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대 국상 명림답부: 폭군을 넘어 국가 체제를 만든 킹메이커 (Myeongnim Dap-bu of Goguryeo)


고구려의 초대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 심층 연구


1. 격동의 시대, 고구려를 재편한 거인

2세기 중반의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안으로는 제7대 차대왕(次大王)의 포악한 통치가 국가의 기강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선왕인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아들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인자하지 못한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밖으로는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후한(後漢)의 군사적 압박이 끊임없이 국경을 위협하며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이러한 내우외환의 격동기 속에서, 한 명의 인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고구려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의 이름은 명림답부(明臨答夫)였다.

본 글은 고구려 최초의 국상(國相)이자 구국의 명장인 명림답부의 생애와 업적을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는 폭군을 시해하는 혁명적 결단을 통해 혼란을 종식시켰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며 정치 질서를 재편했다. 

나아가 국상이라는 최고 관직을 창설하여 고구려 초기 국가 시스템의 기틀을 다졌으며, 외적의 대규모 침공을 탁월한 전략으로 격퇴하여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처럼 명림답부는 단순한 권신이나 무장을 넘어, 격변의 시대에 국가의 백년대계를 설계한 위대한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다.

그의 행적을 따라가기 위해, 먼저 그의 알려지지 않은 출신 배경과 초기 생애를 분석하며 그가 어떻게 역사의 중심에 설 수 있었는지를 탐색해보고자 한다.


2. 출신 배경과 초기 생애: 연나부의 미관(微官)에서 역사의 중심으로

한 인물의 사상과 행동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출신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고 어떤 사회적 위치에서 경력을 시작했는지는 그의 세계관과 후일의 결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명림답부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다.


기록에 따르면, 명림답부는 고구려 5부(五部) 중 하나인 연나부(椽那部) 출신이다. 

그가 정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맡았던 관직은 조의(皂衣)였다. 

'조의'는 고구려 10여 등급의 초기 관등 체계에서 하위직에 속하는 관직으로, 그의 미미한 공식적 지위를 보여준다. 

부족제적 성격이 강했던 당시 고구려 사회를 감안할 때, 그는 연나부에 소속된 중간급 관료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낮은 신분의 미관(微官)이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최고 권력자로 부상할 수 있었는지는 그의 생애가 던지는 가장 큰 질문 중 하나이다.


더 큰 의문은 그의 나이에 있다. 

『삼국사기』는 그가 차대왕을 시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의 나이를 99세, 사망했을 때는 113세였다고 기록한다. 

이는 동시대의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비현실적인 재위 기간 및 수명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단순한 사료적 오류로 치부하기 어렵다. 

학계에서는 이를 후대의 역사가들이 복잡하고 문제가 많았던 왕위 계승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해석한다. 

즉, 명림답부라는 초인적으로 장수한 '킹메이커'를 설정함으로써, 태조대왕에서 신대왕으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권력 이양기에 일관된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사료 편찬의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기록된 나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이면에 숨겨진 역사 서술의 의도를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처럼 명림답부의 초기 생애는 출신 부족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낮은 직책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위기 앞에서 폭군을 시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명적 결단을 내렸다는 점이다. 

다음 장에서는 그의 생애를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165년 정변의 전개 과정과 그 이면에 숨겨진 복합적인 의미를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명림답부 상상화


3. 왕을 시해하고 왕을 세우다: 165년 정변의 전개와 의미

고대 국가에서 신하가 왕을 시해하는 정변은 천륜을 거스르는 대역죄로 간주되었으며, 성공하더라도 단순한 권력 찬탈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극단적인 결단이 부패한 체제를 무너뜨리고 국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명림답부가 주도한 165년의 정변은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 고구려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정변의 직접적인 배경은 차대왕의 폭정이었다. 

본래 용맹하여 여러 공을 세웠던 차대왕은 왕위에 오른 후 인자함을 잃고 포악한 군주로 변모했다. 

그는 형인 태조왕을 압박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태조왕의 적자인 막근(莫勤)과 막덕(莫徳)을 살해하는 등 잔혹한 숙청을 이어갔다. 

명림답부는 바로 이 지점에서 거사의 명분을 찾았다. 

그는 "백성들이 그 가혹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이유로 들며 민심을 등에 업고 행동에 나섰다.


165년 10월, 당시 99세로 기록된 연나부의 조의 명림답부는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했다. 

폭정이 끝나자 그는 차대왕 시절 폭정을 피해 산속에 은둔해 있던 왕의 동생 백고(伯固)를 찾아내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이가 바로 고구려 제8대 신대왕(新大王)이다.


