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왕, 황금시대를 열다: 조지아의 위대한 군주 타마르
조지아 역사상 가장 눈부신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군주, 그러나 '여왕(Queen)'이 아닌 '왕(Mep'e)'으로 불렸던 유일한 여성.
타마르는 단순한 통치자를 넘어 조지아 민족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남성 군주들의 전유물이었던 중세 시대에 어떻게 한 명의 여성이 왕관의 무게를 견디고, 분열된 왕국을 통일하며, 캅카스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의 통치는 왜 오늘날까지 조지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로 평가받는지,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돌파했던 위대한 군주 타마르의 삶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1.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공주
타마르가 왕국의 운명을 짊어지기 전, 조지아는 강력한 왕권과 이를 위협하는 귀족 세력 간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녀의 왕위 계승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1.1. 아버지 기오르기 3세의 투쟁
타마르의 아버지 기오르기 3세의 통치기는 왕권을 약화시키려는 귀족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 정점은 1177년, 귀족들이 왕의 조카인 뎀나(Demna)를 왕위 계승자로 내세워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었습니다.
기오르기 3세는 이 도전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반란을 주도한 귀족 이바네 오르벨리를 처형하고 그의 가문을 왕국에서 추방했으며, 왕위 계승의 빌미가 되었던 조카 뎀나는 거세하고 두 눈을 멀게 하는 잔혹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뎀나는 결국 이 형벌의 후유증으로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기오르기 3세는 공포 정치로 왕좌를 지켜냈지만, 귀족들의 억눌린 반감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로 남아 그의 딸에게 무거운 유산으로 남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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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마르(왼쪽)와 기오르기 3세(오른쪽) |
1.2. 최초의 여성 공동 통치자
자신의 사후에 벌어질 왕위 계승 분쟁을 우려한 기오르기 3세는 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고 자신의 혈통을 공고히 하기 위해 1178년, 조지아 역사상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립니다.
바로 자신의 딸 타마르를 공동 통치자로 선포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넘어, 남성 중심의 봉건 사회에서 여성이 군주가 될 수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타마르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 다가올 폭풍에 대비하고자 했습니다.
아버지가 피로 다져놓은 위태로운 길 위에서, 어린 타마르는 홀로 왕국의 거대한 운명을 감당해야 할 순간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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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지아에 있는 성모영면 교회의 벽화 타마르 여왕 |
2. 왕관의 무게를 견뎌내다
1184년, 기오르기 3세가 사망하자 타마르는 조지아 최초의 단독 여성 군주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2.1. 흔들리는 왕좌
귀족들은 '여성 군주'라는 전례 없는 상황을 빌미로 타마르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녀의 권위를 집요하게 흔들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기 위한 조직적인 압박 속에서 젊은 여왕은 상당한 정치적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즉위를 지지해 준 막강한 종교 지도자 미하일 4세를 세속과 종교 권력의 정점인 재상으로 임명해야 했고, 아버지 시대의 충신들을 해임하라는 요구에도 굴복해야 했습니다.
2.2. 귀족들의 도전: '카라비(Karavi)' 설치 시도
귀족들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재무관 쿠틀루 아르슬란을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은 왕권을 명목상의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사실상의 '입헌 쿠데타'를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국정 자문 기구였던 귀족 평의회 '다르바지(Darbazi)'를 무력화하고, 입법과 사법권을 독점하는 새로운 기관 '카라비(Karavi)'를 설치하여 국정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이는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타마르의 정치적 수완이 빛을 발했습니다.
그녀는 먼저 쿠틀루 아르슬란을 신속하게 체포하여 반란의 구심점을 무너뜨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지지 세력이 많아 내전의 위험이 커지자, 타마르는 무력 충돌 대신 외교적 해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측근 여성 외교관이었던 크라바이 자켈리(Kravai Jakeli)와 흐바샥 초칼리(Khvashak Tsokali)를 보내 끈질긴 협상을 벌였습니다.
결국 내전을 원치 않았던 귀족들은 여왕에게 사과하고 충성을 맹세했으며, 타마르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요직에 앉히며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통치 초기를 뒤흔든 가장 큰 위기를 극복한, 파격적인 정치적 승리였습니다.
2.3. 첫 번째 결혼과 이혼
내부의 도전과 함께 외부의 압박도 거세졌습니다.
귀족들은 군대를 이끌고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낳기 위해 타마르가 결혼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1185년, 귀족들이 선택한 러시아의 왕자 유리 보골류프스키(George Rusi)와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유리는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잦은 음주와 소돔 행위(동성애) 등 거친 성격과 부도덕한 행실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쿠틀루 아르슬란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제압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진 타마르는 더 이상 귀족들의 선택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귀족 평의회를 설득하여 이혼을 승인받았고, 1187년 유리에게 막대한 위자료를 주어 콘스탄티노플로 추방했습니다.
