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제명 생애 정리: 친일 논란과 한국 양악의 탄생, 서울대 음대의 시작 (Hyun Jemyung)


한국 양악계의 대부 혹은 제국의 음악가: 현제명의 생애 요약서


1. '정치적 음악가' 현제명을 바라보는 두 시선

한국 근현대 음악사의 궤적을 쫓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가장 거대하면서도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현제명(玄濟明, 1903~1960)입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성악가, 작곡가, 교육자로서 불모지였던 조선 땅에 서양 음악의 기틀을 닦은 '대부'로 숭앙받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강점기 말기 제국의 전쟁 동원에 앞장선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는 준엄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본 글은 그를 단순한 예술가로 규정하기를 거부합니다. 

현제명은 시대의 조류를 읽는 탁월한 감각과 권력의 향방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정치적 음악가'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로디 현’이라는 서구 지향적 정체성에서 ‘쿠로야마 사이아키’라는 황국신민의 정체성으로, 그리고 다시 해방 공간의 ‘로디 현’으로 복귀하는 숨 가쁜 변신의 연속이었습니다. 

과연 그의 화려한 음악적 성취는 한국 양악의 소중한 자산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끝내 청산하지 못한 식민의 잔재입니까?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그의 이름이 바뀔 때마다 뒤틀렸던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입체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현제명


2. '로디 현(Rody Hyun)'의 탄생: 기독교적 배경과 미국 유학기 (1903~1929)

현제명의 출발점은 기독교 신앙과 서구 문물의 수용이 교차하는 지점이었습니다. 

1903년 대구 남산동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 ‘소돌’은 선교사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건반과 성악을 접했습니다. 

이는 훗날 그가 보여줄 '친서방적 정체성'의 근간이 됩니다.


2.1 교육적 성장과 유학 경로

그의 초기 음악적 성장은 철저히 기독교 학교라는 시스템 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 계성학교 입학 (1913): 대구의 기독교 명문에서 성가대 활동을 통해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서구적 감수성을 체득함.

2. 평양 숭실학교 진학 (1918): 당시 조선 양악의 메카였던 숭실에서 박태준, 김세형 등과 교류하며 지휘와 성악의 기초를 다짐. 1924년 숭실학교 대학부 졸업.

3. 로디히버(Homer Rodeheaver)와의 운명적 만남 (1923): 미국 복음 전도자 로디히버의 아시아 순회 집회 중 독창자로 발탁됨. 로디히버는 현제명을 미국으로 불러들여 '음악 선교사'로 양성하려 함.

4. 미국 유학 (1926~1929)

    ◦ 무디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 시카고에서 신학과 종교 음악을 접하며 '음악 선교'의 방법론을 학습.

    ◦ 건음악학교(The Gunn School of Music): 성악을 전공하여 1927년 음악 학사(B.M.) 학위 취득. 이어 연구과에 진학하여 1929년 2월 학사 학위를 재취득하고, 1928년 전미 성악 콘테스트 1등 입상이라는 쾌거를 거둠.


2.2 '로디 현'이라는 명칭의 정치학

그는 자신의 후원자인 로디히버의 이름을 따서 '로디 현(Rody Hyun)'이라는 영어 이름을 적극 사용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별칭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 지식인이 가질 수 있었던 최상위의 문화 자본인 '미국 유학파'와 '기독교적 선교 정체성'을 결합한 일종의 브랜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이후 시대 상황에 따라 이름을 바꾸며 자신의 정체성을 세탁하는 '기회주의적 정체성 재편'의 전조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3. 조선 양악계의 중심에 서다: 창작 활동과 교육적 기반 (1929~1937)

1929년 8월, '금의환향한 음악인'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귀국한 현제명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며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3.1 대표 가곡의 분석과 역사적 논란

