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1. 암흑의 세기를 끝낸 사비오르(Savior)의 등장
- 2. 오토 왕조의 기원과 권력의 수성: 하인리히 1세에서 936년 대관식까지
- 3. 레히펠트 전투(955): 유럽의 방패이자 기독교의 수호자
- 4. 제국과 교회의 결합: 오토의 제국 교회 체제(Imperial Church System)
- 5. 962년 황제 즉위와 이탈리아 정책: 로마 제국의 부활
- 6. 비잔틴 제국과의 외교와 제국의 완성
- 7. 오토 르네상스(Ottonian Renaissance): 로마와 비잔틴의 시각적 융합
- 8. 결론 및 현대적 재평가: 유럽 문명의 설계자 오토 1세
유럽의 재건과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오토 1세와 오토 왕조의 대서사시
1. 암흑의 세기를 끝낸 사비오르(Savior)의 등장
서구 문명의 연대기에서 10세기는 흔히 ‘철의 시대(Age of Iron)’ 혹은 ‘사쿨룸 옵스쿠룸(Saeculum Obscurum, 암흑의 세기)’으로 규정된다.
위대한 샤를마뉴가 구축했던 카롤링거 제국의 거대한 질서는 분열과 쇠퇴의 늪으로 침잠해 있었고, 유럽 대륙은 그야말로 실존적 붕괴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조각난 제국은 형제들 간의 골육상쟁으로 피폐해졌으며, 그 공백을 틈타 외부의 가공할 위협들이 기독교 세계의 심장부를 겨누고 있었다.
북방에서는 바이킹의 롱쉽이 강줄기를 타고 내륙을 유린했고, 남방에서는 사라센의 습격이 지중해 연안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동방의 지평선 너머에서 왔다.
‘유럽의 재앙’이라 불린 마자르족(헝가리인)의 유목 기마 군단은 전례 없는 기동력으로 독일과 이탈리아, 심지어 프랑스 내륙까지 불태우며 문명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 시기 독일 왕국은 명목상의 통일체일 뿐, 실제로는 각지의 부족 공작(Stammesherzog)들이 할거하는 봉건적 파편화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로트링겐으로 나뉜 이 거대한 부족들은 국왕의 권위보다는 자신들의 가문적 이익을 우선시했다.
국왕은 ‘동등한 자들 중의 제1자(Primus inter pares)’에 불과했으며, 외침에 공동으로 대응할 중앙 집권적 군사 체계는 고사하고 내전의 불씨조차 끄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였다.
문명의 등불이 꺼져가던 이 혼돈의 정점에서, 작센 가문의 오토 1세(Otto I)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오토 1세의 등장은 단순히 한 왕조의 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붕괴하던 서구 기독교 문명을 재건하고, 훗날 천 년을 이어갈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틀을 형성하는 문명사적 변곡점이었다.
그는 부친 하인리히 1세가 닦아놓은 기초 위에서, 분열된 부족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어세우고 외부의 위협을 섬멸함으로써 유럽 공동체의 설계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 서술할 대서사시는 작센의 거친 들판에서 시작되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그리고 비잔티움의 화려한 궁정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운명을 바꾼 한 위대한 군주의 발자취를 추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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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 1세 상상화 |
2. 오토 왕조의 기원과 권력의 수성: 하인리히 1세에서 936년 대관식까지
오토 1세가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은 그의 부친인 ‘포수왕’ 하인리히 1세(Henry the Fowler)의 독특한 통치 철학에서 기원한다.
919년 프리츨라르 공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된 하인리히 1세는 카롤링거 왕조의 권위가 소멸한 자리에 ‘우호 조약(Amicitia)’이라는 새로운 통치 모델을 도입했다.
그는 공작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기보다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상호 합의에 기반한 연합체 형식을 취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으나, 왕권의 본질적인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936년 7월 2일, 하인리히 1세가 멤레벤에서 붕어하자, 그의 장남 오토 1세는 즉각적인 권력 승계에 착수했다.
당시 24세였던 오토는 부친의 조심스러운 행보와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936년 8월 7일, 샤를마뉴의 도시 아헨(Aachen)에서 거행된 대관식을 통해 자신의 통치 이념을 만천하에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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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헨 대성당 에 있는 샤를마뉴의 왕좌 |
코파이이의 비두킨트(Widukind of Corvey)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오토는 의도적으로 작센의 전통 복장이 아닌 프랑크 왕실의 복장을 착용하고 샤를마뉴의 옥좌에 앉았다.
