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대사의 거대한 전환점: 임신의 난과 덴무 천황의 신화가 된 역사
1. 왜 우리는 지금 '임신의 난'을 주목해야 하는가?
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주제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DNA가 결정된 가장 뜨거웠던 순간, 바로 '임신의 난(壬申の亂, 672년)'과 그 승리자 덴무 천황(天武 天皇)의 이야기입니다.
7세기 후반의 동아시아를 상상해 보십시오.
한반도에서는 백제가 멸망(660년)하고, 이를 구원하러 간 왜(倭)의 수만 대군이 백강구 전투(白江口 戰鬪, 663년)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처참하게 궤멸당했습니다.
당시 열도 내부는 '당나라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고, 피난 온 수많은 백제 유민들로 북새통을 이뤘죠.
이 대외적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열망이 폭발한 것이 바로 임신의 난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사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한 삼촌과 조카의 권력 다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내전은 다음의 세 가지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역사의 용광로였습니다.
• 권력 구조의 재편: 귀족 연합 정치를 끝내고 천황 중심의 강력한 전제 군주제(황친정치)를 확립.
• 국가 정체성 확립: '왜(倭)'라는 이름 대신 '일본(日本)'을 국호로, 군주를 '천황(天皇)'으로 부르기 시작.
• 신화의 역사화: 천황가를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으로 규정하여 지배의 정통성을 '신성화'함.
이 거대한 폭풍의 전조는 사실 백제의 멸망과 함께 시작된 덴지 천황(天智 天皇)의 불안한 통치에서부터 싹트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긴박한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 폭풍 전야: 덴지 천황의 집권과 승계의 딜레마
덴지 천황, 즉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 皇子)는 을사의 변(645년)을 주도해 소가씨(蘇我氏) 세력을 몰아낸 풍운아였습니다.
그는 백강구 전투의 참패 이후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규슈 지역에 수성(水城, 미즈키)을 쌓고 쓰시마(對馬), 이키(壹岐) 등에 봉수와 변경수비대인 사키모리(防人)를 배치하는 등 국방에 열을 올렸습니다.
또한 오노성(大野城), 기에성(椽城) 같은 조선식 산성을 축조하며 호족들을 쥐어짰죠.
이 과정에서 엄청난 군비가 소모되었고, 천황은 호족들에게 많은 돈을 빌리며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습니다.
당연히 지방 호족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겠죠.
"우리는 땅도 내놓고 돈도 냈는데, 천황은 우리를 더 깔아뭉개려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 겁니다.
이때 후계 구도를 놓고 결정적인 균열이 발생합니다.
덴지 천황은 자신의 아들인 오오토모 황자(大友 皇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장자 상속이 정착되지 않았고, 오히려 실력 있는 동생이 잇는 관습이 강했습니다.
덴지 천황의 동생인 오아마 황자(大海人 皇子, 훗날의 덴무 천황)는 이미 장성하여 실력과 인망을 갖춘 강력한 경쟁자였습니다.
여기서 두 인물의 운명을 가른 정치적 배경을 표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오오토모 황자 vs 오아마 황자 비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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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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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토모 황자 (고분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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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마 황자 (덴무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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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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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카코노이라츠메(宅子娘) - 이가(伊賀) 국조의 딸 (지방 세력 출신이라는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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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메이 천황(齊明 天皇) - 정통 황족 출신의 적자 (강력한 정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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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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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近江) 조정, 중앙 관리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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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美濃) 등 지방 호족, 동국(東國)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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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지 천황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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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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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동생 (혹은 이부형설이 존재할 정도로 대립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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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세력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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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유지 세력, 중앙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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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 지방 세력, 중앙의 수탈에 반발하는 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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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여러분, 흥미로운 학설이 하나 있습니다.
기록상 덴무는 덴지의 동생이지만, 가마쿠라 시대 사서들에 근거해 역산해 보면 덴무가 덴지보다 나이가 많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덴무가 덴지의 이복형(아야 황자와 동일인물설)이거나 아예 혈연관계가 없는 타인이라는 '비형제설'까지 제기됩니다.
이들의 갈등은 668년 연회에서 폭발합니다.
술에 취한 오아마가 덴지 천황 앞에서 긴 장창을 바닥에 꽂으며 항의한 사건(장창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보여줍니다.
덴지 천황은 죽기 직전 오아마를 불러 본심을 떠보지만, 오아마는 "출가하여 수도하겠다"며 삭발하고 요시노(吉野)로 은둔하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호랑이가 발톱을 숨기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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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무 천황 |
3. 운명을 건 672년의 기록: 임신의 난의 전개 과정
671년 덴지 천황이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오오토모 황자가 조정을 장악합니다.
하지만 672년 6월, 요시노에서 때를 기다리던 오아마 황자는 드디어 거병합니다.
이것이 바로 임신의 난(壬申の亂)의 시작입니다.
오아마는 요시노를 탈출해 곧장 미노(美濃)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왜 미노였을까요? 이곳은 동국(東國)의 군사력을 수도권으로 끌어들이는 병목 구간이자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오아마는 이곳을 선점해 오미 조정과 지방 세력의 연락망을 끊어버렸습니다.
