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새벽을 연 불꽃
[1] 통곡하는 민주주의: 3·15 부정선거와 금남로의 눈물
1960년 3월 15일 새벽.
전라남도 광주의 공기는 유난히 차갑고 무거웠다.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은 나라의 어른을 뽑는 날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축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담벼락마다 붙은 이승만(자유당 대선 후보)과 이기붕(부통령 후보)의 포스터는 기괴할 정도로 빳빳했다.
그 곁을 지키는 경찰들의 눈초리는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정권은 이미 미쳐 있었다.
12년 독재의 끝을 예감한 자유당(당시 집권 여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승리해 있어야 했다.
01. 기표소 안의 유령들
투표소가 문을 열자마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줄을 서기도 전에 투표함의 4할은 이미 차 있었다.
이른바 '4할 사전투표'였다.
유령들이 밤새 투표라도 하고 간 것일까. 아니었다. 면사무소 직원과 자유당원들이 밤새 도장을 찍어 쑤셔 넣은 가짜 표들이었다.
현장은 더 가관이었다.
사람들은 혼자 투표할 권리조차 빼앗겼다. 3인조 투표. 세 명씩 짝을 지어 들어가 서로가 이승만에게 찍는지 감시하게 했다.
그 뒤에는 조장이 버티고 서서 기표지를 확인했다.
비밀투표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은 기표소 안의 자욱한 담배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참관인으로 나선 민주당(당시 야당) 당원들은 경악했다.
"이게 무슨 투표요! 이건 범죄지!"
항의는 돌아온 주먹과 발길질에 묻혔다.
경찰은 노골적으로 자유당의 편에 섰다. 투표소 밖에는 몽둥이를 든 청년단원들이 서성였다.
공포는 전염병처럼 번졌다. 민주주의는 기표소 구석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02. "민주주의는 죽었다!" 금남로의 장례 행렬
오후 12시 50분. 광주 금남로.
민주당 전남도당부 건물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서 나온 이들의 모습에 길 가던 시민들은 숨을 멈췄다.
약 50여 명의 남녀. 그들은 머리에 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상주(喪主)의 복장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커다란 대나무 장대에 매달린 만장(죽은 이를 애도하는 글귀를 적은 깃발)이 들려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흰 천에는 굵고 검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곡(哭) 민주주의’
민주주의가 죽었으니 곡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필호(전남 지역 국회의원)가 앞장섰다.
그 뒤를 지프차와 트럭, 그리고 비장한 표정의 당원들이 따랐다.
"아이고, 아이고... 민주주의가 죽었네!"
통곡 소리가 금남로 바닥을 때렸다.
연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심 어린 비탄이었다.
4할 사전투표, 3인조 감시 투표, 투표소 참관인 강제 퇴거. 이 모든 추잡한 현실을 목격한 자들이 선택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시민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눈물을 훔쳤고, 누군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정적을 깨고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민주주의 살려내라!"
03. 소방차의 물세례와 흩어진 상주들
평화로운 장례 행렬은 오래가지 못했다.
법원을 지나 경찰국장 관사 앞에 이르렀을 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광주의 하늘을 찢었다.
백차(당시 흰색 경찰차)들이 길을 막아섰다.
무장한 경찰들이 방패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거대한 소방차 두 대가 총구처럼 노즐을 겨눴다.
푸슈슉!
차가운 물줄기가 상주들의 가슴을 때렸다.
3월의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흰 두건은 젖어 비틀어졌고, '곡 민주주의'라고 적힌 만장은 찢겨 나갔다.
경찰은 물세례를 퍼붓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몽둥이가 휘둘러졌고, 비명이 난무했다.
"이놈들아! 민주주의 장례도 못 치르게 하느냐!"
이필호 의원과 당원들은 몸으로 맞섰다.
길바닥은 금세 물과 피로 뒤섞였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찰의 강경 진압에 행렬은 결국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뿌린 눈물과 외침은 금남로 아스팔트 틈새마다 스며들었다.
04. 마산으로 번진 불씨
같은 시각, 경상남도 마산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광주의 '곡 민주주의' 시위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남녘 땅을 달구고 있었다.
마산의 투표소에서도 똑같은 부정이 저행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오전 10시 30분경.
민주당 마산시당이 투표 포기를 선언했다.
"이것은 선거가 아니다! 무효다!"
이 선언은 도화선이 되었다.