그러나 이 정변의 주도자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사기』가 명림답부를 유일한 주도자로 묘사하는 반면, 『삼국유사』는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삼국유사』는 "신대왕이 직접 태조왕과 차대왕을 모두 시해하고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정변의 배후에 신대왕 자신이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 상반된 기록은 우리에게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하나는 명림답부가 신대왕 백고가 비밀리에 기획한 왕위 찬탈의 공개적인 얼굴, 즉 명분을 제공하는 실행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 내에 정변의 주체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역사적 전통이 존재했을 가능성이다.

어느 쪽이든, 이 사건은 한 충신의 의거라는 단순한 서사를 넘어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이 얽힌 복잡한 정치 드라마였음을 보여준다.


이 정변은 고구려의 정치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이전까지 고구려의 최고 지배층은 왕족인 계루부(桂婁部)와 과거에 왕을 배출했던 소노부(消奴部)가 양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족이 아닌 연나부 출신의 명림답부가 국정을 장악하면서 권력 구조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그의 부상을 기점으로 연나부는 이후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는 '왕비족'으로 급부상하며 계루부, 소노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변의 성공은 단순한 왕위 교체를 넘어, 새로운 정치 제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4. 초대 국상(國相): 새로운 정치 질서의 설계자

한 인물의 권력 장악이 개인의 영달을 넘어 국가 운영 시스템의 발전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개혁이라 평가받을 수 있다. 

정변 이후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과정은 단순히 명림답부 개인의 리더십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신대왕 역시 차대왕의 아들 추안(鄒安)을 사면하고 봉작을 내리는 등 반대 세력을 포용하여 조정의 안정을 꾀하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공동의 노력 속에서 명림답부는 권력을 제도화하는 과정을 통해 고구려의 정치 질서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정변 이듬해인 166년, 신대왕은 중대한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에 최고 관직이었던 좌보(左輔)와 우보(右補) 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통합한 새로운 최고 직책인 '국상(國相)'을 신설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초대 국상의 자리에 명림답부를 임명했다. 

이는 단순히 관직 명칭을 바꾸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변의 최고 공로자이자 실권자인 그에게 국정 전반을 총괄할 막강한 권한을 공식적으로 부여함으로써,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국정 운영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국상으로서 명림답부가 장악했던 권한은 실로 막대했으며, 왕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의 권한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국정 총괄: 귀족회의체인 제가회의(諸加會議)의 의장으로서 왕의 옹립과 폐위, 대외 군사 문제, 중대 범죄 처리 등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안들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기능을 주도했다.

• 군사 통수권: 국상 직위에 더하여 군사 직책인 '패자(沛者)' 벼슬을 받아, 나라 안팎의 모든 군사(內外兵馬)를 통솔하는 막강한 병권을 장악했다.

• 부족 지배권: 양맥(梁貊) 부락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받아,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지방 부족 단위까지 확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국상 제도의 창설은 고구려 초기 정치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국상은 왕권을 보좌하며 중앙 집권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제가회의의 의장으로서 귀족 세력을 대변하며 왕권을 견제하는 이중적 성격을 가졌다. 

이 제도를 통해 고구려는 왕권과 신권, 중앙과 지방 세력 간의 균형을 이루며 정치적 안정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명림답부의 탁월한 리더십은 내정 개혁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국상으로서 장악한 군사 통수권을 바탕으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그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의 생애 가장 빛나는 군사적 업적인 좌원 대첩이 바로 그것이다.


5. 좌원(坐原) 대첩: 노련한 전략가의 승리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을 때, 수적 열세와 불리한 전황을 극복하는 것은 오직 지휘관의 냉철한 전략적 판단에 달려 있다. 

172년, 고구려는 후한의 대규모 침공으로 인해 건국 이래 최대의 군사적 위기를 맞았고, 이때 노재상 명림답부의 전략가적 면모가 빛을 발했다.


172년 11월, 후한의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이끄는 대군이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이 침공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후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한나라는 영제(靈帝)의 치세 아래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었으며, 10여 년 뒤에는 황건적의 난(184년)이 발발할 정도로 내부 혼란이 극심했다. 

특히 요동 지역은 사실상 공손씨(公孫氏) 세력의 독자적인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 

따라서 경림의 침공은 한나라 제국의 총력을 동원한 원정이라기보다는, 중앙의 지원이 미미한 상태에서 지방관이 주도한 군사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적의 기세가 워낙 강력했기에 고구려 조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신대왕이 신하들을 모아 대응책을 논의하자, 대부분의 신하들은 당장 출전하여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명림답부만이 이 주장에 반대하고 나섰다. 

100세가 넘는 노장이었던 그는 수많은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로 전장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왕에게 나아가 지구전과 청야전술(淸野戰術)을 결합한 대담한 전략을 건의했다. 

『삼국사기』는 당시 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한다.