마인츠 대주교 힐데베르트가 주관한 이 예식에서 오토는 성유 축성을 받으며 자신의 권력이 인간의 합의가 아닌 ‘신의 은총(Dei Gratia)’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사실 '오토(Otto)'라는 이름 자체가 제국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 이름은 고대 고지 독일어 '오도(Odo)'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부유함, 유산)을 뜻한다.
작센의 거친 변방에서 자라난 그에게 이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닌, 잃어버린 카롤링거의 유산을 되찾으라는 숙명과도 같았다.
훗날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대관식 직후 아버지 하인리히 1세가 사냥터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던 소박한 일화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길을 열었고, 나는 그 길 끝에 성을 쌓을 것이다."
오토는 작센인 특유의 투박함을 버리고, 샤를마뉴의 후계자라는 정체성을 입기 위해 평생을 라틴어 공부와 의전 습득에 매진했다.
사실 그는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에 가까운 무사였으나, 제국의 주인은 칼뿐만 아니라 지성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늦은 나이에 라틴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전장에서도 고전문헌을 놓지 않았던 이 고집스러운 열정은 훗날 ‘오토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내면적 성장은 곧 대외적인 위엄으로 드러났고, 그 집념이 가장 노골적으로 투영된 장면이 바로 대관식 이후 열린 화려한 연회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연회에서 네 명의 부족 공작들이 자발적이든 강압적이든 수행해야 했던 역할이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마부(marshal), 슈바벤의 헤르만은 술잔을 올리는 자(cupbearer), 프랑켄의 에버하르트는 식사 시중(steward), 로트링겐의 길베르트는 시종(chamberlain) 역할을 맡았다.
비두킨트는 이를 두고 “공작들이 국왕의 개인적인 수행원이 됨으로써 그들의 복종을 시각적으로 증명했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굴복은 곧바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서막이 되었다.
오토가 부친의 ‘아미치티아’ 모델을 폐기하고 중앙 집권적 왕권을 강화하려 하자, 부족 공작들과 심지어 그의 혈육들까지 반란의 기치를 들었다.
938년 이복형 탕크마르(Thankmar)의 반란을 시작으로, 친동생 하인리히와 사위 콘라트까지 왕위를 노리며 제국의 근간을 흔들었다.
비극의 정점은 오토의 적장자이자 슈바벤 공작인 루돌프(Liudolf)였다.
그는 아버지의 재혼으로 자신의 후계자 지위가 위태로워지자 반기를 들었고, 제국은 유례없는 부자(父子) 간의 전쟁터로 변했다.
하지만 954년, 마자르족이 이 틈을 타 대침공을 감행하자 민심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외세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사며 명분을 잃은 루돌프는 결국 954년 10월, 랑겐첸에서 맨발로 아버지 앞에 나타나 땅에 엎드렸다.
오토는 차가운 눈빛으로 아들의 무릎 꿇기를 지켜보며 반란의 시대를 종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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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 1세 앞에 절하는 루돌프, 954년경 |
혈육의 배신이라는 처절한 시련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권력의 중앙집중화라는 ‘전략적 차별점’을 확보한 오토는, 이제 유럽 전체의 실존적 위협인 외부의 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토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전사가 아니었다.
그는 보급과 병참의 귀재였다.
부친이 시작한 '성채 건설 정책'을 극대화하여 동부 국경 전역에 거점 요새(Burgward)를 촘촘히 박아 넣었다.
이곳은 유사시 인근 농민들의 피난처이자, 중기병 군단의 병참 기지가 되었다.
그는 말했다.
"준비되지 않은 용맹은 개죽음일 뿐이다."
오토는 각 부족 공작들에게 기사 징집 명부를 요구했다.
말의 상태, 갑옷의 두께까지 점검하는 정밀한 행정력이 동원됐다.
954년 루돌프의 항복으로 마침내 하나로 뭉친 독일 전역의 8,000명 기사들은, 사실상 오토가 20년간 갈고 닦은 '정밀한 전쟁 기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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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4년 헝가리의 유럽 전역 침략 |
3. 레히펠트 전투(955): 유럽의 방패이자 기독교의 수호자
955년 8월 10일, 아우크스부르크 인근의 레히 강 유역에서 벌어진 레히펠트 전투(Battle of Lechfeld)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기독교 문명의 생사를 결정짓는 성전(聖戰)이었다.
당시 마자르족은 약 1만 명에 달하는 궁기병 군단을 앞세워 독일 남부를 침공했다.