광주에서 시작된 작은 불꽃이 마산이라는 거대한 화약고에 떨어진 것이다.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주의 상주들이 울렸던 곡소리는 이제 마산에서 거대한 함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마산 앞바다의 어둠 속에서 한 소년이 차가운 바닷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임을.
그리고 그 소년이 훗날 대한민국 역사를 통째로 뒤바꿀 운명의 열쇠가 될 것임을.
독재의 황혼은 그렇게 피와 눈물로 물들기 시작했다.
[2] 바다에서 돌아온 소년: 마산의 함성과 김주열
1960년 3월 15일 밤, 경상남도 마산.
광주의 ‘곡(哭) 민주주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마산의 민심은 폭발했다.
밤이 깊었지만 거리는 낮보다 뜨거웠다.
정전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시내에 시민과 학생 수천 명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고, 입에서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대화가 아닌 총성이었다.
01. 마산의 검은 밤
경찰은 무자비했다.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다.
도립마산병원 앞, 총소리와 함께 비명이 공기를 찢었다.
길바닥은 순식간에 선혈로 낭자했다.
이날 밤에만 7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총상을 입었다.
공권력이 자국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참혹한 밤이었다.
그 혼란의 와중에 한 소년이 사라졌다.
이름은 김주열(마산상고 합격생). 남원에서 마산으로 유학 온 열일곱 살의 앳된 소년이었다.
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나갔던 아들은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 권찬주(김주열의 모친) 여사는 아들을 찾아 미친 듯이 마산 시내를 헤맸다.
파출소, 병원, 심지어 시신 안치소까지 뒤졌지만 소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02. 27일간의 잔인한 침묵
정부는 이 사건을 '공산당의 배후 조종에 의한 난동'으로 몰아갔다.
이승만은 담화를 통해 "마산 폭동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된 것"이라며 시민들의 분노를 폄훼했다.
보도관제(설명: 정부가 언론 보도를 강제로 통제하는 일)로 인해 마산의 진실은 가로막혔고, 실종된 소년의 이야기도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마산 앞바다와 저수지를 맴도는 어머니의 통곡 소리는 마산 시민들의 가슴에 죄책감과 분노라는 불씨를 지폈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4월 11일이 되었다.
3·15 의거로부터 정확히 27일이 지난 날이었다.
03. 바다가 뱉어낸 진실
오전 11시경,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
낚시하던 한 시민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처음엔 통나무인 줄 알았다.
하지만 파도에 밀려 가까이 다가온 그것을 본 순간, 시민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자빠졌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의 형상을 한 '증거'였다.
소년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교복을 입은 채 부풀어 오른 시신.
가장 끔찍한 것은 얼굴이었다. 오른쪽 눈에 어른 주먹만 한 최루탄(설명: 최루가스를 뿜는 포탄)이 박혀 있었다.
뒤통수까지 관통한 최루탄 꼬리 날개가 삐져나와 있었다.
경찰은 시위를 진압하며 소년의 눈에 대고 직접 최루탄을 쏘았던 것이다.
그리고 소년이 죽자 발에 돌덩이를 매달아 바다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바다는 그 추악한 진실을 끝내 삼키지 않고 다시 뭍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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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
04. "살인 경찰 물러가라!" 2차 마산 의거
소년의 시신이 인근 병원으로 옮겨지자 마산은 거대한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주열아! 내 아들아!"
어머니의 절규는 마산 시민 3만 명을 거리로 끌어냈다.
이번엔 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시장 바구니를 든 주부들, 지게를 진 노동자들, 심지어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살인 경찰 물러가라!"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
시민들은 경찰서를 부수고 자유당 당사를 점거했다.
경찰의 총칼도 바다가 뱉어낸 소년의 참혹한 얼굴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마산의 분노는 더 이상 한 도시의 문제에 머물지 않았다.
소년의 죽음은 신문 사진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소년의 사진 한 장은 천 마디 말보다 강렬했다.
서울의 대학생들, 지식인들, 그리고 평범한 시민들은 그 사진을 보며 직감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을.
민주주의는 죽은 소년의 눈에서 다시 태동하고 있었다.
[3] 안암의 호랑이들이 일어서다: 4·18 고려대생 피습 사건
마산 앞바다가 소년의 시신을 뱉어낸 후, 대한민국은 거대한 화약고가 되었다.
분노는 전국으로 전염병처럼 번졌지만, 권력의 심장부인 서울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경찰의 삼엄한 경계와 대학 총장들의 단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정적을 깬 것은 '안암의 호랑이들'이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더 이상 강의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01. "자유, 정의, 진리"의 행진
오후 12시 50분. 고려대학교 도서관 앞 광장.
