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효렴: 돌아오지 못한 발해 사신의 슬픈 노래
해동성국의 별, 왕효렴을 만나다
9세기 동아시아,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밤하늘의 뭇별처럼 찬란하게 빛났던 제국, 발해가 있었습니다.
그 수많은 별 중에서도 유독 밝게 빛나다 스러져간 한 별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왕효렴(王孝廉)입니다.
그는 단순한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붓 한 자루로 발해의 높은 기상과 문화 수준을 증명한 문인이자, 목숨을 걸고 거친 바다를 건넜던 외교관이었습니다.
왕효렴의 삶은 발해와 일본이 맺었던 깊은 교류의 증거이자, 격동의 시대 속에서 한 개인의 운명이 국가의 운명과 어떻게 얽히는지를 보여주는 한 편의 서사시입니다.
지금부터 그의 빛나는 여정과 비극적인 마지막을 따라가며, 잊혀진 제국 발해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합니다.
1. 사행길에 오르다: 발해 사절단의 대사 왕효렴
814년, 왕효렴은 발해의 제17회 견일본사(遣日本使)를 이끄는 대사(大使), 즉 사절단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발해의 동쪽 끝 항구, 오늘날 러시아 연해주의 크라스키노에서 출발하여 그는 일본으로 향하는 머나먼 뱃길에 오릅니다. (추정)
당시 발해와 일본의 교류는 단순한 정치·군사적 동맹을 넘어 활발한 문화 교류와 상업 활동으로 그 성격이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왕효렴의 임무는 발해의 높은 문물을 알리고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뜻깊은 여정에는 그와 함께한 특별한 동료가 있었습니다.
바로 녹사(錄事)라는 높은 직위를 가진 승려 인정(仁貞)이었습니다.
녹사는 대사, 부사, 판관에 이어지는 고위직으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승려들이 외교 무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이처럼 왕효렴이 이끈 사절단은 발해 최고의 지성과 문화를 대표하는 정예 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의 여정은 단순한 외교 임무를 넘어, 한 개인의 운명이 국가의 역사와 어떻게 얽히고, 시대의 파도 속에서 어떻게 빛나고 스러져 가는지를 보여주는 장대한 서사의 시작이었습니다.
2. 이국의 문인: 일본에서의 빛나는 문화 교류
왕효렴은 이국땅 일본에서 단순한 외교관으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발해를 대표하는 뛰어난 문인으로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특히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이자 지성이었던 쿠우카이(空海)와 시문을 주고받으며 깊은 지적 교유를 나누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문화적 친목을 넘어선 고도의 외교 행위였습니다.
당나라의 그늘 아래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발해에게, 자국의 외교관이 일본 최고의 지성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이는 발해가 변방의 제후국이 아닌,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 명실상부한 ‘해동성국’임을 증명하는 세련된 문화 권력의 과시였습니다.
그의 빛나는 재능은 시(詩)가 되어 오늘날까지 일본의 문헌집에 5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시는 이국에서의 경험과 감성을 섬세하게 담아냈습니다.
• 봉칙배내연(奉勅陪內宴): 일본 궁궐 연회에 참석하여 받은 따뜻한 환대에 대한 즐거움을 노래한 시
• 춘일대우 탐득정자(春日大雨 探得情字): 봄날 내리는 큰 비를 보며 느낀 서정적인 감성을 담아낸 시
그 가운데, 왕효렴의 내면과 ‘나그네의 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시가 바로〈춘일대우 탐득정자(春日對雨 探得情字)〉입니다.
主人開宴在邊廳 (주인개연재변청)
주인(일본 관리)이 변방 청사에서 잔치를 베푸니,
客醉如泥等上京 (객취여니등상경)
나그네(왕효렴)는 진흙처럼 취해 수도로 올라가기를 기다리네.
疑是雨師知聖意 (의시우사지성의)
비의 신(雨師)이 임금의 뜻을 안 것일까,
甘滋芳潤灑羈情 (감자방윤쇄기정)
달콤하고 향기로운 은혜가 나그네의 시름을 씻어 주네.
이 시들을 통해 우리는 왕효렴이 느꼈을 자긍심과, 봄비에 묻어 둔 이국의 쓸쓸한 감회를 함께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붓과 먹으로 가장 품격 높은 외교를 펼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빛나던 그의 외교 활동 뒤편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비극의 그림자가 조용히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3. 돌아오지 못한 귀향길: 비극의 시작
815년 정월, 왕효렴과 사절단은 일본왕의 국서를 받고 마침내 고대하던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고향의 땅은 그들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동해의 거친 파도는 순식간에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고, 사절단의 배는 나뭇잎처럼 찢겨나갔습니다.