그들은 유목 민족 특유의 ‘스웜 전술(Swarm Tactics)’, 즉 원거리에서 화살을 쏟아붓고 아군이 흩어지면 각개격파하는 전술로 수십 년간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오토 1세는 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하인리히 1세 시절부터 준비해 온 ‘종심 방어 체계(Deep Defense System)’를 가동했다.
그는 국경 지대의 성채들을 요새화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차출된 약 8,000명의 중기병을 8개 군단(Legio)으로 편성했다.
여기에는 작센, 바이에른, 프랑켄, 슈바벤뿐만 아니라 보헤미아 공작 볼레슬라프 1세가 보낸 1,000명의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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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타자르 리프가 1744년에 그린 프레스코화, 레흐펠트 전투 |
전투의 양상은 극적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하고 있던 마자르군은 오토의 접근 소식을 듣고 포위를 푼 뒤, 독일군의 후방을 기습했다.
8월 10일 아침, 마자르 궁기병들은 독일군의 보급대와 후방의 보헤미아 군단을 급습하여 궤멸시키고 약탈에 열을 올렸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오토는 사위인 로트링겐 공작 콘라트(Conrad the Red)에게 반격을 명령했다.
콘라트의 중기병들은 약탈에 정신이 팔려 있던 마자르군을 강타하여 후방을 탈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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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흐펠트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어가는 콘라트 |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자, 오토는 직접 군의 선두에 섰다.
오토의 손에는 검 대신 빛나는 창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보물(Reichskleinodien) 중 가장 신성시되는 '성스러운 창(Holy Lance)'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이 창은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이라 믿어졌으며, 오토는 이 유물을 높이 들어 올리며 병사들에게 기독교 수호자로서의 사명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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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 로마제국의 성스러운 창 |
이러한 영적 고취 속에 시작된 본격적인 주력군 간의 격돌에서, 오토는 기동성보다는 밀집된 중기병의 충격력을 선택했다.
독일 중기병들은 마자르족의 화살 비를 뚫고 돌격하여 근접전(Melee)으로 유도했다.
유목 기민들에게 근접전은 죽음의 덫이었다.
중기갑으로 무장한 독일 기사들의 칼날 아래 마자르의 경기병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비두킨트는 “적군은 공포에 질려 도주했으며, 레히 강은 적의 시체로 가득 차 핏빛으로 물들었다”라고 증언했다.
마자르의 지도자 불추(Bulcsú), 렐(Lehel), 수르(Súr)는 생포되어 레겐스부르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투가 끝난 직후, 전장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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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5년 레겐스부르크에서 불추(Bulcsú)가 처형되는 모습 |
병사들은 승리에 도취하여 방패를 두드리며 오토를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이자 ‘황제(Imperator)’로 추대했다.
이는 교황의 대관식이 있기 7년 전, 이미 군대와 인민이 그를 유럽의 최고 지도자로 승인했음을 의미한다.
레히펠트의 승리는 마자르족을 정주 민족으로 변화시켜 훗날 헝가리 왕국을 탄생시키는 문명사적 결과를 낳았고, 오토에게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황관을 차지할 수 있는 압도적인 도덕적, 군사적 명분을 부여했다.
이제 오토는 ‘유럽의 방패’라는 지위를 확고히 하며, 제국의 내면적 구조를 다지는 작업에 착수했다.
4. 제국과 교회의 결합: 오토의 제국 교회 체제(Imperial Church System)
오토 1세는 세속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란과 세습적 권력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 인류 역사상 가장 독특한 통치 메커니즘 중 하나인 ‘제국 교회 체제(Reichskirchensystem)’를 고안했다.
이는 세속적인 봉건 질서 속에 성직자들을 국가 행정의 핵심 관료로 편입시키는 전략적 혁신이었다.
오토는 주교와 수도원장들에게 광대한 토지와 함께 백작(Graf)의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세금 징수권, 시장 개설권, 화폐 주조권, 그리고 독자적인 군대를 유지할 실질적인 통치권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혜택의 이면에는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독신이었기에 자식에게 영지를 물려줄 수 없었고, 주교가 사망하면 그가 통치하던 봉토와 권력은 자동으로 국왕에게 회수되었다.
오토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인물을 그 자리에 임명함으로써 세습 귀족의 발호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국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비세습적 관료 집단’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 체제의 상징적 인물은 오토의 막내동생인 쾰른 대주교 브루노(Bruno the Great)였다.
브루노는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로트링겐 공작직을 겸임하며 제국의 행정과 교육, 문화를 총괄하는 ‘제국의 부왕’ 역할을 수행했다.
