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8세기 영국의 신문·서간·초상화 기록과 도시 문서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식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 어원 설명은 (어원)으로 표기합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 표기합니다.
1774년 가을 저녁,
웨스트민스터 찰스가(Charles Street) 19번지의 상점 앞에는 비가 멈춘 뒤의 습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이그나티우스 산초(Ignatius Sancho, 흑인 작가·상인·작곡가)는 손님을 마지막으로 내보낸 뒤 목재 덧문을 닫아 걸며 문과 창에 빗장을 하나하나 채웠다.
그는 방금 총선 투표를 마치고 돌아왔고,
투표소에서 서기가 “찰스가 19번지, 본인 소유”라고 큰 소리로 확인하며
공개 명부(Poll Book)에 그의 이름을 적어 넣던 순간의 공기를 아직 몸에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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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그나티우스 산초 초상(1768) / Ignatius Sancho portrait (1768)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문밖에서는 “흑인이 표를?” 하는 속삭임이 흩어졌지만, 절차는 흔들리지 않았고,
이름·주소·서명이 끝나자 그는 법이 인정한 유권자가 되었으며,
그 사실이 그에게는 가게를 지키는 빗장보다 더 단단한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그는 모자를 벗어 벽걸이에 걸고, 등잔을 조금 낮춘 다음,
카운터 너머 안쪽 방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발소리를 향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안쪽에서는 아내 앤 오스번(Anne Osborne)이 아이들의 젖은 외투를 차례로 벗기고 있었고,
큰딸 프랜시스 조애너 산초(Frances Joanna Sancho)와 둘째 앤 앨리스 산초(Ann Alice Sancho)는 오늘 가게에 다녀간 손님 이름들을 서로 맞혀 보며 장난을 쳤으며,
셋째 엘리자베스 브루스 산초(Elizabeth Bruce Sancho)와 넷째 조너선 윌리엄 산초(Jonathan William Sancho)는 이제 막 글씨를 익혀 아버지가 적어 둔 가격표의 숫자를 소리 내어 읽어 보려 애썼다.
다섯째 리디아 산초(Lydia Sancho)와 여섯째 캐서린 마거릿 산초(Catherine Margaret Sancho), 막내 윌리엄 리치 오스본 산초(William Leach Osborne Sancho)까지, 아이들의 이름에는 친지와 후원자의 흔적이 미들 네임으로 남아 있었고, 몇 아이는 유아기에 세상을 떠났지만 가족의 빈자리는 오히려 남은 이들의 손을 더 굳게 잡게 만들었다.
산초의 낮은.. 차·설탕·담배·향신료를 사고파는 단순한 회계였으나,
밤은 편지와 악보, 그리고 친구들이 드나드는 소박한 살롱이었고,
그의 책상 위에는 깃펜과 잉크병, 모래통(샌드)과 접지 칼이 늘 정돈되어 있었으며,
글줄을 가지런히 잡아 주는 얇은 격자 종이는 그의 생각을 차분하게 길 위에 놓이게 만드는 믿음직한 레일처럼 작동했다.
그의 문장은 의도적으로 짧았지만 단절되지는 않았고,
주장 다음에 사례, 사례 다음에 날짜, 그리고 마지막에 요지를 남기는 방식으로 독자가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의 시작은 런던이 아니었다는 말이 전해지는데(전승), 바다 위, 즉 대서양의 중간항해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어머니가 카리브에 닿은 뒤 곧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는 노예 신분을 거부하며 극단의 선택을 했다는 전언도 함께 따라붙는다(전승).
두 살 남짓의 아이는 영국으로 보내져 그리니치의 미혼 자매 셋의 집에서 18년을 하인으로 지냈고,
자매들은 소년에게 ‘산초’라는 성을 붙였는데(어원: 소설 『돈키호테』의 산초 판자에서 온 기지의 이미지), 그 집에서는 책을 멀리해야 했기에 그는 기억으로 시를 외우고,
밤마다 부엌에서 낮게 흥얼거리며 단어를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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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히스의 몬태규 하우스 / Duke of Montagu’s house, Blackheath British Museum, Public Domain. 대영 박물관 |
그런 소년의 문을 열어 준 이가 몬태규 가문이었고,
존 몬태규(John Montagu, 제2대 몬태규 공작)는 소년의 기억력과 말재주를 알아보고 책과 악보를 건네며 블랙히스의 몬태규 하우스로 데려가 집사 일을 맡겼으며,
공작 부인은 훗날 유언으로 연금 30파운드를 남겨 그에게 펜과 종이, 악보와 극장 표를 살 수 있는 숨구멍을 열어 주었다.
