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함락까지: 십자군 왕국을 붕괴시킨 내부 분열과 살라딘의 결정적 전략 (Battle of Hattin)




하틴의 뿔에서 예루살렘의 함락까지: 십자군 왕국의 파멸과 제3차 원정의 서막


1. 역사의 변곡점, 하틴 전투

역사란 때로 한 사람의 의지나 단 한 번의 오판으로 그 흐름이 완전히 뒤바뀌곤 합니다. 

1187년 7월 4일, 갈릴리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하틴의 뿔(Horns of Hattin)'이라 불리는 메마른 언덕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성지를 탈환한 이래 88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올린 예루살렘 왕국의 가용 병력 전체가 단 하루 만에 전멸하고, 기독교 세계의 가장 신성한 유물인 '성 십자가'를 상실하며, 결국 성도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이어진 '국가적 파멸'의 서곡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나병왕'이라 불린 보두앵 4세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는 한센병으로 인해 신체가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자신보다 20배나 많은 살라흐 앗 딘(살라딘)의 대군을 격파하는 기적을 일궈냈습니다. 

그는 냉철한 현실 감각으로 왕국의 국력 부족을 인지하고 살라딘과 휴전 협정을 유지하며 아슬아슬한 평화를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1185년 그가 24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왕국을 지탱하던 정신적 지주가 사라졌고 지도부 내부에는 오만과 분열이라는 독소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왜 하틴에서의 선택이 파멸을 불렀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의 통합과 십자군 내부의 자중지란, 그리고 환경적 변수를 무시한 오판이 어떻게 거대한 역사의 폭풍을 불러왔는지 그 인과관계를 심층 분석할 것입니다. 

이제 평화가 깨지고 거대한 폭풍이 몰려오게 된 근본적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살라딘 상상화


2. 거대한 포위망: 살라흐 앗 딘의 아이유브 제국 성립

십자군 국가들이 직면한 가장 큰 외부적 위협은 이슬람 세계의 '분열에서 통합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1174년 누르 앗 딘이 사망한 후, 그의 가신이었던 쿠르드 출신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즉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까지 통합하며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했습니다.

살라딘은 단순히 무력으로 영토를 넓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도의 외교 전략을 통해 예루살렘 왕국을 지정학적으로 완전히 고립시켰습니다.


구분
살라흐 앗 딘 이전 (분열된 이슬람)
살라흐 앗 딘 이후 (통합된 이슬람)
정치 구조
여러 아미르와 장기 왕조, 파티마 왕조 등으로 파편화
아이유브 왕조 아래 이집트와 시리아가 단일 체제로 통합
대(對) 십자군 전략
각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른 개별 대응 및 내분
'지하드(성전)'라는 대의명분 아래 결집된 총력전 전개
지정학적 위치
남북으로 나뉘어 십자군 국가에 위협이 분산됨
예루살렘 왕국을 반원형으로 둘러싸는 거대 포위망 형성
주변국 외교
내부 투쟁으로 주변 세력과 갈등 관계 유지
아바스 칼리파의 공식 지지 획득 및 룸 셀주크, 무와히드 왕조 등과 우호/동맹 유지


노란색이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


살라딘은 동쪽으로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를 종교적으로 받들며 정통성을 확보했고, 북쪽의 룸 셀주크와 서쪽의 무와히드 왕조와는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며 외교적 안정을 꾀했습니다. 

이로 인해 십자군 국가들은 주변의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전략적 섬'이 되었습니다. 

살라딘은 자신의 제국을 지탱하는 아미르들이 가을 수확기를 앞두고 이탈할 것을 우려해 속전속결을 원하고 있었으며, 이 조급함은 오히려 십자군을 유인하는 치밀한 함정으로 승화되었습니다.


3. 파멸의 도화선: 르노 드 샤티용의 휴전 협정 위반

전략적 고립 상태에서 왕국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은 휴전 협정을 철저히 지키며 시간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케락의 영주 르노 드 샤티용(Renaud de Châtillon)은 이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린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왕국을 파멸로 이끈 '폭주하는 전차'와 같았습니다.