돛은 꺾이고 선체는 부서져, 망망대해 위에서 이들은 완벽한 고립과 절망에 빠지고 맙니다.
결국 이들은 일본의 오늘날 후쿠이현 일대에 발이 묶인 채, 파손된 배를 대신할 새로운 배를 건조하며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간은 기약 없는 좌절로 변했고, 그 사이 사절단의 수장이었던 왕효렴이 병으로 먼저 눈을 감았고, 뒤이어 왕승기와 승려 인정까지 차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발해의 흙을 다시 밟지 못하고 봄날 비를 보며 ‘나그네의 그리움(羈情)’을 적셔 주던 단비는
끝내 그의 고향 길을 열어 주지 못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 역시 이들의 안타까운 상황에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문인 사카우에이마오(坂上今雄)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발해 사절단의 처지를 위로하며, 판관 고영선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냈습니다.
大海途難渉 孤舟未得廻
대해(동해)를 건너는 길은 어려워, 외로운 배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네.
不如關隴雁 春去復秋來
관중과 농산사이를 오가는 기러기만도 못하여, 봄에 떠나 가을에 돌아오지 못하는구나.
봄에 떠나 가을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기러기만도 못한 신세가 된 발해 사신들의 처지를 애틋하게 노래한 이 시는, 국경을 넘어선 인간적인 교감과 슬픔을 보여줍니다.
안타깝게도 사절단을 이끌던 왕효렴 본인마저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해동성국의 문화를 빛내던 외교관의 여정은 그렇게 비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한 뛰어난 외교관의 죽음은 너무나 슬픈 일이었지만, 그의 이름과 그가 남긴 시, 그리고 그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역사 속에 영원히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남겨진 이름과 유산
사절단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해 일본왕은 발해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심이창연(甚以愴然)’, 즉 ‘몹시도 마음속 깊이 애처롭게 생각한다’고 표현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뛰어난 인물들의 죽음에 대한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자, 두 나라 사이에 존재했던 공식적인 관계를 넘어선 인간적인 유대를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입니다.
왕효렴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과 죽음은 위험천만한 고대 외교의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피었던 문화 교류의 힘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둘러싼 양국의 교감은, 예술을 통해 맺어진 인간적 연결이 국가의 경계와 시대의 불행을 넘어설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남깁니다.
1. 고대 외교의 위험성
바다를 건너는 외교가 얼마나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입니다.
2. 문화 교류의 힘
정치적, 군사적 힘뿐만 아니라 시(詩)와 같은 수준 높은 문화를 통해 국경을 넘어선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교류가 가능했음을 증명합니다.
3. 발해인의 기상
비록 그의 여정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왕효렴의 활동은 ‘해동성국’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과 당시 활발했던 대외 활동을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역사 속 한 개인의 울림
찬란한 제국 발해의 대사였던 왕효렴.
그는 뛰어난 문인으로서 이국땅에 발해 문화의 위상을 드높였지만,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비운의 외교관이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꿈을 펼치던 한 인간의 빛나는 순간과 예기치 못한 좌절, 그리고 죽음이라는 비극을 담고 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더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한 개인의 삶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과 교차하며 때로는 빛나고 때로는 슬픈 흔적을 남깁니다.
왕효렴이라는 이름과 그의 슬픈 노래를 통해 우리는 잊혀진 제국 발해의 역사를 더욱 생생하고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신뢰할 수 있는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서사형 글입니다.
이 글은 연대기 강의가 아니라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한 내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으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한 정보를 함께 병기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This essay traces the life of Wang Hyo-ryeom, a Balhae envoy and poet who led a mission to Japan in 814.
As the refined “voice” of Haedong Seongguk, he showed that Balhae was a true high culture by trading poems with Japanese elites and leaving verses about spring rain, banquets, and the homesickness of a traveler.
On the stormy return voyage his ship was wrecked, forcing a bleak stay on foreign shores where sickness claimed him.
His death abroad, and the sorrow recorded by Japanese writers, expose both the mortal risks of ancient diplomacy and the quiet but enduring power of cultural exchange, reminding us how one person’s fate can mirror the rise and fall of a forgotte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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