3,000여 명의 학생이 운집했다.
그들의 손에는 급하게 쓴 선언문이 들려 있었다.
"기성세대는 각성하라!"는 사자후와 함께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당시 서울 시내 대규모 대학 시위로서는 첫 포문이었다.
학생들의 대열은 안암동을 지나 종로로 향했다.
검은 교복을 입은 청년들이 스크럼을 짜고 행진하자 시민들이 길가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물을 뿌리고 곤봉을 휘둘렀으나, 불붙은 청춘의 기세를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산의 학살을 중단하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학생들은 국회의사당(당시 태평로 소재, 현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도착해 연좌시위를 벌였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유진오(고려대 총장)의 설득과 경찰의 귀가 보장 약속을 믿고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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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의문을 낭독하는 고려대 학생들 |
02. 어둠 속에서 나타난 그림자
오후 7시 20분경.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생들의 행렬이 좁은 길목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수십 명의 괴한이 튀어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쇠파이프, 벽돌, 갈고리,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경찰이 아니었다.
자유당의 비호를 받던 정치 깡패(화랑동지회 등 폭력 조직)들이었다.
"이 새끼들, 다 죽여버려!"
비열한 습격이었다.
깡패들은 학생들의 머리와 가슴을 무차별적으로 가격했다.
경찰은 바로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니, 오히려 깡패들이 도망갈 길을 터주며 방조했다.
비명이 종로의 밤공기를 찢었다.
학생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길바닥은 순식간에 학생들의 피로 낭자해졌다.
십여 명의 학생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현장은 찢긴 교복과 주인을 잃은 신발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03. 도화선이 된 '피 흘리는 학생'
다음 날 아침, 신문 1면은 피투성이가 된 채 동료에게 업혀가는 학생들의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시민들은 경악했다.
"어떻게 국가가 깡패를 동원해 배움을 구하는 학생들을 때릴 수 있단 말인가."
어제의 사건은 잠자던 서울의 양심을 깨우는 거대한 종소리가 되었다.
이제는 고려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울 시내 모든 대학의 강의실에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대신 분노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여고생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았고, 초등학생들조차 "우리 형, 언니들을 때리지 마세요"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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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국민학생들. |
04. 폭풍 전야: 4월 19일의 새벽
4월 18일 밤, 서울의 각 대학교 학생회 간부들은 비밀리에 모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폭풍이 몰아칠 것임을.
경찰의 총구와 깡패의 쇠파이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불의를 보고도 참는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 김주열의 죽음과 종로의 피습 사건이 가르쳐주었다.
독재 정권은 승리를 확신하며 경무대의 빗장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그들이 가둔 것은 국민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몰락을 재촉할 분노의 파도였다.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길고 뜨거웠던 하루가 밝아오고 있었다.
[4] 피의 화요일: 경무대로 향한 10만 학도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서울의 아침은 기이할 정도로 맑았다.
어제 종로에서 고려대생들이 깡패들에게 피습당했다는 소식은 밤새 서울 시내 모든 담벼락을 넘었다.
학생들의 가슴 속엔 슬픔보다 더 지독한 분노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은 없었다.
01. "상아탑을 넘어 거리로!"
오전 9시.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먼저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들이 낭독한 선언문은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등대 아래 모였다."
이 외침은 신호탄이었다.
연세대, 성균관대, 중앙대... 서울의 모든 대학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검은 교복의 물결은 거대한 강물이 되어 종로와 을지로를 가득 메웠다.
놀라운 것은 대학생들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광고, 동성고 등 고등학생들이 대열의 선두에 섰다.
심지어 수송초등학교 어린 학생들까지 "우리 형, 언니들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학생들에게 물과 빵을 건넸다.
이제 이것은 학생들만의 시위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거대한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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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9일에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
02. 경무대 앞의 바리케이드
오후 1시. 시위대의 최종 목적지는 경무대(현재의 청와대, 당시 대통령 관저)였다.
10만 명에 가까운 인파가 광화문을 지나 경무대 입구인 효자동으로 밀고 올라갔다.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물을 뿌리고 최루탄을 쏘며 저지했다.
하지만 분노한 군중은 맨손으로 소방차를 탈취하고 경찰의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렸다.
"이승만은 물러나라!"
"독재 정권 타도하자!"
