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중기 왕권의 위기와 변천: 봉상왕의 실정과 창조리 정변
1. 고구려 3세기 말 정치 지형의 전략적 중요성
고구려 제14대 봉상왕 재위기(292~300년)는 단순히 한 폭군의 치세로 치부하기에는 고구려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구조적 전환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왕위 계승 원칙이 기존의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확고히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내부적 권력 갈등과, 대외적으로는 모용선비(慕容鮮卑)라는 신흥 강자가 고구려의 생존을 위협하던 복합적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진통은 고구려가 초기 국가의 틀을 벗어나 '제국'으로 비상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했던 내부적 성장통이기도 했습니다.
본글에서는 봉상왕이라는 군주의 개인적 결함이 고구려 내부의 구조적 불안정성과 결합하여 어떻게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는지, 그리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국상 창조리로 대표되는 관료 집단이 어떠한 역사적 선택을 내렸는지 심도 있게 고찰하고자 합니다.
2. 봉상왕의 즉위와 권력 기반의 취약성
서천왕의 아들인 봉상왕(휘 상부)의 즉위 배경에는 선대 대부터 이어져 온 극심한 권력 투쟁의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그를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고 평했으나, 역사학적 관점에서 그의 '의심'은 정치적 생존 본능에 가깝습니다.
중천왕 대의 예물·사구의 난, 서천왕 대의 일우·소발의 난 등 왕제(王弟)들이 주도한 반란을 목격하며 성장한 봉상왕에게 왕족은 협력자가 아닌 잠재적 찬탈자였습니다.
이러한 심리적 압박은 부자 상속의 정당성을 조기에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독단적 숙청으로 변질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권력 유지에 대한 그의 강박은 고구려의 국가적 자산이었던 핵심 인재들을 제거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파멸적 행보로 이어졌습니다.
3. 핵심 인재 숙청과 정치적 고립: 안국군 달가와 고돌고 사건
봉상왕은 즉위 원년(292년)에 숙부 안국군 달가를, 이듬해에는 친동생 돌고를 숙청했습니다.
특히 달가의 처형은 '비용-편익' 관점에서 고구려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달가는 280년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국경을 안정시킨 전쟁 영웅으로, 그의 존재는 북방 이민족에 대한 강력한 억지력이었습니다.
달가의 죽음으로 고구려는 숙신과 양맥(梁貊) 등 복속 세력의 재반란 가능성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는 곧 북방 방어망 유지를 위한 군사적·경제적 비용의 급증을 의미했습니다.
유능한 사령관 한 명을 제거한 대가는 국방 예산의 비효율적 증대와 민심 이반이라는 막대한 손실로 돌아왔습니다.
안국군 달가의 국가적 공헌과 정치적 말살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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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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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군 달가의 국가적 공헌 (편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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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왕의 정치적 말살 및 결과 (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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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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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 정벌 및 단로성 함락, 추장 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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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영웅의 위신을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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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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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맥과 숙신 부락을 통솔하여 변방 안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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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관리자의 부재로 북방 방어망 통제력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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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향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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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절대적 신망과 정서적 지지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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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가의 죽음에 백성들이 통곡하며 민심 급격히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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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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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증된 고위급 군사·행정 자산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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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에 따른 방위 비용 급증 및 왕실 인적 자원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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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내부의 유능한 인적 자원을 스스로 파괴한 봉상왕의 행보는 대외 관계의 위기 상황에서 그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국방의 기둥인 달가를 벤 봉상왕의 칼날은 곧바로 자신의 혈육에게 향했습니다.
즉위 2년(293년), 왕은 친동생 돌고(咄固, 미천왕의 부친)가 딴마음을 품었다는 의심만으로 역모죄를 씌워 자결을 강요했습니다.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던 어린 왕손 을불(乙弗)은 직감했습니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였습니다.
그는 화려한 왕족의 의복을 벗어 던지고 거친 삼베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어둠을 틈타 궁궐 뒷담을 넘은 을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 이 비극을 지켜봐야 한다."
