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 신라 언어를 바꾼 이두와 화왕계의 이야기 (Seol Chong)


신라의 위대한 지성, 설총: 파격의 탄생부터 언어의 혁명까지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학자

어느 여름날,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이 높은 방에 앉아 총명한 학자 설총(薛聰)을 불렀다.

"오늘은 오랫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향기로운 바람이 부니, 울적한 마음을 풀 만한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는가?"

왕의 이 한마디는 설총이 단순한 신하가 아니라, 왕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고 국정의 방향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나누는 조언자였음을 보여준다. 

왕은 맛있는 음식이나 아름다운 음악보다 그의 '고상한 말과 좋은 웃음거리'를 원했다. 

이처럼 왕의 가장 가까운 지적 파트너였던 설총, 그의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 파격적인 탄생: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

설총의 탄생은 한 편의 이야기처럼 극적이다. 

신라 사회의 모든 관습과 경계를 뛰어넘는 두 인물의 만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원효의 노래 

당대 최고의 고승 원효(元曉)는 어느 날 비틀거리며 거리에서 의미심장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誰許沒柯斧 我斫天支柱)."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지만, 태종무열왕은 노래의 깊은 뜻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대사가 필경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낳아, 나라의 큰 인재로 삼고 싶어하는구나."라고 해석했다. 

왕은 나라의 미래를 이끌 동량(棟梁)이 될 인재를 원했던 것이다.


운명적 만남 

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원효의 바람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남편을 잃고 요석궁(瑤石宮)에 홀로 머물던 딸, 요석공주가 있었다. 

왕은 즉시 관리를 보내 원효를 궁으로 데려오게 했다. 

왕의 뜻을 알아차린 원효는 요석궁 앞 문천교(蚊川橋)를 지날 때 일부러 물에 빠져 온몸을 적셨다. (전승)

관리는 흠뻑 젖은 그를 옷을 말린다는 명분으로 자연스럽게 요석궁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원효는 요석궁에 머물게 되었고, 공주와 인연을 맺어 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신라 십현(十賢) 중 한 사람이자 위대한 학자가 될 설총이었다.


경계에 선 운명: 왕손이었으나 6두품이었던 아이 

설총의 아버지는 6두품 출신의 고승 원효였고, 어머니는 진골 신분의 공주였다. 

왕실의 혈통과 당대 최고 지성의 만남이라는 상징적 결합이었지만,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骨品制)는 자식의 신분이 아버지를 따르도록 규정했다. 

왕의 외손자라는 특별한 혈통을 가졌음에도 그는 6두품으로 귀속되었다. 

이는 그가 태생적으로 신라 사회의 경계에 선 인물이었음을 의미하며, 그의 비범한 삶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파격적인 출생 배경은 그의 삶과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시대는 이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천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신라 설총 표준영정


2. 시대가 낳은 천재: 신문왕의 개혁과 설총의 부상

설총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신문왕 시대는 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지는 중요한 시기였다. 

신문왕의 통치는 거대한 도전과 함께 시작되었다. 

즉위하자마자 장인인 김흠돌(金欽突)을 포함한 진골 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은 신문왕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그는 기존 귀족 세력의 힘을 빼고 왕권을 강화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대한 신문왕의 해답은 파격적이었다. 

그는 진골 귀족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적 파트너로 학문적 소양이 뛰어난 6두품 지식인들을 주목했다.

682년, 그는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국립대학인 국학(國學)을 설립하여 체계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는 골품의 한계 때문에 능력을 펼치지 못했던 설총과 같은 인재들에게 자신의 학문과 경륜을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신문왕이 찾던 새로운 시대의 인재,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설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설총은 개인적 자질 또한 빛을 발했다. 

특히 그의 깊은 효심을 보여주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버지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그의 유골을 곱게 빻아 흙과 섞어 아버지의 모습을 한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분황사(芬皇寺)에 모시고 살아계실 때처럼 예를 다했다. 

어느 날 설총이 소상 앞에서 절을 하자, 홀연히 소상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승)

이 일화는 그의 지극한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대적 배경과 개인의 역량을 모두 갖춘 설총은, 이제 신라 역사에 길이 남을 가장 위대한 업적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3. 언어의 새벽을 열다: 이두(吏讀)를 집대성하다

설총의 업적 중 가장 빛나는 것은 바로 신라의 문자 생활에 혁명을 가져온 이두(吏讀) 집대성이다.

당시 신라는 중국의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는 심각한 '문자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리말과 한문은 어순과 문법 구조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글로 표현하거나 중국의 유교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라인들은 한자의 음(소리)과 훈(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차자표기법(借字表記法)을 사용했다. 

이들을 통칭 차자표기법이라 부르지만, 쓰임새는 조금씩 달랐다. 

이두(吏讀)는 주로 관청의 행정 문서에, 향찰(鄕札)은 향가와 같은 문학 작품을 온전히 우리말로 기록하는 데, 구결(口訣)은 한문 경전을 읽을 때 이해를 돕기 위해 토를 다는 데 사용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설총이 이두를 '발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분
설명
이두의 발명가?
아님. 설총 이전에도 진흥왕 순수비나 여러 목간(木簡)에서 한자를 이용해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시도가 이미 존재했음.
설총의 진짜 업적
체계의 완성자. 제각각 쓰이던 표기법을 언어학적으로 완성시켜, 우리말의 조사(助詞)나 어미(語尾) 같은 문법적 요소를 체계적인 한자 차용(借字)으로 표기하는 기틀을 마련함.


설총의 업적이 가져온 핵심적인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유학 교육의 혁신 

『삼국사기』는 설총이 "방언(우리말)으로 구경(九經, 아홉 가지 유교 경전)을 읽어 후학을 가르쳤다"고 기록한다. 

