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역사의 변곡점: 벵골의 함락과 플라시 전투 (1756-1757)
1. 18세기 벵골, 거대한 폭풍의 전야
18세기 중반, 무굴 제국은 중앙 권력이 급격히 쇠퇴하며 각 지방의 태수(나와브, Nawab)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분열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벵골은 풍부한 자원과 전략적 요충지로서 영국 동인도 회사가 '왕관의 보석'으로 점찍은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무굴 황제 파루크시야르로부터 받은 관세 면제 특권인 '다스탁(Dastak)'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는 본래 회사의 공무 무역에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회사 직원들은 이를 자신들의 '개인 무역(Inland Trade)'에 무단으로 남용하며 벵골의 세수를 갈취했고, 이는 현지 정권과의 돌이킬 수 없는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골의 주권을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다스탁을 불법적으로 판매하여 벵골의 경제 체제를 교란했을 뿐만 아니라, 태수의 허가 없이 요새를 증축하고 정적들을 보호하는 등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처럼 행동했습니다. 벵골 태수들에게 영국인은 더 이상 상인이 아닌, 꿀을 생산하는 벌이 아니라 침을 쏘아 죽이는 약탈자로 변해 있었습니다."
당시 80세의 고령이었던 알리 바르디 칸은 영국인들을 '꿀벌'에 비유하며 조심스럽게 다루었으나, 그가 사망한 뒤 20세의 어린 나이로 권좌에 오른 그의 손자 시라지 웃 다울라는 달랐습니다.
그는 영국인들이 자신의 입지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고, 동인도 회사의 오만한 태도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갈등의 불씨는 어린 나이에 권좌에 오른 새로운 태수, 시라지 웃 다울라의 등장으로 거대한 화염이 됩니다.
2. 인물 대결: 시라지 웃 다울라 vs 로버트 클라이브
사건의 중심에는 각기 다른 야망과 배경을 가진 두 인물이 서 있었습니다.
이들의 대결은 개인의 성패를 넘어, 인도가 식민지의 길로 접어드느냐 아니면 주권을 수호하느냐를 가르는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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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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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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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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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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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평가 (영국 vs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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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지 웃 다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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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의 나와브 (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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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존심, 성급하고 단호함, 외세에 비협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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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 회사의 특권 남용 억제 및 벵골의 완전한 주권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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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변덕스럽고 잔인한 전제군주, '블랙홀'의 학살자 인도: 외세의 침략에 맞서다 배신당한 비운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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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클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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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 회사군 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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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 지략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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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에서의 무역 특권 복구 및 영국 중심의 괴뢰 정권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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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인도 제국 건설의 초석을 닦은 위대한 영웅 인도: 부도덕한 음모가이자 배신을 조장한 식민 수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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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라지 웃 다울라 |
영국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시라지를 '이성적이지 못한 동양의 폭군'으로 묘사하여 그를 축출한 행위를 '문명화의 과정'으로 정당화했습니다.
반면, 인도 측은 클라이브가 군사적 역량보다는 매수와 위조, 음모를 통해 승리를 낚아챘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의 도덕적 결함을 비판합니다.
특히 시라지는 불과 1년 남짓한 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외세의 요새 증축에 강력히 항의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 재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단호했던 젊은 태수는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의 오만을 징벌하기 위해 칼을 뽑아 듭니다.
3. 윌리엄 요새의 함락과 도망자들 (1756년 6월)
1756년 6월 16일, 시라지는 5만 대군과 5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캘커타의 윌리엄 요새를 포위했습니다.
당시 요새 내 영국인 인구는 불과 400여 명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실전 경험이 부족한 군인과 민병대가 섞여 있었습니다.
1. 경고 무시와 방심: 태수의 요새 확장 중단 및 수비대 철수 명령을 영국 측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시함으로써 평화적 해결의 기회를 날려버림.
2. 초기 방어선의 붕괴: 태수의 군대가 캘커타 시가지를 습격하고 바라 바자르(Bara Bazar)를 약탈하자, 영국군은 요새 밖의 주택들을 태우며 저항하려 했으나 민심 이반과 수적 열세로 패퇴함.
3. 지휘부의 비겁한 탈출: 전황이 불리해지자 주지사 로저 드레이크와 군 지휘관들은 방어 책임을 버리고 가장 먼저 배를 타고 강 아래로 탈출하는 파렴치한 행태를 보임.
4. 기강 해이와 혼란: 요새에 남겨진 존 제파니아 홀웰(J.Z. Holwell)과 병사들은 탄약 부족과 극심한 음주로 인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제대로 된 전투를 수행하지 못함.
5. 항복과 함락: 6월 20일, 결국 중과부적으로 홀웰이 백기를 들었으나, 항복 직전까지 이어진 무질서한 저항과 지휘부의 부재가 결국 비극적인 감금 사건의 단초가 됨.
