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상 창조리와 갈대잎 정변: 봉상왕의 폭정을 끝내고 고구려의 새벽을 연 관료 혁명 (Changjori of Goguryeo)


국상 창조리: 갈대잎으로 혁명을 완수하고 고구려의 새벽을 열다


1. 암흑의 시대, 역사의 기로에 선 한 관료

3세기 말 고구려의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선비족 모용부의 침략이 국경을 찢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타락이 국가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습니다. 

292년 즉위한 제14대 봉상왕은 즉위 초기부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무리한 집착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백성의 존경을 받던 숙신 정벌의 명장 달가(達賈)를 의심하여 죽였으며, 친동생인 돌고(咄固)마저 반역의 혐의를 씌워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러한 숙청은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 아닌, 사직의 안녕보다 왕권의 안위를 우선시한 치명적인 '정치적 악수(惡手)'였습니다. 

영웅을 잃고 공포에 짓눌린 민심은 이반되었고, 고구려라는 거함은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국상 창조리(倉租利)입니다.

그는 암흑의 시대 속에서 중대한 철학적 질문을 마주했습니다. 

"신하가 지켜야 할 참된 충(忠)의 대상은 누구인가? 눈앞의 군주인가, 아니면 국가의 실체인 백성인가?" 

창조리의 선택은 고구려의 국운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그의 행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지도자의 자격과 관료의 양심에 대한 웅혼한 대답을 들려줍니다.


2. 국상의 무게: 전문성과 혜안으로 국난을 방어하다

294년, 전임 국상 상루(尙婁)의 뒤를 이어 발탁된 창조리의 등장은 고구려 정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발탁 과정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실무형 인사'의 단면이 녹아 있습니다.


파격적 발탁과 관등 체계의 균열

전통적으로 고구려의 국상은 '패자(沛者)'급의 고위 귀족이 맡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창조리는 남부 출신의 하급 관료인 '대사자(大使者)'에서 출발하여, 국상에 임명될 당시에도 패자보다 낮은 '대주부(大主簿)'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는 봉상왕이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실무 능력이 탁월한 창조리를 발탁했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파격은 훗날 창조리가 기득권 세력과 새로운 왕권 사이에서 겪게 될 고독한 투쟁과 정계 은퇴를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했습니다.


고노자(高奴子) 천거와 안보 전략의 정수

창조리는 국방에 있어 탁월한 전략적 혜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북부대형 고노자를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추천했습니다. 

신성은 요동으로 나아가는 핵심 거점이자 고구려 안보의 보루였습니다.

• 전략적 가치: 고노자는 500명의 기병으로 모용외를 막아낸 실전 경험을 갖춘 '검증된 인재'였습니다.

• 인과관계: 창조리의 적재적소 인사는 모용외의 침략을 종식시켰고, 서천왕의 능침이 파헤쳐지는 치욕을 막아내며 고구려의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구분
일반적인 국상 임명 사례
창조리의 임명 사례
주요 관등
패자(沛者), 대로(對盧) 등 최고 관등
대사자(大使者) → 대주부(大主簿)
임명 성격
가문과 위계 중심의 전통적 발탁
전문성과 실무 능력 중심의 파격 발탁

국방이 안정되자 창조리의 시선은 내부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을 막아낸 기쁨도 잠시,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 왕권의 부패는 창조리를 다시금 고뇌의 늪으로 몰아넣었습니다.


3. 폭정의 극단: 백성의 고혈로 지은 화려한 궁궐

봉상왕 9년, 고구려는 지진과 가뭄이라는 천재지변 속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왕은 오히려 자신의 위엄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화려한 궁궐 증축을 강행했습니다.


민본(民本)을 망각한 권력자의 방어 논리

창조리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대변하여 왕의 면전에서 직언을 올렸습니다. 

사료에 기록된 두 사람의 논박은 권력의 본질에 대한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창조리: "천재지변이 잇따르고 백성이 굶주려 구렁창에 굴러다니니, 지금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두려움으로 반성할 때입니다. 백성을 몰아 토목공사를 벌이는 것은 백성의 어버이 된 도리가 아닙니다."

봉상왕 (조소하며): "군주란 백성이 우러러보는 자리다. 궁궐이 장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상국은 나를 헐뜯어 백성의 인기를 얻으려 하는 것인가?"

봉상왕의 대답은 민본을 망각한 권력자가 자신의 실정을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어 논리였습니다. 

왕은 15세 이상의 백성을 동원했는데, 사료에 따라 '장정'만을 동원했다는 기록(열전)과 '남녀'를 모두 동원했다는 기록(본기)이 엇갈릴 정도로 당시의 부역은 가혹하고 무차별적이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생산 기반을 파괴하는 자멸적 행위였습니다.


구분
봉상왕의 논리 (위엄의 현시)
창조리의 논리 (인과 충의 본질)
권력의 근거
화려한 궁궐과 장식된 권위
백성을 아끼는 어진 마음(仁)
신하의 역할
군주의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잘못된 길을 바로잡는 직언(忠)
국가 우선순위
군주의 개인적 위엄 확립
민생 안정과 사직의 보존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달은 창조리는 결단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충(忠)이란 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부터 사직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4. 잃어버린 왕손을 찾아서: 소금장수 을불과 창조리의 결단

폭정의 칼날 아래 아버지를 잃고 도망친 왕손 을불은 수실촌 음모(陰牟)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동촌 출신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을 팔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창조리는 이 잃어버린 왕손을 찾는 일에 고구려의 명운을 걸었습니다.


