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 평전: 5대 왕을 모신 불사조인가, 조선 최악의 간신인가? (Yu Jagwang)


유자광 평전: 신분의 벽을 넘은 풍운아인가, 시대가 낳은 희대의 간신인가


1. 5대 왕을 모신 불사조, 그 이름 유자광

조선 초기, 세조에서 중종에 이르는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은 권력의 향배가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요동치던 격동의 시공간이었다. 

이 피바람 부는 권력의 한복판에서 무려 5대 국왕을 수종하며 권세의 정점을 지켰던 인물, 유자광(柳子光)이 있다. 

그는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가장 극단적인 평가의 양극단에 서 있는 인물이다. 

사림(士林)의 사초(史草)에는 동료와 스승의 피를 제단 삼아 출세한 '희대의 간신'으로 낙인찍혀 있으나, 다른 관점에서 그는 서얼이라는 견고한 신분제의 벽을 오직 자신의 실력과 탁월한 정무적 감각으로 뚫고 올라간 '불사조와 같은 풍운아'이기도 했다.

유자광이 살았던 시대는 유교적 관료 질서가 정착되는 한편으로, 개국 공신 세력인 '훈구파'와 도덕적 명분을 앞세운 신진 지식인 집단인 '사림파'가 권력의 패권을 놓고 처절하게 부딪히던 변동의 시대였다. 

유자광은 이 틈바구니에서 '서얼'이라는 태생적 굴레를 안고 출발했다. 

그럼에도 그는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그리고 중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며 무려 세 번이나 공신(적개·익대·정국)으로 책록되며 그중 두 번이나 1등 공신을 거머쥔 불사조였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서얼', '공신 3회(적개, 익대, 정국공신)', '5대 국왕 수종'이다. 

이 숫자들은 그가 단순히 운이 좋았던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시대의 공기를 읽어내는 탁월한 감각과 치열한 생존 본능을 지닌 전략가였음을 웅변한다. 

이제 우리는 남원의 한미한 서얼로 태어나 조선 최고의 권력자에 올랐던 유자광, 그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보며 그가 남긴 역사의 거울을 마주하고자 한다.


2. 출생의 굴레와 야망의 발아: 서얼 유자광의 청년기

유자광은 전라도 영광 출신의 경주부윤(종2품 고위 지방관)의 유규(柳規)와 노비 출신의 첩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의 법도는 서얼에게 냉혹했다.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 되는 '종모법(從母法)'과 서얼의 관직 진출을 엄격히 제한하는 '서얼 금고령(庶孽禁錮令)'은 유자광이라는 천재적 개인에게 가해진 가혹한 형벌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부친 유규는 백호 꿈을 꾸고 난 뒤 부인과 동침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부인의 몸종인 최씨와 동침하여 유자광을 얻었다고 전한다. (전승)

이는 그가 서자(庶子)를 넘어선 '얼자(孽子)'로서, 사실상 천민과 다름없는 신분이었음을 시사한다.

유자광의 유년기 일화는 그의 남다른 기개와 생존 본능을 잘 보여준다. 

실록은 그가 젊은 시절 "장기와 바둑으로 재물을 다투고, 밤낮으로 떠돌아다니며 길가에서 여자를 만나면 마구 끌어다가 음간(淫姦)을 했다"고 기록하며 그를 무뢰배로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사후 사림의 필치에 의해 덧칠해진 악의적 서술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그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대목은 부친과의 갈등에서 나타난다. 

아버지는 유자광의 총명함이 가문에 화를 부를까 두려워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장마철 급류가 몰아치는 강을 건너 메밀밭을 보고 오라는 사지(死地)로 내몰았을 때, 어린 유자광은 커다란 나무판자를 배 삼아 유유히 강을 건너 돌아왔다. 

이는 그가 평생 마주하게 될 '신분'이라는 거친 파도를 어떻게 실력으로 돌파할 것인지를 암시하는 상징적 대목이다.

그는 서얼의 한을 단순히 눈물로 삭이지 않았다. 

훗날 권력을 잡은 뒤, 자신을 무시하던 본가 형제들이 그에게 줄을 대기 위해 비굴하게 구는 모습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는 기록은 그가 가진 복수심의 실체를 보여준다.


과거 응시조차 제한된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몸으로 부딪치는 '갑사(甲士)'였다. 

경복궁 건춘문을 지키는 말단 군인으로 시작한 그의 청년기는 뒤틀린 야망과 억눌린 울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건춘문 문지기로 썩어가던 유자광에게 마침내 일생일대의 기회인 '이시애의 난'이 찾아온다.