오토는 브루노와 같은 충성스러운 성직자들을 통해 ‘신의 은총에 의한 왕권’ 개념을 확립해 나갔다.
왕은 이제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지상에서 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대리인으로 격상되었다.
하지만 오토는 이 체제를 단순히 내부 결속 도구로만 쓰지 않았다.
그는 교회의 힘을 문명의 불모지였던 엘베강 동쪽, 즉 슬라브족의 영역으로 기독교 세계를 확장하는 (동방 선교)의 기치로 삼았다.
그 중심에는 그가 가장 사랑한 도시 마그데부르크(Magdeburg)가 있었다.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불가능해 보였던 승리를 거둔 후,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도 이곳이었다.
그는 승전의 영광을 신에게 돌리며 마그데부르크를 동방 선교의 총본산이자 제국의 영적 수도로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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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브족과 벤드족을 정복한 오토 1세가 마그데부르크 시에 입성하는 모습 |
그는 이곳에 대주교구를 설치해 슬라브인들을 개종시키는 전초 기지로 활용했는데, 이는 훗날 독일의 동부 식민 운동인 '오스트지들룽(Ostsiedlung)'의 시초가 되었다.
칼로는 땅을 정복하고 십자가로는 영혼을 정복하는 오토식 '양면 전략'의 정수였으며, 오늘날의 폴란드와 체코가 서구 기독교 문명권에 편입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 혁신적인 체제는 당대 왕권을 강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였으나, 필연적인 부작용을 동시에 잉태하고 있었다.
국왕이 성직 임명권(Investiture)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게 되면서 영적 자질보다는 정치적 충성도가 임명의 기준이 되었고, 이는 성직 매매(Simony)의 온상이 되어 교회의 영적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훗날 헨리 4세와 그레고리오 7세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서임권 투쟁’의 비극적 씨앗이 바로 이곳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세기의 오토에게 교회는 제국을 지탱하는 가장 견고한 기둥이었다.
그는 이 강력한 내부 결속력을 바탕으로, 이제 로마와 교황청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로 진입할 모든 준비를 마쳤다.
5. 962년 황제 즉위와 이탈리아 정책: 로마 제국의 부활
962년 2월 2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기는 장엄한 찬송가로 가득 찼다.
오토 1세의 황제 대관식은 카롤링거 제국의 부활을 넘어, 독일과 이탈리아를 결합한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 토대를 마련한 역사적 분수령이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왕관의 이면에는 한 여인의 극적인 구원 요청과 오토의 치밀한 정치적 결단이 숨어 있었다.
사건의 서막은 부르고뉴의 공주이자 이탈리아의 왕비였던 아델라이드(Adelaide)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남편 로타르 2세가 독살당한 뒤, 왕위를 찬탈한 베렝가리오 2세에 의해 가르다 호수의 성에 유폐되었다.
951년, 성을 탈출한 그녀가 오토에게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오토는 이를 단순한 기사도적 선행이 아닌 '천재일우의 기회'로 포착했다.
오토는 즉각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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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원정 중 알프스를 넘는 모습 |
베렝가리오를 축출한 그는 승리자로서 아델라이드와 결혼했다.
이때 이탈리아의 실권자 베렝가리오 2세와 그의 아들 아달베르트(Adalbert)는 오토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오토는 그들을 죽이는 대신 자신의 봉신(Vassal)으로 삼아 이탈리아의 통치를 맡기고 독일로 회군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판이었다.
오토가 알프스를 넘어가자마자 베렝가리오 부자는 충성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던졌고,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교황청의 영토를 침공하며 로마를 노골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960년, 베렝가리오 부자의 군대에 포위될 위기에 처한 교황 요한 12세가 절박한 비명을 지르듯 오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배신자 부자를 처단해달라는 교황의 요청은 오토에게 황제의 관을 쓸 수 있는 완벽한 법적·종교적 명분이 되었다.
961년 다시 이탈리아로 내려온 오토는 파비아에서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한 뒤 곧장 로마로 진격했다.
대관식 날, 오토와 아델라이드는 나란히 기름 부음을 받으며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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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고뉴의 아델라이드 |
직후 체결된 ‘오토의 특권(Diploma Ottonianum)’은 제국과 교회의 관계를 규정한 결정적 문서였다.
오토는 교황령의 영토를 보장하는 대신, 선출된 교황이 축성 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관철시켰다.