반면 오오토모의 오미 조정은 지방 호족들에게 군사를 요청했으나, 덴지 시절의 가혹한 통치에 질린 호족들은 "우리는 바쁘다"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전쟁은 '중앙 귀족 세력 vs 지방 신흥 호족 세력'의 대결이었으며, 민심은 이미 오아마에게 기울어 있었습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른 3가지 결정적 장면]
1. 요시노 탈출 및 미노 선점: 소수의 측근만 데리고 험난한 산길을 통과해 미노의 인적·물적 자원을 장악하며 반격의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2. 후와 봉쇄(不破 封鎖): 동국과 서국을 잇는 길목인 후와를 봉쇄함으로써 오미 조정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왔습니다.
3. 세타교 전투(勢多橋 戰鬪): 비와호 근처 세타에서 벌어진 최후의 결전입니다.
오아마의 군대는 압도적인 기세로 오미 조정을 궤멸시켰고, 패배한 오오토모 황자는 산속에서 자결하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낸 것처럼, 삼촌 오아마는 조카의 숨통을 끊고 권력을 거머쥐었습니다.
이제 그는 단순한 승리자를 넘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4. 덴무 천황의 등극과 '천황' 권위의 재설계
673년, 아스카 기요미하라 궁(飛鳥 淨御原 宮)에서 즉위한 덴무 천황은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전제 군주로 군림합니다.
그는 재위 14년 동안 단 한 명의 대신(大臣)도 두지 않았습니다.
모든 요직을 자신의 아들들과 황족들에게만 맡기는 '황친정치(皇親政治)'를 펼친 것이죠.
이는 귀족들의 입을 막고 천황의 의지만으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는 국가라는 기계를 천황 중심으로 다시 조립했습니다.
그 핵심 병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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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카 궁궐 유적 |
1. 야쿠사노 카바네(八色之姓: 팔색의 성)
전략: 씨족 서열의 8단계 전면 재편
핵심: 기존의 씨족 체계를 완전히 뒤흔들고, 최상위 등급인 '마히토(眞人: 도교적 이상향)'를 신설했습니다.
오직 황족만이 이 자리를 차지하게 함으로써, 귀족들과의 신분적 격차를 하늘과 땅 차이로 벌려놓았습니다.
2. 관위 48층제(冠位四十八階)
전략: 관리 등급의 초정밀 세분화
핵심: 관직의 사다리를 48단계로 쪼갰습니다.
명(明), 정(淨), 정(正), 직(直) 등 도교적 가치를 담은 이름을 붙여, 모든 관리가 오직 천황이 부여한 '등급'에 따라 움직이는 정교한 부속품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3. '일본(日本)'과 '천황(天皇)'의 탄생
전략: 국가 브랜드와 통치자 칭호의 공식화
핵심: 비하의 의미가 섞인 '왜(倭)'를 버리고, '해가 뜨는 근본'이라는 뜻의 일본(日本)을 국호로 확정했습니다.
또한 스스로를 신격화된 존재인 천황(天皇)이라 선포하며, 단순한 군주를 넘어선 절대적인 권위를 구축했습니다.
4.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飛鳥 淨御原 令)
전략: 율령 국가의 행정 OS(운영체제) 설치
핵심: 법의 힘으로 통치하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비록 사후에 완성되었으나, 덴무가 주도한 이 법령 정비는 일본이 주먹구구식 씨족 사회에서 세련된 중앙집권적 율령 국가로 진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히토(眞人)'라는 칭호입니다.
이는 도교에서 '선인의 상위 계급'을 뜻합니다.
덴무 천황은 자신을 인간을 넘어선 존재, 즉 '아라히토가미(現人神 -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로 규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덴무의 금기: 1,200년의 식탁을 바꾼 선언
675년(덴무 4년) 4월, 덴무 천황은 전국에 조칙을 내립니다.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육식을 전면 금지한다는 내용이었죠.
이 선언은 이후 일본인의 식탁에서 고기를 치워버린 1,200년 '강제 채식' 역사의 시발점이 됩니다.
1. 왜 금지했을까? (명분과 실리)
종교적 명분 (불교의 국교화): 덴무는 불교를 통해 국가적 통합력을 얻으려 했습니다.
불교의 '살생유택(殺生有擇)' 교리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천황이 백성의 자비로운 어버이임을 과시하려 한 것이죠.
정치적 실리 (농업 생산성): 사실 이게 진짜 이유입니다. 당시 소와 말은 귀중한 노동력이었고, 닭은 시간을 알리는 도구였습니다.
농번기(4월~9월) 동안 가축을 잡아먹는 행위를 막아 농업 생산량을 극대화하려는 고도의 경제 정책이었습니다.
2. 모든 고기가 불법이었나?
덴무의 금지령에는 흥미로운 예외가 있었습니다.
