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고씨 가문 족보는 어떻게 이어졌을까? 탐라 시조부터 분파 형성과 전국 확산 과정까지 정리 (The Jeju Go Family History)



 제주 고씨(濟州 髙氏)의 인문 지리적 확산과 분파 형성 과정


1. 서론: 제주 고씨 가문의 역사적 위상과 연구의 전략적 가치

한국 성씨 체계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제주 고씨(濟州 髙氏)는 단순한 혈연 집단을 넘어, 탐라국(耽羅國)이라는 독립적 고대 국가의 성립과 변천을 상징하는 독보적인 ‘국성(國姓)’으로서의 위상을 점한다.

탐라의 개국시조 고을나왕(髙乙那王)으로부터 연원하는 이 가문의 역사는 한반도 본토의 성씨들이 대개 중앙 관료 체제 내부에서 분화된 것과 달리, 도서 생태계라는 고립적 환경에서 자생적 권력을 구축한 뒤 한반도라는 거대 관료 체제와 충돌하고 융합하며 확장해 나간 인문 지리적 대서사시의 전형(Archetype)을 보여준다.


본 글은 938년(고려 태조 21년) 중시조 고말로(髙말老)의 고려 입조를 기점으로 발생한 ‘출도(出島, Leaving the Island)’의 과정을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닌, 가문의 사회적 정체성이 ‘토착 왕조’에서 ‘중앙 사대부’로 변모하는 구조적 전환으로 파악한다. 

사료(고려사, 탐라지, 성주고씨가전 등)에 근거하여 탐라 고유의 정체성이 육지 진출 이후 각 지역의 인문 환경과 결합하며 어떻게 분적(分籍)되고 재편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한국 성씨사의 지리적 분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학술적 과업이다.

가문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고을나왕으로부터 시작되는 탐라 개국 신화와 그 지리적 배경을 고찰하며, 이것이 지닌 초기 사회 자원 배분의 의미를 분석한다.


2. 탐라의 기원과 시조 고을나(髙乙那): 삼성혈 신화의 인문 지리적 해석

탐라의 역사는 한라산 북쪽 기슭의 모흥혈(毛興穴, 현 삼성혈)에서 용출한 세 신인(神人)으로부터 시작된다. 

맏이 양을나(良乙那), 둘째 고을나(髙乙那), 셋째 부을나(夫乙那)는 초기 수렵 채집 사회의 지도자로서 등장하며, 이들의 출현은 제주 토착 세력의 자생적 기원을 상징한다.


제주시 삼성혈


2.1. 사회적 전환: 수렵에서 농경·목축으로의 이행

삼성 신화의 핵심은 동쪽 해안(현 성산읍 온평리)에 표착한 나무 상자 속 세 공주와의 결합이다. 

사료마다 이들의 출처를 '벽랑국(碧浪國)' 혹은 '일본국(日本國)'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탐라가 초기부터 동북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 

특히 공주들이 가져온 망아지, 송아지 및 오곡(五穀)의 종자는 탐라 사회가 원시 수렵 사회에서 정주 농경 및 목축 사회로 급격히 이행했음을 보여주는 문명사적 단초이다.


2.2. '삼사석(三射石)' 전설의 지리적 자원 배분 분석

세 신인이 활을 쏘아 거처를 정한 '삼사석' 전설은 단순한 주거지 선정을 넘어, 초기 국가 형성 단계에서의 토지 및 자원 배분의 우선권을 의미한다.


  • 제1도(一都/徒): 양을나의 거처 (현 제주시 일도동)
  • 제2도(二都/徒): 고을나의 거처 (현 제주시 이도동)
  • 제3도(三도/徒): 부을나의 거처 (현 제주시 삼도동)


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 화살이 꽂힌 지점은 담수원(샘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한 '물이 달고 기름진 곳'이었으며, 이는 생존과 농경에 최적화된 입지 조건을 선점하려는 권력 투쟁의 결과물로 해석된다.

고을나가 제2도에 정착하며 구축한 기반은 훗날 고씨 가문이 탐라의 세습 왕조로 등극하는 물적 토대가 되었다. 