비류수 가에서 마주한 새로운 태양

창조리는 심복인 조불(祖弗)과 소우(蕭友)를 파견했습니다. 

그들은 추적 끝에 비류수 가에서 소금 바구니를 멘 초라한 행색의 을불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 을불은 신분을 숨기며 경계했으나, "지금 임금이 인심을 잃어 나라가 위태로우니 백성의 어버이가 되어달라"는 간곡한 설득에 마침내 자신의 천명을 긍정했습니다.

을불이 겪은 머슴살이와 소금장수의 세월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훗날 미천왕이 될 지도자가 백성의 가장 낮은 곳에서 그들의 숨소리를 체득하는 '제왕학의 과정'이었습니다. 

창조리는 가장 낮은 곳을 거친 지도자만이 고구려의 찢긴 민심을 봉합할 수 있음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5. 갈대잎의 혁명: 피를 최소화한 위대한 폐위

봉상왕 9년 9월, 창조리는 사냥터를 배경으로 거사를 실행했습니다. 

사냥터는 군사력을 자연스럽게 동원할 수 있으면서도 왕의 시야를 분산시킬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이었습니다. 

이 혁명의 정점에는 '갈대잎'이라는 지극히 고구려적인 상징이 있었습니다.


갈대잎의 서약과 침묵의 압도적 힘

창조리는 웅장한 연설 대신 짧고 강렬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 그러고는 자신의 관에 갈대잎을 꽂았습니다. 

피 흘리는 칼 대신 흔한 식물을 선택한 이 지략은 불필요한 살상을 최소화하겠다는 결의이자, 꺾여도 다시 일어나는 민초의 생명력을 사직의 기치로 삼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사냥터에 모인 신하들이 일제히 관에 갈대잎을 꽂았을 때, 현장에는 거대한 정적이 감돌았습니다. 

그 침묵의 무게는 봉상왕의 가짜 위엄을 단번에 무너뜨렸습니다. 

창조리는 봉상왕을 별실에 가두고 을불에게 옥새를 바침으로써, 고구려 역사상 가장 정당하고 질서 정연한 정권 교체를 완수했습니다. 

이는 권력 찬탈이 아닌, 사직을 구제하기 위해 도려낸 '불가피한 수술'이었습니다.


6. 역사가 된 관료, 창조리의 유산

미천왕 즉위 이후 창조리는 역사의 기록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춥니다. 

일각에서는 미천왕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그가 보여준 혁명의 순수성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입니다. 

"혁명의 설계자는 새로운 시대의 정당성을 위해 스스로 사라짐으로써 그 완성을 도모했다"는 인문학적 고찰은 그가 보여준 참된 충의 종지부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리의 생애를 관통하는 3가지 키워드

1. 혜안(慧眼): 외풍(고노자)과 내우(을불)를 다스릴 적임자를 찾아내 국가의 영속성을 보장한 탁월한 안목.

2. 직언(直言): 군주의 노여움과 죽음의 공포를 넘어 백성의 고통을 왕의 면전에서 고발한 관료의 양심.

3. 결단(決斷): 갈대잎 하나로 민심을 규합하여 피 흘림 없이 사직을 구제한 위대한 용기와 지략.

창조리는 미천왕이라는 전성기의 기틀을 닦았고, 고구려는 그 토대 위에서 낙랑군을 축출하며 웅비할 수 있었습니다. 

"참된 충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창조리는 자신의 생애로 답했습니다. 

충은 권력자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나라를 지탱하는 백성과 역사의 대의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고구려의 새벽을 열었던 '갈대잎의 정객' 창조리는, 오늘날에도 올바른 공직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영원한 귀감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한 신뢰 가능한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독자의 이해와 몰입을 돕기 위해 일부 장면 전개와 인물 심리는 서사적으로 재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료 해석이 갈리는 부분이나 현대적 관점에서의 분석은 글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반영하였으며, 절대적인 정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해석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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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jori, the Guksang (chief minister) of Goguryeo in the late 3rd century, emerged as a decisive figure during a period of internal decay and external threats. 

Under King Bongsang, political purges, forced labor, and disregard for the people pushed the state toward collapse. 

Changjori, originally promoted for his practical talent rather than noble lineage, successfully defended the realm by appointing capable generals, but ultimately realized that the king himself had become the greatest danger to the nation. 

Choosing loyalty to the state over obedience to the ruler, Changjori located the exiled royal heir Eulbul, who had lived among commoners as a servant and salt trader. 

In 300 CE, Changjori orchestrated a bloodless coup using reed leaves as a silent pledge, deposing Bongsang and enthroning Eulbul as King Micheon. 

Changjori then disappeared from politics, leaving behind a legacy that redefined loyalty as devotion to the people and the survival of th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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