르노의 무모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광기 어린 과거를 보아야 합니다. 

그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콩스탕스(Constance)와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결혼하며 권력을 쥐었습니다. 

이를 반대한 총대주교 아모리 드 리모주(Aimery of Limoges)를 납치해 벌거벗긴 뒤, 몸에 꿀을 발라 파리가 들끓는 성벽 위에 묶어두는 고문을 가할 정도로 잔인하고 오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오만함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동로마 제국이 약속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같은 기독교 영지인 키프로스를 무자비하게 약탈했습니다. 

하지만 이 '양아치' 같은 행각이 그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17년의 지옥, 알레포의 감옥: 1160년, 약탈품을 챙겨 복귀하던 르노는 습격해온 무슬림 군대(장기 왕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는 이슬람 세력의 중심지인 알레포(Aleppo)의 지하 감옥에 무려 17년 동안 갇히게 됩니다.

젊은 시절의 전부를 이교도의 감옥에서 보낸 르노에게 그 17년은 반성이 아닌, 복수심을 배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가 이슬람이라는 존재 자체 때문이라 믿게 되었고, 석방된 후에는 "이슬람의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광적인 신념을 가진 괴물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결국 이 뒤틀린 복수심은 그를 '국가적 자살 행위'로 몰아넣었습니다.


알레포 에 투옥된 르노 드 샤티용


• 이슬람 상단(카라반) 습격: 보두앵 4세가 맺은 휴전 협정을 무시하고 이집트와 다마스쿠스를 오가는 상단을 습격해 민간인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살라딘의 항의에 국왕이 사과를 명령했으나 르노는 "내 성의 주인은 나다"라며 오만하게 거절했습니다.

• 성지 메카와 메디나 위협: 아카바 항구에서 선단을 동원해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 근처까지 진출하여 해적질을 감행했습니다. 

이는 살라딘이 흩어져 있던 이슬람 세력을 '지하드'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어주는 결정적인 종교적 명분이 되었습니다.

• 살라딘의 누이 습격: 1186년, 르노는 살라딘의 누이가 포함된 상단을 다시 습격하여 그녀를 살해(또는 구금)했습니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살라딘은 "쿠란에 맹세코 저놈의 목을 직접 치겠다"고 선언하며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르노의 도발은 단순한 약탈을 넘어 이슬람의 심장을 겨냥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는 홍해를 건너 메카를 공격하려 할 때 "무함마드의 무덤을 파헤쳐 그 유해를 파리떼에게 던져주겠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불길처럼 번졌습니다. 

온건파였던 아미르들조차 "십자군과는 공존할 수 없다"며 등을 돌렸고, 살라딘은 이 분노를 동력 삼아 흩어진 칼리프 체제를 자신의 깃발 아래 집결시켰습니다. 

르노의 오만함이 살라딘에게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대체 불가능한 왕관을 씌워준 셈입니다.

그는 살라딘에게 전쟁을 벌일 '도덕적 정당성'을 선물했고, 파편화되어 있던 이슬람 군주들을 하나로 결집하게 했습니다.


4. 모래 위의 성: 예루살렘 왕국의 분열과 계승 위기

외부의 적이 명분을 얻은 사이, 왕국 내부는 지도권 다툼으로 자정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보두앵 4세와 어린 보두앵 5세의 연이은 죽음 이후 발생한 권력 투쟁은 왕국을 '궁정파'와 '귀족파'로 양분했습니다.

•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 왕당파/궁정파): 푸아투 출신의 신참 귀족으로, 보두앵 4세의 누이 시빌라와 결혼하며 권력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현지 귀족들과의 갈등이 심했고, 1183년 살라딘의 침공 당시 소극적인 방어로 '무능한 비겁자'라는 낙인이 찍힌 트라우마를 안고 있었습니다.