함성은 경무대 담장 안까지 울려 퍼졌다.
정권의 심장부는 공포에 질렸다.
대화의 여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비열하고도 잔인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03. "탕!" 멈추지 않는 총성
오후 1시 40분경.
경무대 쪽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소음이 들렸다.
처음엔 공포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선두에 서 있던 학생들이 짚단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실탄 사격이었다.
경찰은 밀고 들어오는 학생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다.
효자동 길바닥은 순식간에 선혈로 낭자해졌다.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사람이 죽는다!"는 비명 속에서도 학생들은 쓰러진 동료를 업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총탄은 자비가 없었다.
이날 서울에서만 10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 여학생도, 구두를 닦던 소년도 경찰의 총구 앞에 스러졌다.
오후 3시, 정부는 서울 전역에 경비계엄(군사력을 동원해 치안을 유지하는 비상사태)을 선포했다.
04. 전차 위에 피어난 꽃
해 질 무렵, 서울 시내에는 육군 제15사단의 전차가 진입했다.
정부는 군대가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전차를 막아서지 않았다.
오히려 태극기를 흔들며 군인들을 환영했다.
"군인은 국민의 군대다! 우리를 쏘지 마라!"
시민들은 전차 위로 올라가 군인들에게 꽃다발을 건넸고, 계엄군 장병들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군의 총구는 차마 국민을 향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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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들에게 점거된 전차 |
밤이 찾아온 서울.
거리엔 자욱한 최루탄 연기와 피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독재자는 여전히 경무대 깊숙한 곳에서 권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과연 이 수많은 희생은 헛된 것이 될 것인가.
아니면 더 거대한 폭풍의 전조인가.
역사의 시계추는 이제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운명의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5] 스승들의 응답: "제자들의 피에 보답하라"
4월 19일의 '피의 화요일'이 지나간 서울은 기이한 침묵에 잠겼다.
거리에는 전차가 버티고 섰고, 주요 길목마다 대검을 장착한 소총을 든 군인들이 배치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의 그늘 아래 시신들을 치우며 상황이 종료되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폭풍 전의 고요였다.
학생들의 피가 아스팔트를 적신 지 일주일째 되던 날,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들이 교문을 열고 나왔다.
01.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1960년 4월 25일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
전국 27개 대학에서 모인 258명의 교수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모였다.
그들은 상아탑 안에서 책만 파고 있던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제자들이 총탄에 쓰러지고 깡패들에게 매 맞는 모습을 보며, 스승으로서의 양심이 무너져 내렸다.
교수단은 시국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 내용은 간결하고도 서슬 퍼런 꾸짖음이었다.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3·15 부정선거와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라!"
교수들은 선언문을 읽은 뒤 거리로 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제자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현수막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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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
02. 지성이 이끈 마지막 물결
교수들의 시위는 학생들의 시위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점잖은 중년의 스승들이 넥타이를 매고 침묵 속에 행진하자, 길가에 서 있던 시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경찰도 당황했다.
학생들에게는 최루탄을 쐈지만, 나라의 어른 대접을 받는 교수들에게는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교수님들까지 나오셨다!"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직장인들이 넥타이를 풀고 대열에 합류했다.
시장 상인들은 앞치마를 두른 채 뛰어나왔다.
교수들이 물꼬를 터주자, 계엄령의 공포에 짓눌려 숨죽이고 있던 서울 시민들이 다시 거대한 파도가 되어 쏟아져 나왔다.
행진 대열은 밤이 깊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야간 통행금지조차 무시한 채 "이승만 하야"를 외치는 목소리는 경무대의 담장을 넘어 독재자의 귀에 박혔다.
03. 흔들리는 총구, 응답하는 군대
정권은 계엄군에게 다시 한번 무력 진압을 암시했다.
하지만 이미 민심의 파도는 제방을 넘은 상태였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육군참모총장)은 고뇌에 빠졌다.
군은 더 이상 국민의 피를 원하지 않았다.
군 내부에서도 "학생과 교수들에게 총을 쏠 수는 없다"는 기류가 지배적이었다.
전차 위에 올라탄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던 병사들의 눈빛에는 이미 동질감이 서려 있었다.
미국 정부 역시 등을 돌렸다.
매카나기(당시 주한 미국 대사)는 이승만을 직접 찾아가 민중의 요구에 따를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국제 사회와 국내 민심, 그리고 스승들의 외침까지 더해지자 12년 독재라는 견고한 성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04. 운명의 아침이 밝다
4월 25일 밤은 길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시민들이 횃불을 들고 밤샘 시위를 이어갔다.