3. 세조의 총애와 벼락출세: '절세의 인물'로 발탁되다

1467년(세조 13년),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자광은 주저 없이 상소를 올려 자신을 발탁해줄 것을 청했다. 

세조는 이 무명의 갑사가 보여준 기개와 탁월한 무예를 보고 단숨에 매료되었다. 

세조가 무신들을 모아 활쏘기 대회를 열었을 때, 유자광은 100보 밖의 작은 목표물을 연달아 명중시켰다. 

세조는 그의 활 솜씨를 보고 "남이(南怡)와 견줄 만하다"며 감탄했다. 

유자광은 연락관으로 임명되어 남이 장군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고, 여진족 이만주 토벌전에서는 직접 선봉에 서서 이만주의 수급을 베었다는 기록(정약용의 서술)이 있을 정도로 맹활약했다.

세조는 유자광을 '절세의 인물'이라 극찬하며, 단 3개월 만에 그를 정5품 병조정랑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대간들이 서얼 출신에게 청요직을 맡길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하자, 세조는 "너희들이 유자광의 발끝이라도 따라가느냐? 나는 나라의 보배를 얻었다고 본다"라고 일갈하며 그를 비호했다. 

세조의 이러한 행보는 단순한 총애를 넘어, 비대해진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신분적 약점이 명확하여 오직 왕에게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유자광과 같은 신진 세력을 '왕의 사냥개'로 키우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유자광의 영광은 1468년 온양 온천 행차 중 치러진 별시 문과에서 정점을 찍는다. 

세조는 유자광을 장원으로 선발했는데, 당시 시험관이었던 훈구의 영수 신숙주는 유자광의 답안지가 "고어를 전용하고 문법이 소홀하다"는 이유로 낙방시키려 했다. 

그러나 세조는 "묻는 본의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며 이를 뒤집고 유자광을 장원으로 공포했다.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정3품 병조참지에 오른 유자광은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며 조선의 실세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그를 지켜주던 거목 세조가 승하하자, 유자광은 새로운 권력의 주군인 예종 앞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 증명해야 하는 냉혹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4. 남이의 옥(獄): 동지의 피로 쌓아 올린 권력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 시대, 유자광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함께 전장을 누볐던 동료 남이를 표적으로 삼는 잔혹한 도박을 감행했다. 

태종의 외증손이자 20대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는 그 화려한 배경만큼이나 오만하고 돌출적인 성격으로 인해 구 훈구 세력과 예종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유자광은 남이가 자신을 찾아와 "한명회, 신숙주 등을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키자"고 설득했다며 역모를 고변했다. 

이 고변으로 남이와 강순 등 신진 무신 세력 25명이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유자광은 이 공로로 '익대공신 1등'에 책록되며 정2품 자헌대부 무령군에 봉해졌다. 

야사에서는 유자광이 남이의 시(詩) 중 '백두산석 마도진(白頭山石 磨刀盡)'의 구절에서 '미평국(未平國,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미득국(未得國,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조작했다고 전하나, 실록의 기록은 보다 정무적인 판단을 강조한다.

실제 국문 기록을 보면 "남이가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고조(古朝)가 가고 신조(新朝)가 올 징조라 말했다"는 점을 더 결정적인 역모의 증거로 밀어붙였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적 배신이 아니라, 왕권에 위협이 되는 신진 무신 세력을 거세하고자 했던 예종의 의중을 유자광이 정확히 읽어내고 그 실행자가 된 사건이었다. 

배경 좋은 종친 남이와 자수성가한 서얼 유자광의 대비는 유자광이 느꼈을 신분적 결핍과 질투가 이 냉혹한 선택의 동력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동지의 피로 권력을 샀고, 이로써 훈구 세력의 일원으로 당당히 편입되었다. 

하지만 성종 시대에 접어들며 그는 또 다른 적대 세력, '도덕적 순결성'을 무기로 자신을 '소인'이라 멸시하는 사림파와 마주하게 된다.


5. 성종 시대의 암투: 사림의 성장과 유자광의 소외

성종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을 필두로 한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성리학적 명분론을 중시하는 사림의 눈에, 신분을 세탁하고 동료를 고변하여 출세한 유자광은 제거해야 할 '소인배'의 전형이었다. 

특히 함양 군수 시절 발생한 '학사루 현판 사건'은 유자광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남겼다. 

유자광이 함양을 유람하며 남긴 시 현판을 본 김종직은 "어찌 이런 자가 감히 현판을 거느냐"며 이를 떼어내 불태워버렸다.


이후 유자광은 성종의 총애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는 단순한 간신이 아니었다. 

조선 최고의 음악 이론서인 『악학궤범』 편찬에 참여하여 예술적 조예를 드러냈고, 병선의 구조적 결함을 분석하여 건의할 만큼 뛰어난 실무 행정력을 갖춘 인재였다.

