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설화 해석: 왕거인·거타지 이야기로 본 신라 말 사회 구조와 계층 대응 분석 (Wang Geoin and Geotaji)



 신라 말 사회 혼란의 서사적 대응: ‘왕거인’과 ‘거타지’ 이야기의 계층적 연대 구조 비교 분석


1. 진성여왕 시기의 시대적 모순과 설화적 표상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시기(887~897)는 천년 왕국의 근간이 와해되던 대전환기이자 모순의 임계점이었습니다.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각간 위홍(魏弘) 등 총신들에 의한 권력 독점과 정사 혼란은 국가 재정의 파탄과 주·군 단위의 납세 거부로 이어졌으며, 이는 곧 ‘도적의 발흥’이라는 민생의 파탄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징후는 당대 민중의 의식 속에서 단순한 원망을 넘어 ‘주술적 저항’의 형태로 표출되었습니다. 

특히 『삼국유사』 권2 ‘진성여대왕 거타지’ 조에 수록된 ‘다라니 은어’(“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는 정권의 무능을 비판하는 고도의 서사적 장치입니다. 

서술자 일연은 왜 성격이 판이한 ‘왕거인 이야기’와 ‘거타지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 단위로 병치하였는가? 

본 글은 이를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지배 계층의 ‘개별적·수직적 대응’이 지닌 한계와 하층민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호혜적 연대’가 지니는 서사적 승리 구조를 규명하고자 합니다.


2. 왕거인 이야기: 상층 지식인의 개별적 대응과 미완의 해결

[왕거인 줄거리]

진성여왕의 총애를 믿고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이 조정을 장악하자, 거리에는 정권을 비판하는 익명의 벽보(다라니 은어)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조정은 애꿎은 문사 왕거인(王巨仁)을 주동자로 몰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왕거인이 감옥 벽에 자신의 결백과 하늘의 무심함을 한탄하는 시를 적자, 홀연히 하늘에서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쳐 감옥 문을 부수었습니다. 

왕거인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나, 나라를 뒤흔든 부패의 불길은 꺼질 줄 몰랐습니다.


이처럼 천둥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으로 결백을 증명한 왕거인 이야기는 신라 내부의 시스템 리스크가 발생했을 때, 상층 지식인 계층이 취한 대응 방식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 주술적 저항과 억압의 악순환: 민중은 ‘다라니 은어’를 길에 던져 사회적 모순을 폭로했으나, 왕실은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보다 비판의 주동자로 지식인 ‘왕거인’을 지목하고 투옥하는 억압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기득권 세력이 지닌 자정 능력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 천신(天神) 호소와 개인적 구원의 한계: 억울하게 갇힌 왕거인은 옥벽에 시를 써서 ‘하늘’에 호소합니다. 하늘이 벼락을 쳐서 그를 구원한 것은 도덕적 정당성의 확인일 뿐, 사회 전체의 모순 해결과는 무관한 ‘개별적 안위’에 국한된 사건입니다.
  • 비평적 분석(미해결 구조): 왕거인이 옥에서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서사 내부에서 도적의 발흥이나 권력 부패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집니다. 이는 지식인의 개별적 노력이 폐쇄적 신분 체제 내에서의 ‘수직적 호소’에 머물 때, 사회적 모순을 타개하는 데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보여주는 서술자의 경계(警戒)라 할 수 있습니다.


3. 거타지 이야기: 하층 영웅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공통의 승리

[거타지 줄거리]

왕자 양패(良貝)를 태우고 당나라로 향하던 사신단이 서해 바다 한가운데서 거친 풍랑을 만났습니다. 

하늘의 뜻을 묻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자, 하급 궁사였던 거타지(居陀知)가 홀로 섬에 남겨지게 됩니다. 

절망적인 고립의 순간, 바다 노인이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청탁을 건넵니다. 

매일 아침 사미승(늙은 여우)이 나타나 자신의 가족을 잡아먹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거타지는 망설임 없이 활을 당겨 가짜 승려의 심장을 꿰뚫었고, 이에 감복한 바다 노인은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의 품에 안겨준 뒤 두 마리의 용을 보내 사신단의 배를 당나라까지 무사히 인도했습니다.


단순한 괴물 퇴치담을 넘어선 이 서사는, 신라 외부(서해)를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하여, 하층 실무진의 역량이 어떻게 국가적·초월적 위기를 동시에 타개하는지 ‘해결의 전범(典範)’을 제시합니다.

  • 하층 궁사의 실무적 영웅성: 거타지는 왕실 사신단을 수행하는 50명의 군사 중 한 명인 ‘하층 궁사’입니다. 그는 풍랑이라는 국가적 위기 앞에서 “이름을 쓴 목간(木簡) 50개를 물에 던지는 제비뽑기”라는 운명적 시험을 거쳐 섬에 남겨집니다. 이는 요행이 아닌, 실력을 갖춘 하층민이 공동체의 위기를 짊어지는 희생적 영웅주의를 상징합니다.
  • 상호 호혜적 연대 메커니즘: 거타지는 토착 신격인 ‘서해 용왕’을 위협하는 ‘사미승(늙은 여우)’을 처단합니다. 여기서 사미승은 변질된 종교 권력 혹은 위협적인 타자를 상징하며, 이를 제거하는 과정은 ‘하층 영웅(거타지) + 토착 세력(용왕)’의 결합을 의미합니다. 이는 기득권의 도움 없이도 실무적 능력(활쏘기)을 통해 초월적 존재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수평적·호혜적 연대’입니다.
  • 다층적 성공의 서사적 성과: 거타지의 활약은 개인의 신분 상승(용녀와의 혼인)을 넘어, 양패 일행의 안전한 항해와 당나라 황제의 환대라는 국가적 안녕으로 확장됩니다. 이는 하층에서 시작된 동력이 상층(사신단)과 국가(신라) 전체를 구원하는 완전한 해결 구조를 완성함을 보여줍니다.