또한 '탐라(耽羅)'라는 국호가 이들이 처음 도착한 '탐진(耽津, 현 전남 강진)'에서 유래했다는 기록은 본토와의 해상 교류가 가문의 권력 강화에 결정적이었음을 입증한다.

신화적 기원을 넘어, 탐라를 세습 통치하며 국성을 공고히 한 역대 군주들의 계보를 사료를 통해 상세히 살펴본다.


제주고씨 시조 탐라국 초대 군주 고을나왕


3. 탐라국 군주 시대의 전개와 고씨 왕조의 세습 통치

고을나왕으로부터 45세 자견왕(自堅王)에 이르기까지 고씨 가문은 수천 년간 탐라의 절대 권력을 행사해왔다. 

이 시대의 통치는 고대 국가로서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주변국(신라, 백제, 일본, 당)과 외교 관계를 맺는 ‘국왕’의 지위를 유지했다.


3.1. 탐라 역대 군주 목록 (사료 및 족보 기반)

대수
군주 명칭
재위 기간 (신화 및 족보상)
특이 사항 및 주요 기록
1
고을나왕 (髙乙那王)
2337 BCE – 2206 BCE
탐라 개국 시조, 1,000년 장수 설화
2
건왕 (建王)
2206 BCE – 1767 BCE
고을나의 후임, 신화적 초기 통치
14
영왕 (榮王)
105 BCE – 58 BCE
기원전 세습 권력 공고화 시기
15
후왕 (厚王)
58 BCE – 7 BCE
신라 내조 전설과 연계된 인물
26
담왕 (聃王)
453 CE – 483 CE
백제 문주왕으로부터 좌평(佐平) 칭호 수여
27
지운왕 (指雲王)
483 CE – 508 CE
한반도 삼국과의 교류 확대
30
담왕 (談王)
558 CE – 583 CE
26대 담왕과 한자가 다름 (談)
31-42
(중략)
-
성진왕, 홍왕, 처량왕, 표륜왕 등 세습
45
자견왕 (自堅王)
933 CE – 938 CE
탐라의 마지막 '국왕', 고려 태조에게 귀부


3.2. 통치 칭호의 변화와 위상의 변모

통일신라 시대를 거치며 탐라의 군주는 ‘국왕’에서 ‘성주(星主)’와 ‘왕자(王子)’로 칭호가 격하된다. 

이는 탐라가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춘 본토 정권의 영향력 아래 편입되면서도 내부 자치를 보장받는 ‘기미국(羈縻國)’적 성격을 띠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고후(髙厚), 고청(髙淸), 고계(髙季) 삼형제가 신라에 내조하여 각각 성주, 왕자, 도내의 칭호를 받은 것은 가문 내부의 서열이 대외적 작위 체계로 공식화된 최초의 사례이다.

탐라 고유의 통치 체제는 938년 고말로의 고려 내조를 기점으로 인질 제도와 관료 채용이 결합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4. 중시조 고말로(髙末老)와 고려 입조: 육지 진출의 결정적 분기점

938년(고려 태조 21년), 자견왕의 태자 고말로(髙末老)는 고려에 내조하여 성주와 왕자의 작위를 수여받고 자치권을 공식 인정받았다. 

이는 가문의 역사에서 ‘탐라 내부의 지배자’를 넘어 ‘고려라는 거대 국가의 구성원’으로 진입하는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4.1. 기미정책(羈縻政策)과 전략적 선택

고말로의 고려 입조는 단순한 복속이 아닌 정치공학적 선택이었다. 

당시 고려는 탐라의 지리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실질적 지배권을 고씨에게 맡기는 기미정책을 취했다.

고말로는 이를 통해 내부 통치권(성주직)을 보존함과 동시에 후손들을 중앙 정계에 진출시켜 가문의 생존 범위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고말로는 모든 탐라계 고씨의 ‘중시조’로 추앙받게 된다.


4.2. 성주공파와 분적파의 분화: 출도(出島)의 구조적 원인

고말로를 기점으로 제주 고씨는 제주에 남아 자치권을 지킨 ‘성주공파(星主公派)’와 육지로 진출한 ‘분적파(分籍派)’로 이원화된다. 