• 트리폴리의 레몽 3세(Raymond III - 귀족파): 오랜 경험을 가진 현실주의자 영주로, 살라딘의 세력을 인정하고 신중한 전략을 고수했습니다.


기 드 뤼지냥은 정통성이 부족했기에 르노 드 샤티용과 성전기사단장 제라르 드 리드포르 같은 강경파의 지지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제라르는 과거 레몽 3세와의 개인적인 원한(결혼 관련 분쟁)으로 인해 사사건건 그를 배신자로 몰아붙였습니다. 

이러한 내부 구조는 합리적인 조언이 '비겁'으로 치부되는 광기 어린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5. 치명적인 함정: 티베리아스 포위와 출병 결정

1187년 7월, 살라딘은 십자군을 수원이 풍부한 세포리아(사포리에) 요새에서 끌어내기 위해 치밀한 덫을 놓았습니다. 

그는 레몽 3세의 영지인 티베리아스를 공격하여 레몽의 아내 에시바 백작부인이 있는 내성을 포위했습니다.


7월 2일 밤, 십자군 군사 회의에서 역사는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 레몽 3세의 수성론: "내 아내와 영지를 잃더라도 주력군을 사지로 몰아서는 안 된다. 살라딘은 곧 보급 문제로 물러날 것이니, 우리는 물이 풍부한 이곳에서 버텨야 한다." 

이는 과거 보두앵 4세가 성공시켰던 검증된 전략이었습니다.

• 르노와 제라르의 주전론: "자신의 아내를 버리자는 자의 말을 듣지 마라. 레몽은 겁쟁이이자 무슬림과 내통하는 배신자다! 기독교 왕이 기사도를 저버리고 출병하지 않는 것은 수치다."

기 드 뤼지냥은 제라르의 심리적 압박과 과거 1183년에 겪었던 '비겁자' 낙인에 대한 공포에 굴복했습니다. 

그는 새벽 늦게 레몽의 조언을 뒤집고 전군에 진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지도자의 정치적 정통성 부재가 군사적 참사로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6. 갈증과 불길: 하틴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군

7월의 타오르는 태양 아래, 2만 명의 십자군(기사 1,200기, 맨앳암즈 3,000명, 보병 15,000명, 투르코폴 500기)은 사막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하틴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의 지도.


1. 7월 3일 오전: 세포리아 출발. 살라딘의 궁기병들이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끊임없는 화살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중갑옷을 입은 십자군은 싸우지도 못한 채 체력만 소진했습니다.

2. 7월 3일 오후: 살라딘은 십자군이 갈 길의 모든 우물을 선점하거나 메워버렸습니다. 

탈수 증세로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십자군 기사들은 전신을 감싸는 사슬 갑옷 위에 겉옷(서코트)을 입고 있었습니다. 

대낮의 태양 아래 이 철갑은 거대한 달궈진 프라이팬처럼 변했습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지만 마실 물은 없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일부 병사들은 갈증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말(馬)을 죽여 피를 마시거나, 심지어 땅의 흙을 파서 입에 넣기도 했습니다. 

반면 살라딘의 군대는 낙타 수천 마리를 동원해 인근 호수에서 끊임없이 신선한 물을 실어 나르며, 십자군이 보는 앞에서 그 물을 모래에 쏟아버리는 심리전을 병행했습니다. 

아군에게는 지옥의 불길이, 적군에게는 차가운 생명수가 흐르는 잔혹한 풍경이었습니다.

3. 7월 3일 밤: 십자군은 물에 도달하지 못한 채 하틴의 뿔 근처 고원에서 야영했습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으나, 그 적막을 깨는 것은 살라딘 군대의 승전가와 코란 낭송 소리였습니다. 

살라딘은 밤새 십자군 진영 주변의 마른 풀에 불을 질렀습니다. 

매캐한 연기와 열기가 갈증에 지친 병사들을 질식시켰고,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불꽃은 기사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무슬림 군사들은 일부러 십자군이 들으라는 듯 수레 가득 실어온 물을 모래바닥에 쏟아버리며 그들의 정신을 처절하게 짓밟았습니다.