그 돈은 단지 물건을 사는 자금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의 이름으로 기록할 수 있게 해 주는 최소한의 독립이었고,
산초는 그 독립을 잃지 않기 위해 장부를 더 정확히 맞추고, 편지를 더 치밀하게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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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루리 레인 극장 내부 / Interior of Theatre Royal, Drury Lane Wikipedia/Wikimedia, Public Domain. 위키백과 |
무대는 오랫동안 그의 꿈이었기에 드루리 레인(Drury Lane) 극장의 객석에서 산초는 데이비드 개릭의 대사를 받아 적고,
장면 전환의 타이밍과 배우의 동선을 눈으로 외웠으나, 배우로 설 무대는 발음의 문제로 멀어졌다는 말이 남아 있고(전승),
그래서 그는 무대 대신 편지와 음악을 택해 설득과 리듬을 자신의 도구로 바꾸었다.
그는 말보다 글이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믿었고,
노래가 때로 글보다 빠르게 마음을 흔든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았다.
1766년 여름, 산초는 요크셔의 성직자이자 소설가 로런스 스턴(Laurence Sterne)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노예무역의 현실을 당신의 문장으로 증언해 달라는 요청이었고,
왕복 서신은 곧 공개되어 널리 읽히면서 그의 이름은 공론장으로 올라섰으며,
산초는 감정에 기대지 않고 사실과 사례를 차례로 배치한 뒤 마지막 문장에 요지를 남기는 습관을 더 단단히 굳혔다.
그의 편지는 상대가 그 자리에서 이해하고, 다음 날에도 기억하며,
필요하면 셋째 날에는 다른 이에게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있도록 쓰여 있었다.
1768년 바스의 작업실에서 화가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가 붓을 들었고,
산초는 붉은 조끼를 입고 정면을 응시했으며, 배경에는 불필요한 장식이 없었고,
손에는 펜도 악기도 들려 있지 않았지만 보는 사람은 “문장의 사람”을 읽을 수 있었고,
이 초상은 훗날 한 권의 책 표지로 다시 태어나 그의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림 속 시선은 당당했지만 공격적이지 않았고, 조끼의 무늬는 화려했지만 과장되지 않았으며,
그 균형이야말로 산초가 글에서 추구한 태도의 시각적 번역처럼 보였다.
1774년, 그는 마침내 자신의 상호를 내건 가게를 열었고,
간판에는 차와 설탕, 담배, 향신료가 적혔으며,
저녁이면 가게는 자연스레 작은 살롱이 되어 배우·성직자·상인·젊은 작가들이 모였고,
산초는 춤곡과 미뉴에트, 컨트리댄스를 쓰면서 때때로 표지에 “아프리카인이 지음(Composed by an African)”이라고 적어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고,
그 정체가 곧 주장 자체가 되도록 배치했다.
정체의 표시는 대립을 부르기보다 책임을 호출했고,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쓰고,
서명으로 책임지는 방식을 스스로에게 약속처럼 새겼다.
그런 그가 진열대의 설탕 덩어리를 심심치 않게 오래 바라보았던 것은,
그 설탕과 차, 담배가 서인도 제도의 농장에서 어떤 노동과 항로, 보험과 환적, 세금과 이익을 거쳐 이 상점의 유리병 속으로 들어오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는 편지에 그 연결 고리를 구체적으로 적었으며, 어떤 농장에서, 어떤 상단이, 어떤 날짜와 가격으로, 어떤 사람들의 땀을 거쳐 이 상품이 만들어지는지를 이름과 숫자와 함께 기록했다.
그가 즐겨 쓴 문장 “설탕은 달다”는 은유가 아니라, 뒤에 붙을 표와 장부, 그리고 인명의 목록으로 곧장 이어지는 사실의 첫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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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 선거 풍경—투표·개표 / Westminster election scene (1780) Wikimedia Commons(미국 LOC 스캔),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선거의 계절이 오자 웨스트민스터의 거리에는 색띠가 넘실거렸고,
후보들은 연설을 이어 갔으며, 선거원들은 사람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지지 의사를 확인했고,
투표는 비밀이 아니었으므로 누가 누구에게 표를 던졌는지 기록에 남았고,
산초는 이름을 말하고 주소를 확인한 뒤 서명했고, 그 표는 명부에 새겨졌으며,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천천히 가게로 걸어 돌아왔다.
오늘의 표가 내일의 생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표를 던지는 일과 장부를 맞추는 일이 결국 같은 종류의 책임이라고 믿었다.
시간은 그를 시험했는데, 1780년 6월 고든 폭동이 시작되자 청색 리본을 두른 군중이 거리를 메우고 감옥과 관공서에 불이 붙었으며, 찰스가에도 횃불이 스쳤고,
산초는 문과 창의 빗장을 다시 확인하며 아내와 아이들을 안쪽 방으로 들여보냈고,
그 밤에 그는 연속으로 편지를 써 거리의 인원, 부서진 창문, 도망치는 관리, 늦게 도착한 병력,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공포와 흥분을 기록했고,
폭력을 비판하면서 시민 보호와 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단호하지만 모욕 없는 어조를 유지했다.