육지 진출의 배경에는 고려의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발생한 ‘인질(기인 제도)’적 성격과 함께, 고위 관료로 채용된 후손들이 정착지에서 새로운 세력 기반을 닦은 ‘정치적 분화’가 자리 잡고 있다.


4.3. 지리적 확산 경로의 도식화

고말로의 후손들이 제주를 떠나 한반도 각지로 확산된 경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제주 고씨 초기 확산 경로]

  • 남해안 경로: 탐진(강진) → 장흥(고중연) → 광주/보성 (전남 남부 거점 형성)
  • 중앙 정계 경로: 제주 → 개경(고영신) → 경기/황해 (중앙 귀족화)
  • 서해안 해로 경로: 제주 → 옥구/군산(고돈겸) → 충청/전북 (학문적 명가 형성)
  • 내륙 확산 경로: 개성 → 횡성/안동/청주 (각지 관료 부임 및 정착)


고말로의 직계 후손들은 고려의 관료 체계에 편입되며 한반도 전역으로 흩어져 각 지역의 인문 환경에 맞는 새로운 본관과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고말로의 아들 3형제인 고유(髙維), 고강(髙綱), 고소(髙紹)는 나란히 고려 조정의 관직에 오르며 '출도'의 성공적인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특히 장남 고유는 남성시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탐라 왕족의 지적 역량이 본토에서도 독보적임을 증명해 냈다.

이들의 급제는 단순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 제주 고씨가 중앙 귀족 사회에 뿌리 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5. 주요 분파의 형성 과정과 지리적 정착 분석

고려 및 조선 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제주 고씨의 분파들은 각 지역의 토착 세력과 결합하거나 독자적인 학문·무반 가계를 구축하며 성장했다.


5.1. 주요 분파별 상세 분석

1) 양경공파 (개성 고씨 - 開城 髙氏)

시조: 고영신(髙令臣, 고말로의 증손)

내용: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고영신은 이부상서, 검교사공참지정사 등 최고위직을 역임하며 가문을 중앙 귀족의 반열에 올렸다. 

이들은 개성을 본관으로 삼아 조선 시대에도 12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특히 고사경(髙士褧)은 《대명률직해》를 이두로 편찬하는 등 법제사적 공헌을 세웠고, 고상안(髙尙顔)은 〈농가월령가〉를 통해 사대부의 생산적 가치관을 대변했다.


2) 장흥백파 (장흥 고씨 - 長興 髙氏)

시조: 고중연(髙仲筵, 고말로의 10세손)

내용: 공민왕 당시 홍건적의 난을 진압한 호종공신으로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졌다. 

전남 장흥을 거점으로 무반적 기질을 유지해온 이 분파는 임진왜란 당시 칠백의총의 영웅인 의병장 고경명(髙敬命)을 배출했다. 

고경명의 가문은 ‘일가오절(一家五節)’이라 불릴 만큼 충절을 중시하여 호남 지역 최고의 명문가로 자리 잡았다.


3) 문충공파 (옥구 고씨 - 沃溝 髙氏)

시조: 고돈겸(髙惇謙) / 파조: 고경(髙慶)

내용: 개성 관료였던 고돈겸이 12세기 중엽 옥구(군산)로 유배된 후 정착하며 형성되었다. 

그의 현손인 고경은 고려 조에서만 ‘9상서(尙書) 12한림(翰林)’을 배출하며 가문의 학문적 위상을 정점에 올렸다. 

조선 시대에는 영성군 고희(髙曦) 등 무신들도 배출하며 문무를 겸비한 가업을 이어갔다.


4) 기타 분파 및 정착지

횡성 고씨: 고구려 국성(高)과 구별되는 독특한 계보를 지니며 고말로의 후손들이 횡성에 정착.

연안 고씨: 고종필(髙宗弼)이 황해도 연백 일대에 정착하여 형성.

안동 고씨: 고응섭(髙應涉)이 안동에 정착하여 영남 사림과 교류.