편경(石琴)을 제작할 때 소리가 맞지 않자 모두가 당황했다. 

이때 유자광은 편경의 미세한 두께 차이를 지적하며 소리를 잡아냈다. 

왕실의 예악(禮樂)을 정립하는 실무에서만큼은 유자광의 천재성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림은 그를 쉬지 않고 탄핵했다. 

1478년에는 임사홍과 결탁하여 '현석규 탄핵 사건'을 주도하다가 오히려 '소인의 당'을 만들었다는 역공을 받고 동래로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유배와 복직을 반복하는 고단한 정치적 부침 속에서도 유자광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그는 정2품 도총관에 오르는 등 군사 실무직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왕권의 충견임을 자처했다. 

하지만 사림과의 감정적 골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겉으로는 김종직이 죽었을 때 만사(挽詞)를 지어 통곡하며 "그를 한유와 왕통에 비긴다"고 아부했으나, 그의 가슴 속엔 칼날이 자라고 있었다. 

연산군의 즉위는 그 칼날을 휘두를 피의 복수극을 위한 무대가 되었다.


6. 무오사화(戊午士禍): 붓 끝에서 시작된 피의 숙청

1498년(연산군 4년),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가 발생한다. 

사건의 발단은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발견된 김일손의 사초였다. 

김일손의 사초는 단순한 직필을 넘어 왕실에 대한 '패드립'에 가까운 위험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림의 사초 기록 vs 유자광/연산군의 명분 대조]

구분
사림의 기록 (김일손 사초 내용)
유자광/연산군의 대응 및 명분
왕실 사생활
세조가 아들 의경세자의 후궁 권씨를 겁탈하려 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 기록
선왕(증조부)을 능멸하고 왕실 정통성을 부정한 대역죄
조의제문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며 세조의 찬탈을 우회적으로 비판함
세조의 계유정난을 찬탈로 규정한 반역의 상징물로 해석
종친 모욕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승려 학조와 사통했다는 '찌라시' 수준의 기록 수록
왕실 전체를 모함하고 기군망상(欺君罔上)한 죄
노산군 시신
단종의 시신이 숲에 버려져 까마귀가 쪼았다는 등의 과장된 야사 기록
공식 기록인 세조실록을 부정하고 민심을 선동하려는 의도


유자광은 이극돈으로부터 이 사초의 내용을 전해 듣자마자 "이 어찌 머뭇거릴 일입니까!"라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직접 『김종직 문집』을 가져와 연산군이 이해하기 쉽도록 『조의제문』에 낱낱이 주석을 달아 바쳤다. 

유자광은 이것이 단순한 추모시가 아니라 세조의 집권 자체를 부정하는 역모의 증거임을 입체적으로 부각했다. 

연산군 또한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대간과 사림 세력의 기를 꺾기 위해 유자광의 정보력과 잔혹함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당했고, 김일손, 권오복 등은 능지처참되었다. 

유자광은 국문장에서 잔혹한 심문관으로 활동하며 "이 사람들은 도당이 매우 성하여 변을 예측할 수 없으니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림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명단을 훑으며 숙청을 주도했다. 

이때 노사신이 "청론하는 선비가 조정에 있어야 한다"며 만류하지 않았다면 사림은 멸족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피의 승리는 유자광에게 절대 권력을 안겨준 동시에, 그를 조선 역사상 가장 증오받는 인물로 박제해버렸다.


7. 중종반정과 마지막 변신: 영원한 권력은 없다

사림을 초토화하며 승승장구하던 유자광이었으나, 폭주하는 연산군의 광기는 머지않아 그 자신마저 위협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유자광에게도 "너는 무엇을 했느냐"며 겁박하고 옥에 가두는 등 토사구팽의 위협을 가했다. 

평생 권력의 향배를 동물적으로 감지해온 유자광은 다시 한번 생존을 위한 '변신'을 준비한다.


1506년, 박원종과 성희안이 반정을 모의하자 유자광은 노련한 기회주의적 감각으로 이에 가담했다. 

그는 실전 경험이 부족한 반정군을 위해 기름종이로 표식을 만들어 지휘 체계를 잡는 등 실무적인 도움을 주었다. 

또한 반정 당일, 연산군이 총애하던 장녹수 등의 재산을 몰수하는 실무를 맡으며 끝까지 유능함을 증명하려 애썼기도 했다.

반정이 성공하자 그는 다시 한번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며 무령부원군에 봉해졌다. 