4. 7월 4일 새벽: 아침이 밝자 십자군의 눈앞에는 푸른 갈릴리 호수의 신기루가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은 완벽한 반원형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살라딘의 대군이었습니다.


살라딘에게 항복한 기 드 뤼지냥


7. 하틴의 뿔: 왕국의 붕괴와 참혹한 결과

전투는 사실상 시작되기도 전에 결판이 나 있었습니다. 

갈증으로 미쳐버린 보병들이 대열을 이탈해 호수로 달려가다 학살당했고, 고립된 기사들은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언덕 위에서 최후의 돌격을 감행했으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 가용 병력 전멸: 2만 명 중 살아남은 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왕국의 성을 지킬 모든 남자가 이곳에서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 성 십자가(True Cross) 상실: 이 유물은 단순히 종교적 상징을 넘어, 십자군에게는 군대의 치명성(Lethality)을 극대화하는 '전투력 증폭기(Combat Multiplier)'였습니다. 

이를 빼앗긴 것은 기독교 군대의 정신적 척추가 꺾였음을 의미했습니다.

전투의 막바지, 성 십자가를 지키던 아크레의 주교가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기독교 군대의 대열은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무슬림 전사들이 이 황금 십자가를 탈취해 높이 치켜들었을 때, 언덕 위의 십자군 기사들은 통곡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이 지형은 본래 예수께서 '산상수훈(행복에 관한 설교)'을 내린 평화의 장소였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가장 자비로운 땅이 가장 잔혹한 도살장으로 변해버린 이 역설은, 유럽 기독교 세계에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불타는 복수심을 심어주었습니다.


성십자가를 탈취하는 이슬람 전사들.


• 살라딘의 심판: 살라딘은 포로가 된 기 드 뤼지냥에게 귀한 얼음물을 건네며 "왕은 왕을 죽이지 않는다"는 관습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기가 그 물을 르노에게 건네자 살라딘은 "이 물은 내가 준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뒤, 직접 칼을 휘둘러 르노를 처단함으로써 자신의 맹세를 지켰습니다. 

성전기사단원들은 개종을 거부하자 전원 참수되었습니다.


살라딘이 기독교 포로들의 처형을 명령하고 있다.


8. 무너진 성지: 예루살렘 함락과 살라딘의 자비

야전군이 사라진 예루살렘 왕국의 성들은 주인 없는 집과 같았습니다. 

살라딘은 아크레, 야파, 베이루트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습니다.

이때 왕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은 이벨린의 발리앙이었습니다. 

그는 수비대를 조직해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였고, 결국 살라딘과 협상을 이끌어냈습니다.

• 대조적인 점령사: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거리가 피바다가 될 정도로 학살을 자행했던 것과 달리, 살라딘은 평화적인 항복을 수용했습니다.

• 자비의 재해석: 살라딘의 자비는 순수한 관용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민들에게 몸값을 받는 '비즈니스적 측면'을 유지했으며, 실제로 몸값을 내지 못한 가난한 이들은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또한 아랍 기록(이마드 앗 딘)에 따르면 점령 과정에서 여성들에 대한 병사들의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하여, 그의 자비가 완전한 무결점은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


하틴 전투(1187년) 전후 상황 비교

구분
하틴 전투 이전 (1187년 초)
하틴 전투 이후 (1187년 말)
예루살렘 점유
기독교 (예루살렘 왕국)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
주요 요충지
아크레, 야파, 베이루트 등 확보 
대부분 살라딘에게 함락
상징물
성 십자가(True Cross) 보유
성 십자가 분실 및 모욕


1193년의 아이유브 왕국


9. 유럽의 각성: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발

성지 함락 소식은 유럽을 거대한 충격과 분노에 빠뜨렸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3세가 이 소식을 듣고 급사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파급력은 대단했습니다. 

유럽은 즉각 '살라딘 세'를 징수하며 대대적인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1.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강한 육군을 이끌고 진격했으나 소아시아의 강에서 익사(또는 심장마비)하며 원정의 동력을 잃었습니다.