5.2. 분파별 종합 비교 및 통계 지표

분파 (구 본관)
시조/파조
주요 정착지
주요 인물 및 사회적 위상
문과 급제자
양경공파 (개성)
고영신
경기 개성
고사경(대명률), 고약해(관찰사), 고상안
12명
장흥백파 (장흥)
고중연
전남 장흥
고경명(의병장), 호남 의병 활동의 중심
28명
문충공파 (옥구)
고돈겸/고경
전북 군산
고희, 고홍건, 고려 조 9상서 12한림
다수(명가)
성주공파 (제주)
고인단
제주 전역
탐라 자치권 계승, 고봉례(마지막 성주)
제주 토호
영곡공파 (제주)
고득종
제주/한양
고득종(한성판윤), 유교적 가치 도입 주도
학문적 전환


이러한 지리적 확산은 각 지역에서의 관직 수행과 학문적 성과를 통해 가문의 사회적 위상을 재정립하고, 제주 토착 세력에서 한반도 엘리트 계층으로 완벽히 변모하는 과정이었다.


6. 사회적 위상 변화와 가문 정체성의 유지: 관직 기록과 유교적 변모

탐라의 토착 왕족에서 본토의 사대부로 변모하는 과정은 단순한 관직 획득 이상의 문화적 충격과 수용을 수반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 고씨는 성리학적 예법을 선구적으로 도입하며 가문의 지적 역량을 증명했다.


6.1. 영곡공 고득종: '조선 사대부'로의 완벽한 변모와 가문의 번성

제주 고씨가 조선 시대 중앙 정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영곡공(靈谷公) 고득종(髙得宗)의 등장이다. 

그는 전서공 고신걸의 손자로, 단순한 고위 관료를 넘어 가문 전체를 ‘과거 급제 제조기’로 만든 인물이다.


  • 유교적 혁신: 제주의 문화를 바꾸다

고득종은 가문의 유교화 과정에서 기념비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세종 대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낸 그는 제주도에 최초로 유교식 장법(葬法)과 묘제(墓制)를 도입했다.

당시 수렵 문화와 무속 신앙이 지배적이었던 제주 사회에서 봉분을 만들고 제례를 올리는 예법을 확산시킨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제주 고씨가 본토의 문명화된 사대부 계층과 동질적인 정체성을 확보했음을 선포하는 문명사적 전환이었다.


  • 외교와 행정의 달인: 세종의 두터운 신임

실력 또한 독보적이었다. 

1414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그는 호조참의를 거쳐 수도의 수장인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특히 명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쌓은 탁월한 외교적 공적은 태종세종 두 임금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 밑거름이 되었다.


  • '4형제 전원 급제'의 기염: 문반 명가의 기틀

고득종의 진정한 저력은 이른바 '자식 농사'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의 네 아들인 태필(台弼), 태보(台輔), 태익(台翼), 태전(台展)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것이다.

한 집안에서 부자와 형제들이 나란히 조정의 핵심 요직을 차지한 이 사건은 세간을 놀라게 했다. 

이를 통해 제주 고씨는 '도서 지방의 토호'라는 편견을 완전히 씻어내고, 학문과 도덕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문반 명가로 거듭나게 된다.


6.2. 엘리트 네트워킹과 가업의 유지

조선 시대 장흥 고씨 28명, 개성 고씨 12명의 문과 급제 기록은 이 가문이 중앙 정계에서 강력한 지적 역량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경명의 의병 활동이나 고득종의 관직 경력은 제주 고씨가 ‘변방의 호족’이라는 편견을 깨고, ‘충절’과 ‘학문’이라는 유교적 핵심 가치를 실천하는 가문으로 재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의 성역인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과 그의 차남 인후는 함께 숨을 거두었다. 

뒤를 이어 장남 종후 또한 진주성에서 남강에 몸을 던지니, 사람들은 이들을 '삼장사'라 부르며 기렸다.

여기에 두 딸의 순절까지 더해져 '일가오절'이라는 전무후무한 충절의 가풍이 완성되었다.


장흥 고씨의 고경명이 '붓을 꺾고 칼을 든' 문인 의병장의 상징이라면, 고언백(髙彦伯)은 실전에서 왜군을 벌벌 떨게 했던 '전쟁의 화신'이었다.