멧돼지와 사슴은 OK: 농작물을 망치는 유해 조수로 취급받던 멧돼지와 사슴은 금지 목록에서 빠졌습니다. (훗날 '산고래'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몰래 먹기도 했죠.)
사냥 도구의 금지: 함정이나 화살 등으로 가축을 잡는 것은 엄격히 처벌했지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길은 열어두었습니다.
3. 일본인의 체형까지 바꾼 '강제 채식'
이 금기령은 훗날 다른 천황들을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영향: 단백질 섭취가 극단적으로 줄어들면서 일본인의 평균 신장이 작아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지독한 금기는 1,200년이 지난 1872년,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이 직접 서양식 소고기 요리를 먹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비로소 공식 해제됩니다.
5. 신화가 역사가 되는 순간: 신도 국교화와 사서 편찬
덴무 천황은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도덕적 결함을 덮기 위해 정교한 '정치적 세탁'을 시도합니다.
그 도구가 바로 '신화'였습니다.
그는 이세 신궁(伊勢 神宮)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 大御神)'를 황실의 시조신으로 격상시켰습니다.
20년마다 신전을 새로 짓는 '시키넨센구(式年 遷宮)' 제도도 이때 그의 발안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 최초의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찬을 명했습니다.
• 《고사기》: 히다노 아레(稗田 阿禮)가 암송한 내용을 오노노 야스마로가 기록한 것으로, 천황의 신화적 정통성에 집중했습니다.
• 《일본서기》: 중국식 정사의 틀을 빌려 대외적인 위신을 세우고 다양한 전승을 병기하여 국가적 위상을 높였습니다.
이 역사서들을 통해 덴무는 '신화 속 이야기가 곧 천황의 통치 근거'라는 논리를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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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서기시 대간의 "신들의 시대" 장에서 발췌한 두 페이지 |
[신화와 역사의 결합이 가져온 정치적 효과]
• 천황가 혈통의 신성화: 천황은 신의 직계 후손이므로 반역은 곧 신에 대한 도전임.
• 지방 호족 전승의 통합: 뿔뿔이 흩어져 있던 지방 신화들을 아마테라스 체제 아래 종속시켜 정신적 통일을 이룸.
• 국가 신도(神道)의 확립: 토착 신앙을 국가 종교로 정립하여 중앙집권적 통제력 강화.
• 호국 불교의 추진: 《금광명경(金光明經)》 등을 설법하게 하여 '천황은 부처의 가호를 받는 지배자'임을 강조.
6. 덴무 천황이 남긴 유산과 현대적 함의
686년 9월 9일, 일본 고대사의 거인 덴무 천황은 숨을 거둡니다.
그의 묘인 히노쿠마노오오치 능(檜隈大內陵)은 1235년 도굴되었는데, 당시 기록인 《아후노야마료우키(阿不幾乃山陵記)》에 따르면 그의 유체는 머리가 보통 사람보다 크고 정강이뼈의 길이를 보아 키가 약 175cm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구였던 셈이죠.
관 안에는 백발이 흩어져 있었다는 생생한 기록도 남았습니다.
덴무 천황의 통치기(하쿠호 문화기)는 일본이 고대 율령 국가로서 완성된 시기입니다.
임신의 난이라는 비극적 내전은 역설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브랜드와 체제를 확립하는 용광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군사, 행정, 종교, 역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엮어내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일본 천황제의 원형을 설계했습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덴무가 왜 신화를 역사가 되게 했는지, 그 정치적 통찰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진짜 이유입니다.
[핵심 요약]
1. 임신의 난은 덴지 천황의 사후, 지방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은 오아마 황자가 중앙 조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일본 최대의 정변이다.
2. 승리한 덴무 천황은 '일본' 국호와 '천황' 칭호를 공식화하고, 대신을 두지 않는 황친정치를 통해 전제 군주제의 기틀을 다졌다.
3.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찬을 통해 천황가를 신의 혈통으로 규정함으로써, 찬탈의 비극을 신화적 정통성으로 승화시켜 영속적인 지배 구조를 설계했다.
이 글은 임신의 난(672년)과 덴무 천황의 집권 과정을 중심으로, 일본 고대 국가 체제와 천황 권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사료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충실히 반영하고자 했으나, 일부 사안은 사서 해석이나 학계 견해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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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이 지식을 공유하는 동시에, 역사를 함께 읽고 생각하는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The Jinshin War of 672 was a decisive civil war that reshaped ancient Japan’s political structure.
Following Emperor Tenji’s death, Prince Ōama rose against his nephew Prince Ōtomo, drawing support from regional clans dissatisfied with central authority.
Victorious, Ōama ascended the throne as Emperor Tenmu and dismantled aristocratic coalition politics, replacing it with a strong emperor-centered regime.
Tenmu reorganized ranks and titles, strengthened imperial kin rule, and promoted the use of “Japan” and “Emperor” as symbols of sovereignty.
Through state-controlled rituals and the compilation of chronicles such as the Kojiki and Nihon Shoki, myth and history were fused to legitimize imperial authority.
The conflict ultimately forged the foundations of Japan’s centralized state and enduring emperor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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