당시 여성의 이혼은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으며, 이는 타마르가 더 이상 귀족들의 손에 움직이는 군주가 아닌, 스스로 왕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독립적인 통치자임을 만천하에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내부의 시련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 왕좌를 굳건히 한 타마르는 이제 조지아의 국경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3. 황금시대를 연 정복 군주
내부의 혼란을 잠재운 타마르는 조지아를 캅카스 지역의 패자로 만들고, '황금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이 영광의 여정에는 그녀의 곁을 지킨 이상적인 파트너이자 위대한 군사 지휘관이 있었습니다.
3.1. 이상적인 파트너, 다비트 소슬란
첫 번째 결혼의 실패를 교훈 삼아, 타마르는 두 번째 남편을 직접 선택했습니다.
그는 알라니아의 왕자이자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었던 다비트 소슬란이었습니다.
다비트는 단순한 왕의 남편(King Consort)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타마르의 가장 든든한 정치적, 군사적 동반자로서 그녀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조지아의 영광을 이끌었고, 그의 헌신적인 지원은 타마르가 마음껏 통치 역량을 펼칠 수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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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아 왕국 국서 다비트 소슬란 |
3.2. 제국의 영토를 넓힌 위대한 승리
타마르와 다비트 소슬란이 이끈 조지아 군대는 연전연승을 거두며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두 전투는 조지아의 황금시대를 상징하는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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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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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코르 전투 (11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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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시아니 전투 (12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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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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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아타베그, 아부 바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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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술탄국의 술탄, 루큰 앗딘(Rukn ad-D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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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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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바크르가 조지아의 보호령이었던 시르반을 침공하자, 시르반의
통치자가 타마르에게 도움을 요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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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루큰 앗딘이 이슬람 연합군을
결성하고, 타마르에게 모욕적인 항복 요구 서신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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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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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 군대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적군을
대파함. 아부 바크르는 간신히 도망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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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트 소슬란이 이끄는 조지아 군대가 적의 진영을 기습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 루큰 앗딘의 군대는 궤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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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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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는 적의 수도를 점령하고 칼리프의 깃발을 포함한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 이 승리로 조지아는 캅카스 남동부의 패권을
장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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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계에 조지아의 군사적 위력을 각인시킨 결정적 승리. 이
승리로 조지아는 중동 기독교 세계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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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바시아니 전투를 앞두고 루큰 앗딘이 보낸 편지는 조지아 궁정을 격분시켰습니다.
그는 사신을 통해 "모든 여자는 어리석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며, 만약 타마르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자신의 첩으로 삼겠지만, 기독교를 고집한다면 자신의 하렘에 있는 수많은 여인 중 하나로 만들 것이라 협박했습니다.
이 모욕적인 말에 격노한 조지아의 장군 자카리아 므카르그르젤리는 그 자리에서 사신의 뺨을 후려쳐 기절시켰습니다. (전승)
타마르는 사신에게 후한 상을 내려 돌려보내며 단호한 답변을 전했습니다.
"그대의 제안은 군대의 힘만을 믿을 뿐 신의 심판을 고려하지 않았구나. 나는 세상의 군대가 아닌, 그대가 저주하는 전능하신 하느님과 십자가의 힘을 믿는다. 그대의 뜻이 아닌 신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대의 심판이 아닌 신의 심판이 내릴 것이다!"
타마르는 전투에 앞서 맨발로 교회에 올라가 눈물로 기도했으며, 병사들 앞에서는 용맹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적의 수가 많다고 두려워하지 마시오.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직 신만을 믿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께 희망을 두십시오!"
3.3. 전략적 요충지, 트라페준타 제국
타마르의 통찰력은 군사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타마르는 자신의 조카들이었던 비잔티움 왕족 알렉시오스와 다비트 형제를 지원하여 흑해 연안에 트라페준타 제국을 건국하게 했습니다.
이는 조지아의 안보를 위한 탁월한 외교적 결정이었습니다.
이로써 조지아는 서쪽의 비잔티움 잔존 세력과 남동쪽의 룸 술탄국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완충 지대를 확보했으며, 흑해 무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적 이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영토 확장과 군사적 위업을 넘어, 타마르는 조지아 내부를 어떻게 다스렸으며 백성들의 삶에 어떤 빛을 가져다주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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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3년 조지아와 주변국들 |
4. 백성을 사랑한 자비로운 통치자
타마르가 '황금시대'의 군주로 칭송받는 이유는 단순히 영토를 넓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백성을 사랑하는 자비로운 통치자이자,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였습니다.
4.1. 시대를 앞서간 개혁
타마르는 중세 시대의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녀는 왕국에서 사형과 모든 형태의 신체 고문을 폐지했습니다. (전승)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 자비로운 조치이자, 당시 세계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귀족들의 권력 분점 요구를 수용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귀족 평의회(다르바지)를 통해 주요 국정을 논의했습니다.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이는 군주와 귀족이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의회 정치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4.2. 문화와 신앙의 수호자
타마르의 통치 아래 조지아의 문화와 신앙은 그야말로 만개했습니다.