그의 문장 “먼저 이웃을 지키자”는 선언이 아니라 지시였고, 읽는 이가 바로 행동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순서를 제시하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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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0 고든 폭동—뉴게이트 방화 / Gordon Riots—Burning of Newgate (1780)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위키미디어 공용 |
폭동은 결국 진압되었고, 연기와 그을음이 남은 거리를 걸어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잠든 방을 한 번 들여다보고, 게인즈버러의 초상 앞에서 잠깐 멈춰 선 뒤, 책상으로 돌아와 모래통을 들어 오늘 쓴 편지의 잉크를 말렸으며, 다음날의 가격표를 다시 계산해 적었다.
통풍이 심한 날이면 딸들이 병따개와 받침을 가져와 책상 높이를 맞춰 주었고, 막내 윌리엄은 아버지 편지를 가장 먼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작은 의식처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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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아프리카인의 편지』(1782) 제목면 / Title page, Letters of the Late Ignatius Sancho (1782) Internet Archive, Public Domain. 인터넷 아카이브 |
그해 겨울 산초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고,
장례는 세인트 마가릿(St Margaret’s, 웨스트민스터) 교회 관할 묘지에서 치러졌으며,
세월이 흘러 묘지는 사라졌지만 이름은 남아 같은 교회 안에 기념석이 놓였고, 두 해 뒤인 1782년 『한 아프리카인의 편지(Letters of the Late Ignatius Sancho, an African)』가 간행되어 구독 신청으로 모인 비용이 인쇄를 가능케 했고 수익은 유가족에게 돌아갔으며,
표지는 게인즈버러의 초상이었고 머리말은 그를 “문장의 사람”으로 소개했다.
막내 윌리엄은 찰스가의 가게를 이어 인쇄·서점으로 바꾸어 생계를 잇고, 집안은 글과 책을 중심으로 다시 기울기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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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초 판화—『한 아프리카인의 편지』 서문 삽화 / Bartolozzi engraving, frontispiece to Letters (1781–1802) British Museum, Public Domain. 대영 박물관 |
세월이 더 흐르자 찰스가 19번지 외벽에는 기념 패가 붙었고,
도시 투어 지도에는 작은 점이 찍혔으며, 무대에서는 그의 생애가 낭독으로 재현되고,
콘서트홀에서는 그가 남긴 춤곡이 현대의 목소리로 다시 불렸고,
사람들은 그의 편지를 따라 18세기 런던의 공기와 가격과 법, 그리고 위험과 기회를 함께 읽었다.
그의 이야기는 “영국에서 투표한 흑인의 최초/최초급 사례”라는 한 줄로 끝나지 않으며(논쟁),
하인의 방에서 시작해 몬태규 하우스를 거쳐 자신의 상호를 단 가게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름으로 쓰고 서명으로 책임지는 법을 배웠고,
노예제가 만든 상품을 팔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상인이라는 현실과 그 현실을 글로 비판하는 시민이라는 역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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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 세인트 마가릿 교회 산초 부부 기념석 / Memorial stone to Ignatius & Ann Sancho, St Margaret’s Wikimedia Commons, CC BY 4.0. 위키미디어 공용 |
이제 다시 1774년의 그 밤으로 돌아가 보면, 덧문은 닫혀 있고 등잔은 낮게 타며 아이들의 숨소리가 안쪽 방에서 일정한 박자로 이어지고,
그는 의자를 끌어 책상 앞에 앉아 “설탕은 달다”로 시작하는 문장을 적고,
곧바로 “그러나 그 생산 과정의 고통을 함께 기록해야 한다”라고 이어 쓰며,
오늘 도착한 배의 이름과 다음 주 가격, 그리고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의 노동과 손실을 차례로 붙인다.
그의 문장은 길지도 짧지도 않게, 읽는 사람이 곧장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하지만,
다음 장면으로 독자를 이끌 만큼 충분히 호흡이 길게, 그렇게 이어진다.
그가 남긴 것은 ‘최초’라는 표식이 아니라, 사실을 모으고, 문장을 정리하고, 서명으로 책임지는 방법이며, 그 방법은 그를 하인에서 시민으로, 관객에서 작가로, 고객에서 유권자로 옮겨 놓았고, 오늘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작업 지침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이야기를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방법은 다시 한 번 증명되고 있다.
(전승) 그의 출생 장소와 유년 서사의 일부는 전승으로 전해지며, 게인즈버러 초상 제작 시간 “1시간 40분” 역시 후대 전언에 근거합니다.
(논쟁) ‘영국에서 투표한 최초의 흑인’이라는 호칭은 통용되지만, 동시대 다른 흑인 유권자 기록과 함께 보다 신중하게 “기록상 최초 혹은 두 번째”로 기술하기도 합니다.
Autumn 1774, Westminster: grocer-musician Ignatius Sancho returns from casting a public vote—name, address, signature—then bolts his wooden shutters, writes by lamplight, and tends a shop that turns into a salon at night.
Born at sea (by report) and mentored by the Montagus, he dealt in sugar yet exposed its chains in plain letters.
During the 1780 Gordon Riots he shielded his family and urged order in dispatches.
Gainsborough painted him; after his 1780 death, Letters (1782) carried on his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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