한때 고구려에서 가장 고귀했던 혈통은 이제 현상 수배범이 되어 거친 산야를 헤매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봉상왕의 광적인 의심이 역설적으로 고구려 역사상 가장 민초를 닮은 왕, 미천왕을 탄생시키는 서막이 오른 것입니다.
4. 대외 위기 관리의 명암: 모용선비의 침입과 고노자의 활약
293년과 296년 발생한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은 봉상왕 권력의 또 다른 시험대였습니다.
초기 봉상왕은 국상 창조리의 추천을 받아 북부 소형 고노자(高奴子)를 등용하는 등 유능한 인재를 활용할 줄 아는 일면을 보였습니다.
고노자는 500명의 기병으로 모용외의 군대를 격파하며 신성 태수로서 국방의 핵심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296년 모용선비가 서천왕의 능을 도굴하려다 '풍악 소리'를 듣고 퇴각한 사건은 흥미롭습니다.
사료상으로는 신비로운 현상으로 묘사되나,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이를 고구려군이 능묘 지형을 활용하여 심리전이나 매복 작전을 펼쳤음을 시사하는 군사적 실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방어 성공에도 불구하고, 선왕의 능묘가 위협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왕실의 신성한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습니다.
봉상왕은 군사적 위기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왕권 강화의 기회로 활용하는 대신 백성과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5. 실정의 정점: 자연재해와 무리한 궁궐 증축
재위 말기(298~300년) 사이에 집중된 서리, 우박, 흉년, 지진 등의 자연재해는 고구려의 재생산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봉상왕은 이를 외면한 채 15세 이상의 장정을 대거 소집하여 궁궐 증축을 강행했습니다.
• 경제적 파탄: 무리한 부역은 농번기의 노동력 고갈을 초래했습니다.
이는 병농일치제(농민 의무병으로 운영되는 상비군제)에 기반한 고구려의 전쟁 억지력과 주곡 생산 구조를 동시에 붕괴시켜,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경제적 재앙이 되었습니다.
• 군신 공치(共治) 모델의 파열: 창조리가 민생의 안위를 들어 공사 중지를 간하자, 봉상왕은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하는가?"라며 웃으며 답했습니다.
이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기반한 전제적 권력관의 극단적 표출이며, 군주와 관료가 함께 국가를 운영하는 '군신 공치 모델'의 완전한 파괴를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왕이 백성의 생존권을 담보로 자신의 지엄함을 증명하려 함으로써, 정변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필연이 되었습니다.
6. 창조리 정변의 전개와 정당성 평가
300년 9월, 창조리는 사냥길에 나선 신료들에게 갈대잎을 관에 꽂게 하여 거사 참여를 확인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이며 정변을 단행했습니다.
봉상왕은 별실에서 자결했고, 창조리는 오랫동안 민간에 은신해 있던 을불(乙弗, 미천왕)을 찾아내 옹립했습니다.
미천왕의 즉위는 단순히 혈통의 복원이 아니라 '고난받는 민중과의 정서적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강력한 정당성을 획득했습니다.
을불의 도피 생활은 처절했습니다.
신분을 숨긴 채 수실촌(水室村, 평안북도 의주 인근 추정)의 부잣집 주인 '음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주인 음모는 악독했습니다.
그는 을불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면 집 앞 연못의 개구리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며, 을불에게 밤새 기와 조각을 던져 개구리를 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네 놈이 게으름을 피워 개구리가 우는구나! 한 마리라도 울면 내일 밥은 없다!"
한때 왕족이었던 사내는 밤새 차가운 흙바닥에 앉아 연못으로 기와를 던졌습니다.
손끝이 갈라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마다 그는 기와 조각에 자신의 울분을 담아 수면을 때렸습니다.
이 1년의 세월은 을불에게 '권력의 횡포'가 기층 민중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뼛속 깊이 새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머슴살이를 견디다 못한 을불은 소금 장수로 전업해 사수촌(思搜村)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민초의 삶은 어디서나 고달팠습니다.