이 시기 그는 수많은 가곡을 발표하며 조선인의 정서를 파고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율 아래에는 이미 시대와의 타협과 갈등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곡명
제작 시기
주요 내용
역사적 비판 및 통찰
<고향 생각>
1929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는 애절한 선율
유학 시절의 고독을 담은 곡으로, 귀국 독창회에서 자작곡으로 발표되어 대중적 명성을 얻음.
<희망의 나라로>
1931
"자유, 평등, 평화"를 외치는 경쾌한 행진곡풍
논란: 일각에서는 '희망의 나라'가 일제를 상징한다고 비판하나, 당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민권 인식이 국수주의에 밀려나던 배경을 고려할 때, 오히려 반동적 가치를 담았다는 반론도 존재함.
<조선의 노래>
1932
이은상 작사. 백두산, 무궁화 등 민족 상징을 노래
조선총독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됨. 현제명이 초기에 지녔던 최소한의 민족적 정서가 발현된 작품으로 평가됨.



3.2 조직가로서의 면모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그가 단순히 노래하는 예술가를 넘어, 음악계를 장악하려는 '정치적 야심가'였음을 증명합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내에 관현악단, 취주악단, 합창단을 조직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1937년,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결정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조선일보 1931년2월20일자. 테너 현제명


4. '쿠로야마 사이아키(玄山濟明)'와 제국의 음악: 변절과 친일 행보 (1937~1945)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수양동우회 사건'은 현제명에게 생존을 위한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고초를 겪은 후,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제국의 사도'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4.1 '쿠로야마 사이아키'로의 세탁

일반적으로 '사이메이'라 알려진 그의 창씨명은 원천 자료에 따르면 '쿠로야마 사이아키(玄山濟明)'로 표기됩니다. 

이는 단순한 이름의 일본식 독음을 넘어, 자신의 성인 현(玄)을 산(山)과 결합하여 '쿠로야마'라는 새로운 가문을 창조하고, 이름의 한자 독음마저 일본식으로 재편한 철저한 변절의 상징입니다.


4.2 친일 활동의 주요 경력 (체크리스트)

그는 단순한 가담자가 아니라, 음악을 전쟁 무기로 활용한 기획자였습니다.

• 조선문예회 위원 (1937): 총독부 주도의 교화 단체에 참여, 시국 가요 <장성의 파수>, <서울> 등 작곡 발표.

• 사상 전향 성명서 발표 (1938.06): "종래의 그릇된 민족·국가관을 청산하고 일본 정신의 사도로서 매진하겠다"고 공개 선언.

• 경성음악협회 간사 (1938): 내선일체를 목적으로 한 총독부 산하 관변 조직의 실무 주도.

•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1): 전시 동원 체제의 핵심 조직에서 지식인으로서 전쟁 협력 선동.

•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1944): '국민음악 정신대'라는 명칭 아래 전선과 공장을 누비며 군사 사기 진작 공연 주도.

• 경성음악연구원 주재자 (1943): 황국신민화를 위한 음악 교육 시설 운영 (서울대 음대의 모체).


4.3 결정적 증거: '조선예술상'과 해군휼병금

그의 충성심은 패망 직전까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945년 5월, 일제가 패색이 짙던 시기에 그는 '결전 음악 수립' 공로로 제1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부상으로 받은 상금 500원을 일제의 침략 전쟁을 위한 '해군휼병금'으로 전액 헌납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가 끝까지 제국의 음악가로 남으려 했음을 보여주는 지울 수 없는 역사적 물증입니다.


5. 다시 '로디 현'으로: 해방 공간에서의 재도약과 권력의 유지 (1945~1960)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패망했습니다. 

그러나 현제명은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쿠로야마 사이아키’라는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묻어두었던 ‘로디 현’의 명함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5.1 기회주의적 정체성 재편의 연표

그는 일본인 행세에서 미국인 행세로 발 빠르게 변신하며 미군정의 핵심 음악 정책가로 안착했습니다.