세 번의 왕조 변경과 정변 속에서 매번 1등 공신이 된 유자광은 그야말로 '불사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복권된 사림파는 물론, 박원종 등 반정 실세들조차 유자광의 화려한 배신 이력을 경계했다. 

유자광은 박원종을 찾아가 "우리는 같은 무신이니 서로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박원종은 "네가 위기에 처한 건 무신이라서가 아니라 무오년에 저지른 악행 때문"이라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유자광은 폐주에게 아첨하여 사림을 죽인 원흉"이라는 사림의 성토는 중종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그는 공신 호봉을 박탈당하며 다시 한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8. 실명(失明)과 객사(客死): 평해 유배지의 쓸쓸한 종말

1507년, 유자광은 관직과 공신 자격을 박탈당하고 경상도 평해로 유배되었다.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풍운아의 말년은 비참했다. 

73세의 고령에 유배지에서 시력을 잃어 장님이 된 그는 차가운 객방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림의 사관들은 이를 두고 "남이의 혼령이 나타나 그의 눈을 찔렀다"거나 "천벌을 받았다"며 저주 섞인 기록을 남겼다.

그가 사망하자 중종은 대간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예장(禮葬)을 허락했다. 

이는 유자광이 비록 간신이라 비난받았으나, 왕권의 충직한 사냥개로서 헌신했던 그의 공로를 국왕만은 인정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종은 유자광의 아들 유진(柳軫)의 공신 녹훈도 회복시켜주며 마지막 배려를 베풀었다.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평생을 투쟁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를 흘리게 했던 한 인간의 서사는 그렇게 쓸쓸한 종지부를 찍었다.


9. 에필로그: 유자광이라는 거울 - 간신인가, 시대의 비극인가?

유자광을 단순히 '간교한 간신'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역사의 단면만을 보는 것이다. 

그는 뛰어난 무예를 지닌 장수였고, 『악학궤범』에 이름을 올린 예술가였으며, 병선의 결함을 잡아내던 유능한 행정가였다. 

그의 '간행(奸行)'은 어쩌면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속에서, 실력이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 한 인간의 비틀린 생존 투쟁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림이 주도한 역사 기술 속에서 유자광은 '희대의 간신' 프레임에 갇혔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통해 신분 차별이라는 구조적 폭력이 어떻게 인재를 권력의 화신으로 만드는지 목격한다. 

만약 유자광에게 정당한 출세의 길이 열려 있었다면, 그는 조선을 부강하게 할 위대한 재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는 유자광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도덕을 버린 범죄자인가, 아니면 차별받는 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세상을 향해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도전했던 시대의 희생양인가? 

유자광이라는 거울은 지금도 우리에게 성공의 조건과 권력의 도덕성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의 삶은 끝났으나, 그가 던진 신분과 능력, 그리고 생존에 대한 화두는 여전히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서늘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글은 조선 전기 정치사의 큰 흐름(훈구·사림의 권력 충돌, 사화의 전개, 공신 책록과 유배의 반복)을 사실 관계에 맞추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전환, 심리 묘사, 문장 리듬을 서사적으로 각색한 평전형 글입니다.

인물의 평판(“간신/풍운아”)은 시대·기록자·정파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유자광은 사림 계열 사관의 서술, 야사적 전승, 후대의 도덕 평가가 겹쳐 ‘행위’와 ‘평가’가 쉽게 혼동되는 인물이므로, 본문에서 단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표현은 독자가 사료·연구 성과를 함께 대조해 읽어 주시길 권합니다.

또한 본문 속 일화 중 일부는 전해오는 이야기(야담/구전) 성격이 강하거나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독자께서는 사실로 확정된 사건(연도·직임·사화 등)과, 해석·추정이 개입된 서술(동기·심리·의도)을 구분해 읽어 주시면 글의 의도(“논쟁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복원”)를 더 정확히 받아들이실 수 있습니다.


Yu Jagwang rose from being seo-eol (secondary-born) to become Joseon's most polarizing power broker, serving five kings from Sejo to Jungjong. 

Noticed for military service in the 1467 Yi Si-ae rebellion, he gained Sejo's protection and climbed with unusual speed. After Sejo's death, he secured himself under Yejong by accusing the general Nam I, earning rewards and lifelong infamy. 

Under Seongjong, Sarim scholars treated him as a 'small man,' and his career swung between office and exile. 

In 1498 he helped Yeonsangun turn Kim Jong-jik's writings and Kim Ilson's notes into the Mu-o purge, which executed and even posthumously disgraced Sarim leaders. 

In 1506 he joined the coup against Yeonsangun and again won top merit, but was soon stripped and exiled, dying blind in the east. 

His life remains a debate: ruthless opportunism, or a brutal survival strategy forged by rigid status w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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