주지사가 떠난 요새에 남겨진 이들은 곧 인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비극 중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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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요새 |
4. 캘커타의 블랙홀(Black Hole of Calcutta) 사건
'캘커타의 블랙홀'은 18세기 군대 내 감옥을 지칭하는 속어였으나, 이 사건 이후 영국 제국주의 선전의 가장 강력한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1) 지옥의 하룻밤: 홀웰의 기록
생존자 홀웰의 '진실한 서사(Genuine Narrative)'에 따르면, 146명의 포로가 6월 20일 밤, 단 두 개의 작은 창문만 있는 18피트x14피트 크기(자료마다 차이 있음)의 좁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홀웰은 참혹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 아비규환의 갈증: 포로들은 갈증으로 미쳐갔고, 창밖의 인도인 경비병들은 포로들이 물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모습을 '즐거운 구경거리'로 여기며 빛을 비추어 감상했습니다.
• 생존을 위한 사투: 홀웰 본인은 자신의 셔츠 소매에 밴 땀을 빨아먹으며 목마름을 견뎠고, 심지어 옆 사람과 서로의 땀을 빨아먹기 위해 경쟁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고통을 참지 못한 일부는 자신의 소변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 참혹한 결과: 다음 날 아침 문이 열렸을 때, 146명 중 생존자는 23명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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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캘커타의 블랙홀 사건 |
2) 데이터의 진실 혹은 왜곡: 수치 논란
현대 역사학자들은 홀웰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영국의 복수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치를 크게 부풀렸다고 분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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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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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웰의 주장 (영국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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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역사가 및 인도 측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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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금 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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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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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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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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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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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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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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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인도인의 전형적인 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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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공간 한계(146명 수용 불가) 및 과장된 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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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수치가 43명이라 하더라도, 이는 당시 기준으로 분명한 전쟁범죄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이 사건을 단순한 비극을 넘어 인도 지배의 '도덕적 명분'으로 치밀하게 이용했습니다.
3) 선전 도구로서의 비극
영국은 이 사건을 통해 '야만적인 인도인'을 문명화해야 한다는 '제국적 사명'을 유포했습니다.
훗날 커즌 총독은 1902년 이 사건을 기념하는 비석을 다시 세우며 영국의 통치를 정당화했습니다.
"이 기념비는 1756년 6월 20일 밤, 윌리엄 요새의 블랙홀 감옥에서 벵골 태수 시라지 웃 다울라의 폭압적인 폭력으로 질식사한 123명의 인원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잔혹한 행위는 국왕 폐하의 군대에 의해 응당하고도 충분하게 복수되었다." - 홀웰 기념비 비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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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카타, 인도의 블랙홀 기념물 |
이 비극적인 사건의 소식은 마침내 남부 마드라스에 있던 복수의 화신, 로버트 클라이브의 귀에 들어갑니다.
현대 천문학 용어와의 비유적 연결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블랙홀은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고 모든 세부 사항이 소멸되는 이론적 구조물입니다.
"영 제국의 신화적 역사가 블랙홀(사건)에서 시작되었다"는 표현처럼, 역사학자들은 외부 관찰자가 내부의 사건을 알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다는 천문학적 블랙홀의 특성을 이 역사적 사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즉,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가혹한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18세기 감옥을 지칭하던 속어가 훗날 현대 천문학의 강력한 중력 천체를 설명하는 용어로 투영된 맥락이 있습니다.
5. 클라이브의 반격과 알리나가르 조약
1757년 1월, 로버트 클라이브와 왓슨 제독의 구원군이 캘커타를 탈환하기 위해 도착했습니다.
특히 2월 4일 새벽에 벌어진 '캘커타 전투'는 안개 속에서 벌어진 혼돈의 연속이었습니다.
• 전투의 전개: 클라이브는 압도적인 숫자의 태수군을 상대로 야습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자욱한 안개로 인해 1m 앞도 보이지 않았고, 영국군 병사들은 자신들의 세포이 용병대를 적으로 오인하여 발포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 실패한 야망: 클라이브는 시라지 웃 다울라가 머물던 아미칸드의 정원을 습격하여 그를 직접 생포하려 했으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 목표 지점을 지나치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화력에 위협을 느낀 시라지는 결국 굴욕적인 '알리나가르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알리나가르 조약(1757년 2월) 핵심 조항
• 영국 동인도 회사의 모든 무역 특권 및 다스탁 사용권을 무조건 복구한다.
• 캘커타 내 영국의 요새 증축 권리와 자치권을 완전히 인정한다.
• 영국이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민트(Mint, 조폐국) 설치권을 허용한다. (이는 벵골의 경제 주권을 포기한 결정적 대목임)
조약은 체결되었지만, 클라이브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벵골의 지배자를 아예 교체하려는 거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6. 배신과 음모: 미르 자파르와 아미칸드(Omichund)
클라이브는 정면 승부보다 '배신'이 훨씬 값싼 승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라지의 측근들을 하나씩 매수하기 시작했습니다.
