit Hanyang and Mount Geumgang, which he granted via a temporary court title. She returned to trade, prioritizing the poor; later memorialized, she endures as commerce turned to compa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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