그의 체계적인 정리 덕분에, 극소수 엘리트만 접근 가능했던 복잡한 유교 경전을 신라의 지식인들이 우리말로 쉽게 배우고 토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신라 유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지식 대중화의 초석 

이두의 체계화는 한문을 완벽히 구사하는 소수 귀족이 지식을 독점하던 구조를 깨뜨렸다. 

더 많은 6두품 지식인과 관료들이 우리말 방식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지식의 저변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언어의 틀을 바로 세운 대학자 설총. 

그는 이 깊은 지혜를 바탕으로, 이제 혼란한 시대를 이끄는 왕에게 날카로운 통찰이 담긴 가르침을 전한다.


4. 꽃의 우화로 왕을 깨우치다: 화왕계(花王戒)

어느 날 신문왕의 부름을 받은 설총은 왕을 위해 특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도리에 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우화, 「화왕계(花王戒)」였다.


화왕의 등장 

이야기는 향기로운 동산에 피어나 모든 꽃들의 왕으로 군림하는 화왕(花王, 모란)으로 시작된다. 

화왕의 아름다움은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멀고 가까운 곳의 모든 꽃들이 그를 뵙기 위해 앞다투어 찾아왔다.


장미의 유혹 

그때 붉은 얼굴과 옥 같은 이를 한 아름다운 여인, 장미가 교태를 부리며 화왕 앞에 나타나 아뢰었다.

그녀는 아첨하는 간신을 상징했다.

“첩(妾)은…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실까 하오니, 왕께서는 저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백두옹의 직언 

뒤이어 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 백두옹(白頭翁, 할미꽃)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묵직한 목소리로 간언했다. 

그는 충직한 신하의 상징이었다.

“반드시 좋은 약으로 기운을 북돋우고 아픈 침으로 독을 없애야 합니다. … 왕께서도 또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화왕의 깨달음 

장미의 아름다움에 화왕의 얼굴에 잠시 고민의 빛이 스쳤다. 

그가 "장부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아름다운 여인은 얻기 어려운 것이니 어찌할꼬?"라며 망설이자, 백두옹은 크게 실망하며 맹자(孟軻)와 풍당(馮唐)처럼 정직한 신하들이 등용되지 못하고 늙어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제야 화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크게 뉘우치며 외쳤다.

"내가 잘못하였구나! 내가 잘못하였구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신문왕은 깊은 감동을 받아 얼굴빛을 바로 하고 말했다.

"그대의 우화(寓話) 속에는 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써서 임금이 된 자의 교훈으로 삼도록 하라."

왕은 설총의 지혜를 높이 사 그를 높은 벼슬에 등용했다. 

이로써 「화왕계」는 단순한 이야기를 넘어, 군주가 경계해야 할 도리를 담은 영원한 고전이 되었다.


설총의 묘


5. 후대에 남긴 유산과 역사적 평가

설총의 삶과 업적은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신라를 넘어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신라 3대 문장가 

설총은 당대 최고의 외교문서 전문가였던 강수(强首), 그리고 후대의 대학자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3대 문장가로 꼽혔다. 

그의 글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평가다.


유학의 종주(宗主) 

이두를 집대성하여 유교 경전 보급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그는 고려 현종 때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학을 널리 편 후작'이라는 뜻으로, 그의 학문적 공로를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이후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文廟)에 최치원과 함께 배향되어 한국 유학의 뿌리 깊은 종주로 추앙받았다.


가전체 문학의 효시 

「화왕계」는 사물을 의인화하여 인간 세상의 도리를 풍자하는 '가전체(假傳體)' 문학의 첫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한국 문학사에 새로운 장르를 연 선구적인 업적이다.


오늘날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에는 그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어 시대를 초월한 위상을 증명하고 있다. 

원래 이 서원은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 장군만을 모시기 위해 세워졌으나, 훗날 경주 지역 유학자들의 건의와 퇴계 이황의 뜻에 따라 설총과 최치원이 함께 배향되었다. 

이는 신라의 후예들이 무(武)의 위업만큼이나 문(文)의 성취를 소중히 여겼음을 보여준다.


경주 서악서원


시대를 연결한 지식인

설총의 삶은 그의 탄생 그 자체에 내재된 '연결'이라는 운명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서로 다른 세계의 경계에 서서 그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 불교(아버지 원효)와 유교(자신의 학문)

• 왕실(어머니 요석공주)과 6두품 지식인 사회

• 한문(중국의 문자)과 우리말(신라의 언어)


이처럼 그는 태생부터 학문, 그리고 업적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대립하거나 단절된 것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신분과 사상의 경계를 넘어 지식의 새로운 길을 열었던 위대한 지성, 설총. 그의 이름은 신라의 지적 유산을 넘어 한국인의 정신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신뢰 가능한 사료와 국내 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서사형 글입니다.

원효·요석공주·설총 관련 일화와 분황사 소상 이야기 등은 기록과 설화가 섞인 부분이므로, 필요한 경우 (전승) 표기를 통해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임을 함께 밝혔습니다.

인물·지명·제도·용어는 한국어를 우선하되, 처음 등장할 때 한자·원어를 병기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This article portrays Seolchong, a Silla scholar born to the monk Wonhyo and Princess Yoseok. 

Living between royal blood and a lower bone rank, he becomes an adviser in King Sinmun’s reform era. 

He systematizes Idu, fitting Chinese characters to Korean grammar so Confucian texts can be read in the vernacular. 

In the allegory “Hwangwangi,” he uses a tale of flowers to urge the king to favor honest remonstrance over charm. 

Later hailed as one of Silla’s great stylists, Seolchong is remembered as a bridge between Buddhism and Confucianism and between written Chinese and spoke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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