• 음모의 인물 관계도
◦ 미르 자파르(Mir Jafar): 시라지의 총사령관. 차기 태수 자리를 조건으로 전투 시 '방관'하기로 영국과 비밀 협약 체결.
◦ 자갓 세트(Jagat Seth): 벵골의 거대 금융가. 시라지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영국의 음모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
◦ 아미칸드(Omichund): 음모의 중재자. 보상금으로 벵골 보물의 5%를 요구하며 영국을 압박.
클라이브는 탐욕스러운 아미칸드를 제거하기 위해 두 개의 계약서를 만드는 희대의 사기극을 벌였습니다.
보상 내용을 담은 '붉은색 계약서'와 실제 효력이 없는 '흰색 계약서'였습니다.
심지어 클라이브는 이 가짜 계약서에 서명을 거부한 왓슨 제독의 서명을 직접 위조하는 대담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역사상 가장 값싼 가격으로 매수된 군대가 마침내 망고 숲, 플라시에서 마주칩니다.
7. 플라시 전투 (1757년 6월 23일): '비'가 바꾼 운명
이 전투는 사실상 전투라기보다 잘 짜인 '배신의 연극'이었습니다.
시라지의 군대는 5만 명에 달했으나, 클라이브의 군대는 불과 3,000명(유럽인 1,000명, 세포이 2,000명)이었습니다.
1. 하늘이 내린 비와 화약의 보존: 전투 중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영국군은 미리 준비한 천막으로 화약을 보호했으나, 태수의 군대는 화약을 노출시켜 대포를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2. 침묵한 주력군과 미르 자파르: 태수 군대의 3분의 2를 지휘하던 미르 자파르는 전투 내내 망고 숲 뒤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클라이브와의 밀약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3. 사기 저하와 장군의 전사: 끝까지 충성했던 장군 미르 마단(Mir Madan)이 포탄에 맞아 전사하자, 시라지는 공포에 질려 미르 자파르의 거짓 조언을 듣고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이는 곧 군대의 궤멸로 이어졌습니다.
패배한 시라지 웃 다울라는 도주하던 중 체포되어 미르 자파르의 아들 미란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단 하루의 짧은 전투로, 인도의 거대한 부와 운명은 한 외국 상업 회사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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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시 전투 |
8. 벵골의 함락이 인도에 남긴 유산
플라시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벵골의 막대한 자본은 영국의 산업 혁명을 뒷받침하는 동력이 되었고, 인도는 자립적인 경제 구조를 상실한 채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전락했습니다.
역사의 교훈은 오늘날 무르시다바드의 자파라간지 궁전에 남아 있는 '배신자의 문(Nimakharam Deuri)'에 서려 있습니다.
현지 전설에 따르면 미르 자파르의 가문은 "군주를 배신한 자는 누구에게도 신뢰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전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양국의 시각 차이를 정리하며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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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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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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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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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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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 전제군주에 대한 문명적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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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비열한 음모와 식민 수탈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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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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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핵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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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장된 선전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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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클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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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은 영웅적 지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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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하고 비도덕적인 위조꾼이자 음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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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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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법과 질서, 근대성을 도입한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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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경제적 파탄과 빈곤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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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플라시의 망고 숲에서 벌어진 그날의 사건은 오늘날에도 인도와 영국 사이에서 서로 다른 기억으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영국·인도 양측의 사료와 현대 역사 연구를 바탕으로, 1756~1757년 벵골의 함락과 플라시 전투를 비교사적·비판적 시각에서 재구성한 서사형 역사 글입니다.
특정 인물이나 국가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기보다, 사건이 어떻게 기록되고 해석되며 정치적·제국적 서사로 소비되었는지를 조명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캘커타의 블랙홀 사건’ 등 논쟁적 주제는 당대 기록과 후대 연구의 차이를 명시하여 서술했으며, 일부 표현은 이해를 돕기 위한 서사적 각색을 포함합니다.
이 글은 단순한 연대기 요약이 아닌, 역사 인식의 구조를 살펴보기 위한 해설임을 밝힙니다.
The fall of Bengal and the Battle of Plassey (1757) marked a decisive turning point in Indian history.
As Mughal authority declined, the British East India Company abused its trade privileges, provoking conflict with the young Nawab Siraj ud-Daulah.
The capture of Calcutta and the controversial “Black Hole” incident became powerful tools of imperial propaganda, justifying British retaliation.
Robert Clive’s return led not to fair warfare but to treaties, bribery, and betrayal.
At Plassey, a vastly outnumbered British force prevailed through secret alliances, monsoon rain, and the defection of Siraj’s commander Mir Jafar.
The result was not merely a military defeat, but the transfer of Bengal’s immense wealth to a private company, laying the economic foundations of British rule in India and reshaping global history through conquest disguised as comme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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