  • 4대 명장의 반열: 고언백은 박진, 황진, 원호와 함께 '임진왜란 4대 명장'으로 꼽힌다. 그는 미천한 신분에서 시작했으나 오직 실력과 전공만으로 제흥군(濟興君)의 봉작을 받아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 불패의 기록: 양주 해유령 전투에서 왜군 70여 명의 목을 베어 육전 첫 승리를 이끌었고, 평양성 탈환 작전과 이천 전투 등에서 종횡무진 활약했다. 선조가 그를 두고 "용맹함이 군계일학"이라 칭송했을 정도다.
  • 가문의 비극과 명예: 1604년 선무공신 2등에 올랐으나, 광해군 시절 임해군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논쟁: 당시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렇게 역사적 격변 속에서도 제주 고씨는 고을나로부터 이어진 혈통의 단일성을 유지하며 현대에 이르렀다.


7. 제주 고씨 가문의 인문 지리적 대서사시와 현대적 의의

본고를 통해 고찰한 제주 고씨의 역사는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시작된 탐라의 국성이 어떻게 한반도 전역으로 확장되며 한국사의 보편적 질서 속에 편입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방대한 기록이다. 

삼성혈에서 용출한 고을나왕의 혈통은 중시조 고말로를 거쳐 중앙 정계로 진출하며, 개성, 장흥, 옥구 등지에서 독자적인 본관을 형성하며 한국 사회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7.1. 정체성의 회복: '髙' 이체자와 현대적 통합

현대에 이르러 제주 고씨는 다시 한번 가문의 결속을 꾀하고 있다. 

‘제주 고씨 중앙종문회’를 중심으로 각지에 흩어졌던 분파들을 ‘제주 고씨’라는 단일 본관 아래 합본한 것은 가문의 뿌리를 재확인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산물이다. 

특히 성씨 표기에 있어 일반적인 ‘高(높을 고)’ 대신 이체자인 ‘髙’를 사용하기로 합의한 것은 주목할 만한 족보학적 전략이다. 

이는 고구려계 고씨(高)와의 혈통적 차별화를 분명히 하고, 탐라 국성으로서의 고유한 자부심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7.2. 최종 평가

제주 고씨 가문의 지리적 확산과 분파 형성은 한국 성씨사에서 ‘중앙 정계 편입과 자치 정체성 유지’를 동시에 달성한 가장 성공적인 모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들의 역사는 단순한 가문의 족보를 넘어, 제주라는 독특한 인문 지리적 공간이 한반도라는 거대 문화권과 어떻게 소통하고 융합하며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학술적 자산이다. 

탐라의 국성에서 시작된 고을나왕의 후예들은 오늘날에도 각 분야에서 활약하며, 삼성혈로부터 시작된 가문의 생명력을 한반도 전역에 이어가고 있다.


본 글은 『고려사』, 『탐라지』, 성주고씨가전 등 역사 사료와 공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일부 내용은 가문 기록과 전승 자료를 참고하여 이해를 돕는 범위 내에서 재구성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인의 족보 관련 자료를 참고하여 계보와 분파 형성 과정에 대한 보완적 정보를 반영하였습니다.

본 글은 특정 가문이나 인물에 대한 일방적 평가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역사적 흐름과 구조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내용 중 누락되었거나 오류가 있을 경우 댓글로 제보해주시기 바라며, 다양한 관점에서의 자유로운 토론 역시 환영합니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ical expansion and branching of the Jeju Go clan (Jeju Ko clan), tracing its origins from the mythological founder Go Eulna of Tamna to its integration into the Goryeo and Joseon political systems. 

It interprets the clan’s early formation within the isolated island environment of Tamna and its transformation through contact with mainland Korea. 

The turning point was the submission of Go Mallo to Goryeo in 938, which enabled the clan’s transition from a local ruling lineage to part of the central aristocratic order.

As descendants spread across regions such as Gaeseong, Jangheung, and Okgu, they formed distinct branches, contributing to both civil and military traditions. 

While some records rely on genealogical sources and traditional accounts, including materials such as Korean Genealogy, the article highlights how regional adaptation and political integration shaped the clan’s identity. 

Ultimately, the Jeju Go clan represents a unique case of continuity between an indigenous ruling lineage and a broader Confucian elite society in Korean history.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