연도
주요 직책 및 활동
정치적 의미 및 비평
1945.09
한국민주당 발기인 및 문교위원
친일 지주 및 우익 세력과 결탁하여 정치적 보호막 구축.
1945.12
고려교향악협회 조직, 러치(Archer Lerch) 미군정청 장관 명예회장 추대
미군정 최고 실권자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친일 전력을 차단하는 '방탄' 수단으로 활용.
1946.02
경성음악학교장 취임
식민지 교육 시설을 발판 삼아 제도권 교육의 수장으로 등극.
1946.08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초대 음악부장
국립대학교의 기틀을 잡는 과정에서 친일 인적 청산을 원천적으로 봉쇄.
1953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초대 학장
한국 양악계의 '종신 대부'로서 권력의 정점 확인.
1954
예술원 종신회원 및 제1회 예술원상 수상
친일 전력이 훈장과 영예로 세탁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정신의 사도"를 자처하더니, 해방 후에는 "미국적 민주주의의 옹호자"로 돌변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현실적 수완은 본인에게는 영달을 안겨주었으나, 우리 음악계에는 '친일 청산 부재'라는 치명적인 독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예술의 자율성이 권력 앞에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졌는지, 그리고 그 무너진 자리에 세워진 '권력'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했는지 목도하게 됩니다.


6. 한국 근현대사가 낳은 모순적 초상

현제명의 삶은 그가 사용했던 이름의 변천사 로디 현(Rody Hyun) → 쿠로야마 사이아키(Kuroyama Saiaki) → 로디 현(Rody Hyun)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웅변합니다. 

그는 서구 문물을 가장 먼저 수용해 전파한 선구자였으나, 그 재능을 시대의 정의가 아닌 개인의 생존과 영달에 바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현제명 생애의 3대 변곡점

1. 미국 유학기와 '로디 현' (1920년대): 미국 선교 시스템을 발판 삼아 서양 음악의 기술적 토대를 닦고 서구 지향적 정체성을 확립한 시기.

2. 전향과 '쿠로야마 사이아키' (1937~1945):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음악을 제국의 전쟁 동원 도구로 전락시키며 예술가로서의 혼을 판 변절기.

3. 해방과 권력의 재생산 (1945~1960): 미군정과의 결탁을 통해 친일 전력을 덮고, 서울대 음대 등 제도권 권력을 장악하여 '한국 양악의 대부'로 군림한 시기.


역사는 현제명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가 구축한 음악 교육 시스템과 보급한 가곡들은 진정 우리 음악사의 자산입니까? 아니면 극복해야 할 식민의 잔재입니까? 

분명한 것은 그가 보여준 '정치적 음악가'로서의 행보는 예술가가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고 권력에 기생할 때 어떤 괴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뼈아픈 사례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선율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뒤에 숨겨진 '500원의 헌납'과 '이름의 세탁'을 기억하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의무입니다.


현제명은 뛰어난 재능을 시대의 정의가 아닌 개인의 생존과 권력 유지에 사용한,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모순을 동시에 체현한 인물입니다. 

그의 생애는 예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특정 인물을 미화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공개된 사료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재구성입니다.

현제명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 음악사의 성취와 식민지·해방기의 정치적 선택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논쟁적 사례이며, 본문에서는 사실 확인이 가능한 기록을 중심으로 하되 해석이 갈리는 지점은 비판적 관점에서 서술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글을 한 개인의 공과(功過)를 단정하기보다는, 예술·권력·생존이 교차했던 시대의 구조적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Hyun Jemyung (1903–1960) was a central yet deeply controversial figure in modern Korean music history. 

Trained in Christian institutions and educated in the United States, he returned to Korea in the late 1920s as a leading advocate of Western classical music, composing popular art songs and establishing key musical organizations.

However, after 1937, amid intensified Japanese colonial repression, Hyun openly collaborated with the imperial regime under the Japanese name Kuroyama Saiaki, producing wartime propaganda music and participating in state-controlled cultural bodies. 

His loyalty was confirmed as late as 1945, when he donated prize money to Japan’s naval war fund.

Following liberation, Hyun swiftly abandoned his Japanese identity and reemerged as a pro-American cultural leader, securing top positions in postwar music education, including leadership rol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His career illustrates how artistic talent, political adaptability, and institutional power intertwined, leaving a lasting legacy that embodies both the foundations of Korean Western music and the unresolved contradictions of colonial collabo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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