조지아 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쇼타 루스타벨리의 서사시 '표범 가죽을 쓴 기사'는 바로 타마르 여왕에게 헌정된 작품으로, 그녀가 문화와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였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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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타 루스타벨리가 타마르 여왕에게 그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
그녀는 또한 바위산을 깎아 만든 거대한 바르지아(Vardzia) 동굴 수도원을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건립했습니다.
그녀의 후원은 조지아 국경을 넘어 팔레스타인, 키프로스, 아토스산 등 해외의 기독교 성지에까지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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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지아 동굴 |
4.3. 여왕의 두 얼굴: 낮과 밤
타마르의 삶을 묘사하는 일화들은 그녀가 얼마나 자비롭고 인간적인 통치자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낮에는 화려한 왕의 복장을 하고 현명하게 국정을 처리했지만, 밤에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기도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줄 옷을 직접 바느질했다고 전해집니다.
한 번은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값비싼 루비 허리띠를 차려다가, 밖에서 구걸하던 거지를 돕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이를 외면하게 만든 자신의 허영심을 크게 자책하며, 그 루비 허리띠를 성모 마리아에 봉헌했습니다.
또 다른 일화에서는, 그녀가 꿈속에서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 왕좌를 보고 다가서자 한 노인이 나타나 "이 왕좌는 당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열두 명의 사제를 위해 제의를 만든 당신의 하녀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잠에서 깬 타마르는 즉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열두 사제의 제의를 바느질하여 봉헌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이룬 위대한 군주에게도 마지막 순간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조지아에 무엇을 남겼으며, 후세는 그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5. 조지아의 마음속에 영원히 잠들다
타마르 여왕의 죽음은 조지아 황금시대의 끝을 알리는 서막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유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조지아인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5.1. 의문의 죽음과 사라진 무덤
평생에 걸친 엄격한 금욕 생활과 국정의 과로는 결국 그녀의 건강을 해쳤습니다.
최고의 의사들도 병의 원인을 찾지 못했고, 온 백성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타마르는 1213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바그라티오니 왕가의 가족 묘지인 겔라티 수도원에 안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후세의 적들이 무덤을 훼손할 것을 우려해 비밀스러운 장소에 묻었다는 전설, 심지어 성지 예루살렘으로 이장되었다는 전설까지 전해지며, 오늘날까지도 그녀의 정확한 무덤 위치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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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화유산인 겔라티 수도원, 타마르 여왕이 묻혔다고 추정되는 곳 |
5.2. 불멸의 유산
비록 그녀의 무덤은 찾을 수 없지만, 타마르의 유산은 조지아 곳곳에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
조지아 정교회는 그녀를 '성인, 올바른 신앙의 왕 타마르(Holy Righteous Queen Tamar)'로 추대하여 오늘날까지 그녀를 기리고 있으며, 그녀는 조지아의 가장 강력했던 황금시대를 이끈 위대한 군주로서 조지아 민족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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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아 50라리 지폐의 타마르 여왕 |
조지아의 작가 그리고리 로바키제는 그녀의 사라진 무덤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그녀가 조지아인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는지를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아무도 타마르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그녀는 모두의 것이자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그녀의 무덤은 조지아인의 마음속에 있다. 그리고 조지아인의 인식 속에서 그것은 무덤이 아니라, '위대한 타마르'라는 시들지 않는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병이다."
이 글은 조지아의 군주 타마르(თამარ, Tamar)를 둘러싼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후대 기록·현대 연구에서 널리 알려진 큰 흐름에 따라 재구성한 서사형 역사 글입니다.
다만 중세 조지아의 기록은 왕권 정당화와 종교적 수사가 섞여 전해지는 경우가 많고, 전투 연도(예: 바시아니 1202/1203)나 인물 관계처럼 자료마다 표기가 갈리는 대목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해를 돕기 위해 대표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했으며, 논쟁 여지가 있는 부분은 “전해진다/기록에 따르면”의 톤으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Tamar of Georgia—styled “King” (mep’e) though female—rose after her father Giorgi III crushed the 1177 revolt.
Sole monarch in 1184, she confronted nobles who tried to curb royal power through a new council (Karavi).
Tamar arrested the ringleader, negotiated to avert civil war, and installed loyal officials.
Pressured to marry, she wed the Rus’ prince Yuri, then secured a rare divorce and exiled him.
She later chose David Soslan as husband and commander; together they drove Georgia’s expansion, winning at Shamkor (1195) and Basiani (1202/1203).
In 1204 she supported relatives to found the Empire of Trebizond, gaining a Black Sea buffer and influence.
Her “golden age” also fostered literature, including Rustaveli’s The Knight in the Panther’s Skin.
Tamar died in 1213; her burial place is uncertain, but her legacy remains central to Georgian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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