동네 할멈의 집에 머물며 소금을 팔던 중, 할멈은 을불의 소금을 공짜로 가로채려 꾀를 냈습니다.
할멈은 몰래 자신의 신발을 을불의 소금 가마니 속에 숨겼습니다.
그리고는 소리쳤습니다.
"이 소금 장수가 내 신발을 훔쳤다!"
영문도 모른 채 도둑으로 몰린 을불은 압록재(宰, 압록강 인근을 다스리던 지방관)에게 끌려갔습니다.
지방관은 앞뒤 사정을 살피지도 않고 을불에게 가혹한 태형(笞刑, 매질)을 가했습니다.
매 맞은 등에서 피가 터져 나왔고, 생계 수단이었던 소금마저 벌금으로 모두 빼앗겼습니다.
이 사건은 을불에게 결정적인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지방관들의 무능과 부패가 어떻게 무고한 백성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직접 몸으로 겪은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 고초가 미천왕의 대외 팽창 정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창조리 정변의 성공 요인
1. 민생 파탄에 따른 대중적 명분: 자연재해와 무리한 부역으로 폭발 직전에 이른 민심이 정변의 가장 강력한 후원세력이 되었습니다.
2. 관료 집단의 생존적 결집: 국상 창조리마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기존 관료 체계 전체가 왕권 견제를 위해 결속했습니다.
3. 준비된 대안 세력: 8년간의 고난을 통해 검증된 왕손 을불의 존재는 정변 이후의 정치적 불확실성을 상쇄했습니다.
이 정변은 고구려 왕권의 성격을 독단적 폭정에서 민생 안정과 영토 확장이라는 실용적 방향으로 전환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7. 봉상왕의 몰락이 고구려사에 남긴 통찰
봉상왕의 실패와 미천왕의 즉위는 고구려 중기 정치사에서 낙랑과 대방 수복의 동력을 확보하는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미천왕은 민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부 결속을 다졌고, 이를 바탕으로 요동 진출과 군현 축출이라는 대업을 달성했습니다.
사료상 김부식은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창조리를 '반역 열전'에 기록했으나, 현대 역사학적 관점에서 그의 행위는 국가의 자정 작용이자 민생을 위한 구국적 결단으로 평가받습니다.
창조리가 행한 견제 기능은 군주제의 한계를 보완하는 관료적 견제 장치의 초기적 원형을 보여줍니다.
봉상왕의 일대기는 "왕권의 지엄함은 백성의 고통 위에서 증명될 수 없다"는 준엄한 교훈을 남깁니다.
결국 고구려가 동북아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비결은 군주의 절대적 권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권위가 백성의 삶과 국가의 실리에 복무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역사적 실용주의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를 중심 사료로 삼아, 고구려 중기 봉상왕의 실정과 창조리 정변을 단순한 폭군 서사가 아닌 왕권 구조 변화·관료 집단의 견제·민생 붕괴라는 구조적 맥락에서 재해석한 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일부 장면(능묘 침입 사건, 민심의 반응 등)은 사료 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학적 해석과 분석을 덧붙였습니다.
이는 단정적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 틀임을 밝힙니다.
사실 관계 보완, 다른 사료 해석, 용어·연대에 대한 지적이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세요.
다양한 관점의 토론이 이어질수록, 고구려 정치사의 입체적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King Bongsang’s reign (292–300) marked a critical crisis in mid-Goguryeo politics.
Ascending the throne amid unresolved succession tensions, he viewed royal relatives as threats and eliminated key figures, including the war hero Dalga.
These purges weakened internal cohesion and undermined frontier stability during rising external pressure from the Murong Xianbei.
Natural disasters and forced palace construction further devastated the economy and alienated the populace.
When the king rejected ministerial remonstrance, the bureaucratic elite, led by Chancellor Changjori, staged a coup.
They enthroned Eulbul (King Micheon), whose years among commoners gave him symbolic legitimacy.
The coup reflected not mere rebellion but a corrective response to failed kingship, redirecting Goguryeo toward stability and later expan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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