"내일이면 끝이 난다"는 희망과 "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가"라는 불안이 교차했다.
그리고 4월 26일 아침.
수십만 명의 군중이 다시 광화문을 가득 메웠다.
그들의 눈은 단 한 곳, 경무대를 향해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사람의 결단뿐이었다.
전 국민이 숨을 죽이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운명이 결정될 역사적인 순간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6] 하야(下野): 무너진 독재와 민주의 봄
1960년 4월 26일 오전 10시. 서울은 거대한 용광로였다.
광화문에서 경무대 입구까지, 인파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계엄군의 전차는 이미 시위대의 '쉼터'가 되어 있었다.
군인들은 총을 내려놓았고, 시민들은 전차 위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 12년간 이 나라를 통치해온 노정객의 항복 선언뿐이었다.
01.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
오전 10시 30분. 라디오에서 지직거리는 잡음 끝에 노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85세의 고령,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었다.
"나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 직을 사임할 것이며..."
이 한 문장이 전파를 타는 순간, 대한민국 전역은 일제히 멈춰 섰다.
그리고 1초 뒤, 지축을 흔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광화문에 모여있던 수십만 명의 시민은 서로를 껴안으며 울었다.
죽어간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후 2시, 이승만은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12년의 장기 집권과 독재의 성벽이 학생들의 피와 시민들의 함성 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02. 경무대를 떠나는 뒷모습
4월 28일, 이승만은 정든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이승만의 사택)으로 향했다.
길가에 늘어선 시민들은 야유 대신 침묵으로 그를 배웅했다.
한때는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권력의 노예가 되어 눈과 귀가 가려졌던 노인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부통령 당선자였던 이기붕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장남 이강석이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동생을 총으로 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가족 자살 사건'이 벌어졌다.
권력을 향한 맹목적인 탐욕이 부른 처참한 종말이었다.
03. 4·19 혁명이 남긴 위대한 유산
4·19 혁명은 단순히 정권 하나를 바꾼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역사상 최초로 '민중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승리의 기록'이었다.
민주주의의 학습: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했다.
평화 시위의 원형: 학생과 지식인이 앞장서고 시민이 뒷받침하는 한국형 민주화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세계적 의의: 아시아에서 일어난 최초의 성공한 민주 혁명으로 기록되며, 이후 다른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감을 주었다.
04.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
혁명은 끝났지만, 남겨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올랐던 소년 김주열, 경무대 앞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그들이 꿈꿨던 세상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 표가 정직하게 계산되고, 부당한 권력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평범한 상식이 통하는 나라였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투표 한 표의 무게 속에는, 1960년 봄 금남로에서 흘린 눈물과 종로 바닥을 적신 피가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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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로 망명가는 이승만을 신문 보도한 경향신문 |
이승만은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역사는 그를 '건국 대통령'과 '독재자'라는 두 갈래의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가 남긴 과오를 바로잡은 것은 결국 이름 없는 평범한 시민들의 위대한 용기였다.
1960년의 봄은 그렇게 가고, 대한민국엔 비로소 민주의 봄이 찾아왔다.
이 글은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에 관한 공개 사료(당시 신문 보도, 정부·의회 기록, 연구서 등)에 기반해 큰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묘사와 감정선, 일부 대사와 분위기는 서사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특정 인물의 의도·심리, 현장의 세부 상황(시간대·동선·발언)은 자료마다 기록이 다를 수 있어, 단정 대신 가장 널리 알려진 맥락을 우선해 구성했습니다.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니, 인용·학습 목적이라면 1차 자료나 복수의 연구서로 교차 확인을 권합니다.
In March 1960, South Korea’s 3·15 presidential election was tainted by ballot stuffing and forced “group voting.”
At Gwangju’s main street, mourners held a public “funeral for democracy,” and the anger spread to Masan.
Police gunfire and the disappearance of 17-year-old Kim Ju-yeol deepened the crisis; when his body surfaced with a tear-gas canister lodged in his eye, outrage went nationwide.
On April 18, Korea University students were ambushed by political thugs, and the next day students and citizens flooded Seoul, marching toward the presidential residence.
Police opened fire; martial law followed, yet the streets kept swelling.
On April 25, professors joined the march, and on April 26 President Syngman Rhee resigned—proof that stolen votes can be overturned by public cou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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