이는 제국이 교회의 영적 권위 위에 있음을 법적으로 확립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밀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리우트프란트(크레모나의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요한 12세는 오토의 강력한 통제에 위협을 느끼고 마자르족 및 비잔틴과 결탁하여 황제를 배신했다.
분노한 오토는 즉각 로마로 회군하여 시노드(Synod: 교회 법정 성격의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리우트프란트는 이 시노드에서 요한 12세가 간음, 살인, 심지어 악마에게 축배를 든 죄목으로 기소되었다고 전한다.
결국 오토는 요한 12세를 폐위하고 레오 8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했다.
이후 로마인들이 자의적으로 선출한 베네딕토 5세까지 무력으로 굴복시키며, 오토는 명실상부한 로마의 주인으로 우뚝 섰다.
교황권을 장악하여 보편적 정당성을 완성한 오토의 시선은 이제 지중해 너머, 동쪽의 또 다른 제국인 비잔틴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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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3년 로마 의회에 참석한 오토 대제 |
6. 비잔틴 제국과의 외교와 제국의 완성
오토 1세에게 ‘황제’라는 칭호는 서방의 통치권을 넘어 로마 제국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정당성을 의미했다.
그러나 동방의 비잔틴 제국은 오토를 ‘야만인들의 왕’으로 치부하며 그의 황제 칭호를 인정하지 않았다.
두 제국 사이에는 이탈리아 남부의 영토권과 ‘황제(Basileus)’라는 칭호의 독점권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968년, 오토는 크레모나의 주교 리우트프란트를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다.
그러나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는 리우트프란트를 모욕적으로 대우했다.
리우트프란트는 자신의 저서 『보복(Antapodosis)』에서 비잔틴 궁정의 거만함과 자신에게 제공된 형편없는 음식, 그리고 오토를 ‘왕(Rex)’으로만 부르며 멸시한 비잔틴인들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외교적 결례는 곧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국경 분쟁으로 이어졌다.
전환점은 969년 비잔틴 내에서 발생했다.
니케포로스가 암살되고 요한 1세 치미스케스가 즉위하자 양측은 화해의 실마리를 찾았다.
972년, 오랜 협상 끝에 오토 1세의 아들 오토 2세와 비잔틴 황제의 조카딸인 테오파누(Theophanu)와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비록 비잔틴 측이 직계 공주를 보내는 것은 끝내 거부하며 자존심을 세웠으나, 비두킨트는 이 결혼이 서방 제국의 정당성을 비잔틴으로부터 공인받은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테오파누는 비잔틴의 화려한 예법과 문화, 학문을 서방으로 가져왔으며, 이는 오토 왕조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이로써 오토 1세의 제국은 군사적 힘과 종교적 정당성, 그리고 국제적인 승인을 모두 갖춘 명실상부한 유럽의 중심 세력으로 완성되었다.
7. 오토 르네상스(Ottonian Renaissance): 로마와 비잔틴의 시각적 융합
오토 1세의 치세 말기부터 그의 후계자들에 이르기까지, 제국 내에는 지적·예술적 부흥 운동인 오토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복제가 아니라, 로마의 고전적 엄격함과 비잔틴의 화려한 장식미, 그리고 게르만 특유의 역동성이 결합된 새로운 문명의 탄생이었다.
이 시기 예술의 특징은 ‘권위의 시각화’에 있었다.
오토 1세는 마그데부르크 대성당(Magdeburg Cathedral)을 건설하여 제국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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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
로마에서 직접 가져온 대리석 기둥들은 이 건물이 로마 제국의 진정한 계승자임을 웅변했다.
금속 공예와 채식 필사본 분야에서도 혁신이 일어났다.
‘게로 복음서(Gero Codex)’와 같은 작품들은 정교한 금박과 비잔틴풍의 인물 묘사를 통해 제국의 위엄을 종교적 예술로 승화시켰다.
지적 영역에서는 간더스하임 수도원의 수녀 흐로츠비타(Hrotsvitha)의 활동이 눈부셨다.
그녀는 로마 시인 테렌티우스의 형식을 빌려 기독교적 가치를 담은 희곡을 집필했는데, 이는 고전 문학이 중세 기독교 세계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다.
또한 브루노 대주교가 설립한 궁정 학교들은 유럽 각지의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암흑기 속에서도 학문의 등불을 지켜냈다.
제국은 이제 무력으로만 통치하는 야만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유럽 문명의 지적·예술적 정수를 담아내는 거대한 그릇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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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로츠비타가 오토 1세 황제에게 희극을 선보이는 모습 |
8. 결론 및 현대적 재평가: 유럽 문명의 설계자 오토 1세
과거의 근대 역사학계, 특히 민족주의적 사학자들은 오토 1세를 교회를 수단화하여 권력을 휘두른 강압적 전제 군주로 묘사하곤 했다.