거타지 설화 이미지


4. 대조 분석: 개별적 생존 vs. 계층 간 화합

두 이야기의 대립 구도는 사회적 대안 제시를 위한 고도의 서사 설계입니다.

분석 항목
왕거인 이야기 (경계)
거타지 이야기 (권고)
배경 및 공간
신라 내부 (정치적 폐쇄성)
신라 외부 (서해·당나라, 개방성)
주인공 계층
상층 지식인 (문인)
하층 실무진 (군사·궁사)
위기 대응 방식
수직적 호소 (개별적 생존 전략)
수평적 연대 (계층 간 호혜적 결합)
문제 해결 범위
개인적 안위 (개별적 구원)
사회 전체 및 국가적 위기 해결
사료적 특징
다라니를 통한 소극적 저항
목간 50개를 통한 능동적 개척


왕거인의 실패는 시스템 리스크가 개인의 역량을 압도하는 신라 하대의 ‘폐쇄적 구조’ 때문입니다. 

반면 거타지의 성공은 신분 경계를 넘나드는 연대가 시스템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음을 입증합니다. 

서술자는 이를 통해 기득권의 시혜적 조치가 아닌, 각 주체가 실질적 능력을 발휘하고 이익을 공유하는 구조만이 공동체를 구할 수 있음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5. 서술자 일연의 의도와 설화의 역사적 승계

일연이 몽골 침략기라는 혼란기 속에서 진성여왕 시기의 설화를 재조합한 의도는 고려 사회에 던지는 강력한 통찰입니다.

  • 서술자의 전략적 의도: 일연은 ‘경계’(왕거인)와 ‘권고’(거타지)라는 이중 장치를 통해, 지배층의 독선이나 지식인의 소극적 태도로는 멸망을 막을 수 없으며 계층 간 화합만이 공동체의 유일한 생존 전략임을 역설하였습니다.
  • 역사적 정당성 확보와 전승: 거타지 설화는 후대 왕조 건국 신화의 핵심 모델로 변용되었습니다.
    • 고려 작제건 설화: 거타지의 ‘용녀 결합’ 모티프를 복제하여 해상 세력 출신인 왕건 가문의 신분적 결함을 보완하고 신성성을 확보하는 정당성 도구로 활용하였습니다.
    • 조선 도조 이야기: 『용비어천가』 등에 반영된 이 구조는, 하층민 중심의 문제 해결 방식을 통해 새로운 왕조의 체제 전복을 ‘천명(天命)’이자 ‘민심의 결합’으로 미화하는 서사적 장치로 승계되었습니다.


6. 계층 연대가 지니는 보편적 가치와 현대적 함의

본 글은 신라 말의 위기 대응 서사 분석을 통해,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이 소수 지배층의 독점이 아닌 계층 간 ‘자발적 연대’에 달려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현대적 시사점]

  1. 실무적 영웅주의의 복원: 기득권의 시혜나 개별적 호소가 아닌, 각 분야의 실무적 주체들이 능력을 발휘하고 그 기여를 인정받는 ‘거타지 모델’의 활성화가 필요함.
  2. 호혜적 연대 구조의 설계: 현대 사회의 갈등(노사, 세대 등) 해소를 위해 특정 계층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이 아닌, 각 주체가 실질적 이익을 공유하는 상생의 서사 구조를 구축해야 함.
  3. 공동체 위기 극복의 원리: 개별적 생존(왕거인)은 일시적 도피에 불과하나,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연대(거타지)는 시스템 전체를 치유하는 보편적 가치임을 재인식해야 함.


결론적으로, 고전 설화 속에 투영된 계층 간 화합의 서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대전환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사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사회 통합의 근본 원리임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 글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왕거인’과 ‘거타지’ 설화를 바탕으로, 신라 말 사회의 혼란과 대응 양상을 해석한 글입니다.

일부 서술은 설화의 특성과 독자의 이해를 고려하여 서사적으로 재구성되었으며, 해석적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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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다양한 해석과 관점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도 환영합니다.


This article analyzes two narratives from the Samguk Yusa, “Wang Geoin” and “Geotaji,” set in the chaotic late Silla period under Queen Jinseong.

The Wang Geoin story presents an upper-class intellectual falsely accused during political unrest, whose survival through divine intervention reflects the limits of individual resistance within a collapsing system. 

In contrast, the Geotaji tale follows a low-ranking archer who overcomes supernatural threats and contributes to collective success through action and cooperation. 

By comparing these stories, the text highlights contrasting responses to crisis—passive appeal versus active engagement—and suggests that broader cooperation, rather than isolated effort, offers a more effective path in times of social break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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