2. 필립 2세: 프랑스의 왕. 아크레 탈환 후 리처드 1세와의 주도권 다툼 및 국내 문제로 귀국했습니다.

3. 리처드 1세(사자심왕): 영국의 왕. 하틴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가장 열성적으로 싸웠으며, 살라딘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설적인 대결을 펼쳤습니다.


하틴에서 르노 드 샤티용이 뿌린 피와 기 드 뤼지냥의 무능함은 역설적으로 유럽 최고의 전사인 리처드 1세(잉글랜드 국왕)를 성지로 불러들였습니다. 

이제 전쟁은 단순히 땅을 뺏고 뺏기는 싸움을 넘어, 중세 기사도의 정점에 선 '사자심왕'과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라는 두 거인의 자존심 대결로 치닫습니다. 

하틴의 뿔에서 타올랐던 불길은 꺼졌지만, 그 재 위에서 십자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사시인 제3차 원정의 막이 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틴의 참패는 유럽 전역의 총동원령을 이끌어냈으며, 십자군 전쟁의 양상을 단순한 영토 분쟁에서 두 문명권의 자존심을 건 거대한 서사시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자심왕 리처드 1세


10. 하틴 전투가 남긴 역사적 교훈

오늘날 우리가 하틴 전투의 비극에서 배워야 할 핵심 인사이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통합된 적 앞에서의 내부 분열은 파멸로 가는 고속도로다: 살라딘이 외교적, 종교적으로 이슬람을 하나로 묶는 동안 십자군은 사소한 명예와 권력을 위해 서로를 '비겁자'라 비난했습니다.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법입니다.

2. 지형과 기후라는 물리적 상수를 무시한 전략은 오만이다: 물이 없는 사막으로 2만 대군을 행군시킨 결정은 전략적 무지를 넘어선 광기였습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조직은 싸우기도 전에 무너집니다.

3. 정당성 없는 도발은 적에게 강력한 승리의 명분을 제공한다: 르노의 무분별한 도발은 흩어져 있던 적들을 '성전'이라는 기치 아래 하나로 묶어준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명분 없는 행동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옵니다.


역사의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과거의 복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의 선택이 미래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예측하게 하는 통찰의 눈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하틴의 비극은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가 내린 오만한 결정'이 어떻게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뼈아픈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1차 사료와 현대 역사 연구를 바탕으로 구성된 분석 글입니다.

다만 중세 사료의 특성상 해석이 갈리거나 전승에 가까운 내용도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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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토론 역시 환영합니다.

건설적인 비판과 토론은 이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The Battle of Hattin in 1187 marked the decisive collapse of the Crusader Kingdom of Jerusalem. 

After decades of fragile survival, the kingdom faced a unified Islamic world under Saladin, who had consolidated Egypt and Syria into the Ayyubid state. 

Internally weakened by factionalism, poor leadership, and reckless provocation, the Crusader elite failed to recognize their strategic vulnerability.

The immediate catalyst was the repeated violation of truces by Reynald of Châtillon, whose attacks on Muslim caravans and threats against Islamic holy sites gave Saladin an unquestionable moral justification for jihad. 

As political legitimacy eroded, King Guy of Lusignan succumbed to pressure from radical factions and abandoned a defensible position with access to water, marching instead into arid terrain under the midsummer sun.

Saladin exploited terrain, climate, and logistics with precision. 

By denying water, harassing the Crusader army with mounted archers, and setting fire to dry grass, he shattered their cohesion before battle truly began. 

The Crusader army was annihilated at the Horns of Hattin, the relic of the True Cross was captured, and Jerusalem was left defenseless.

The fall of Jerusalem followed swiftly, reshaping the balance of power in the eastern Mediterranean and triggering the Third Crusade. 

Hattin stands as a historical lesson in how internal division, strategic arrogance, and moral miscalculation can bring about the sudden destruction of a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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