그러나 데이비드 바크라흐(David Bachrach) 등 현대 사학자들은 오토 1세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파편화된 봉건 사회를 ‘합의’와 ‘시스템’으로 묶어세운 ‘유럽 공동체의 설계자’였다.
오토 1세의 공적은 명확한 데이터와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다.
그가 도입한 행정 조직과 군사 시스템은 로마와 카롤링거의 유산을 혁신적으로 계승한 것이었으며, 이는 13세기까지 독일이 유럽의 패권국으로 기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업적의 이면에는 한 시대를 짊어진 군주의 고독한 결단이 상존했다.
말년의 오토는 자주 마그데부르크의 대성당 창밖을 내다보며 회상에 잠기곤 했다.
형제를 베어야 했던 내전의 비극, 레히펠트의 핏빛 강물, 그리고 로마의 차가운 대리석 옥좌까지.
그는 측근들에게 나직이 읊조렸다.
"제국은 성벽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로 지탱되는 것이다."
그는 죽음을 직감한 순간에도 차기 황제 오토 2세에게 제국의 안녕을 당부하는 지침을 남겼다.
초인적인 의지로 암흑의 시대를 견뎌낸 노병의 마지막 임무였다.
이처럼 평생을 바쳐 유럽의 새벽을 연 오토는 973년 5월 7일, 자신이 제국의 기지로 삼았던 멤레벤에서 60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가장 사랑했던 도시 마그데부르크의 대성당으로 운구되어 첫 아내 이드기스의 곁에 안치되었다.

대제 오토 1세와 이드기스 황후의 조각상.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그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거대한 유산의 완성으로 기록되었다.
비두킨트는 그의 죽음을 두고 “태양이 지듯 위대한 군주가 사라졌으나, 그가 남긴 빛은 온 유럽을 비추고 있다”라고 술회했다.
이처럼 오토 1세가 남긴 제국의 기틀은 그를 단순한 군주를 넘어 '대제(The Great)'의 반열에 올렸다.
사후 12세기경부터 역사가들은 그를 샤를마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토 대제'로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붕괴 직전의 서구 문명을 재건하고 로마와 게르만, 기독교를 하나의 용광로에 녹여낸 설계자로서의 경의였다.
이 견고한 보편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중세 유럽의 근간이 되었다.
그는 진정으로 ‘사쿨룸 옵스쿠룸’의 어둠을 걷어내고, 분열된 유럽에 질서와 문명의 이름으로 새로운 새벽을 가져다준 위대한 대제였다.
그의 마그데부르크 옥좌 아래 잠든 유산은 오늘날 통합된 유럽의 원형으로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글은 오토 1세와 오토 왕조의 형성을 다룬 정사(正史)와 1차 사료를 기반으로 한 역사 서사입니다.
《코르베이의 비두킨트》,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 등 동시대 기록과 현대 역사학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서술되었으며, 사건의 맥락과 인물의 선택을 보다 입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일부 장면과 표현은 서사적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연대, 인물 관계, 제도와 전투의 핵심 흐름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만, 개인의 심리 묘사나 발언, 상징적 장면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석적 서술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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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traces the rise of Otto I and the Ottonian dynasty as a decisive turning point in medieval European history.
In the aftermath of the Carolingian collapse, Europe faced political fragmentation, external invasions by Vikings, Saracens, and Magyars, and the erosion of central authority.
Otto I, inheriting the throne in 936, rejected the loose tribal consensus of his father Henry I and pursued strong centralized kingship grounded in divine legitimacy.
After suppressing internal revolts, Otto reorganized military logistics and fortified the eastern frontier, culminating in his decisive victory over the Magyars at the Battle of Lechfeld in 955.
This triumph secured Christian Europe and elevated Otto as the continent’s protector.
He further strengthened royal power through the Imperial Church System, transforming bishops into non-hereditary administrators loyal to the crown.
Crowned emperor in Rome in 962, Otto revived the Roman imperial ideal by binding Germany and Italy under a sacred monarchy.
Diplomatic marriage with Byzantium through Otto II and Theophanu finalized international recognition.
Otto’s reign also fostered cultural renewal known as the Ottonian Renaissance, blending Roman, Byzantine, and Germanic traditions.
His legacy reshaped Europe’s political, religious, and cultural foundations for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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