"한나라는 크고 백성이 많은데다 지금 강한 병사들이 멀리 싸우러 왔으니, 그 칼날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게 쌓은 뒤, 들판을 비우는 청야(淸野)로써 기다리면 저쪽은 반드시 몇 달 내에 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이니 그때 우리가 굳센 병사로 들이치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의 논리는 명확했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정면 대결은 피해야 하며, 멀리서 원정 온 적의 가장 큰 약점, 특히 중앙의 지원이 부실할 적의 약점은 보급선에 있으므로 이를 끊는 것이 승리의 열쇠라는 것이었다. 

신대왕은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 성벽을 더욱 높고 견고하게 쌓고, 주변의 모든 곡식을 거두어 적이 약탈할 식량을 없애버렸다.


명림답부의 예측은 정확했다. 

성을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한 한나라 군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결국 퇴각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명림답부는 수천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퇴각하는 적의 뒤를 맹렬히 추격했다. 

좌원(坐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한나라 군을 대파했고, 기록에 따르면 "한 필의 말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위대한 승리는 고구려의 서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대외적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국가적 자존심을 고취시킨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대승을 이끈 노장은 고구려의 구국영웅으로 우뚝 섰으며, 그의 마지막은 위대한 업적에 걸맞은 예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6. 죽음과 역사적 유산

한 위대한 인물의 생애는 죽음으로 끝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치며 그 가치를 평가받는다. 

명림답부는 그의 삶 전체를 통해 고구려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고,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좌원 대첩의 위업을 달성한 지 7년 후인 179년 9월, 명림답부는 11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에 신대왕은 지극한 슬픔을 표했다. 

왕은 몸소 그의 빈소를 찾아 통곡했으며, 7일 동안 조회를 파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애도했다. 

그의 장례는 국가적 예우 속에서 치러져, 좌원 대첩의 공으로 식읍으로 받았던 질산(質山)에 장사지냈다. 

또한 왕은 수묘가(守墓家) 20호를 두어 그의 무덤을 대대로 지키게 했다. 

이는 당시 명림답부가 누렸던 위상이 단순히 한 명의 신하를 넘어 국가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공교롭게도 그를 깊이 신뢰했던 신대왕 역시 불과 석 달 뒤인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두 사람의 죽음은 그들이 함께 열었던 한 시대가 막을 내렸음을 상징하는 듯했다.

명림답부가 고구려 역사에 남긴 공헌은 다각적이며 심대하다. 

그의 역사적 유산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1. 정치 개혁가: 그는 폭정을 종식시키는 과감한 결단으로 국가적 혼란을 수습했으며, 비효율적인 좌·우보제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고구려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는 고구려가 보다 체계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2. 구국의 명장: 좌원 대첩에서 보여준 그의 탁월한 전략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국가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했다. 

청야전술과 지구전을 통해 적의 약점을 파고든 그의 지략은 고구려 군사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3. 권력 구조의 재편자: 왕족이 아닌 연나부 출신으로서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 그의 성공은 고구려 지배층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연나부는 왕비족으로 부상하여 계루부, 소노부와 함께 고구려 정치를 이끄는 핵심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생애는 혼란한 시대에 한 명의 지도자가 국가의 진로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명림답부의 유산은 고구려의 역사뿐만 아니라, 위기 극복과 국가 경영의 지혜를 모색하는 오늘날에도 깊은 시사점을 던진다.


7. 고구려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재상

명림답부의 삶은 한마디로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돌파하며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 거인'의 서사였다.

그는 차대왕의 폭정으로 무너져가던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왕을 시해하는 혁명적 선택을 했고, 신대왕을 옹립하여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단순한 정변의 주도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 최초의 국상으로서 국정 운영과 군사 통수권을 총괄하며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의 초석을 다졌다. 

그의 리더십 아래 고구려는 내정의 안정을 이루고 국가 시스템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는 좌원 대첩에서 후한의 대군을 상대로 청야전술이라는 탁월한 지략을 발휘하여 완벽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


궁극적으로 명림답부는 혼란했던 시대의 단순한 산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핵심적인 설계자였다. 

그의 생애는 초기 국가의 유동적인 정치 지형 속에서 전통적인 왕족 출신이 아닌 인물이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삼아 국가의 권력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이후 한 세기 동안 고구려를 정의할 제도적, 정치적 유산을 남길 수 있었는지를 명확히 증명한다. 

그의 이름은 고구려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재상으로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은 『삼국사기』 등 공개된 사료·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명림답부의 생애와 제도·전쟁사를 한 흐름으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해설 글입니다.

다만 2세기 고구려 관련 기록은 연대·나이·정변 주체처럼 서로 충돌하거나 과장된 듯 보이는 대목이 있어, 본문에서는 그런 지점을 “기록의 한계”로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특정 단정이 아니라,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는 관점(가능성·해석)을 함께 담았습니다.


Myeongnim Dapbu, the first “Guksang” (state chancellor) of Goguryeo, rose during a mid-2nd-century crisis. 

Sources describe him as a minor official from Yeonna-bu who led the 165 coup that killed the tyrannical King Chadae and enthroned Baekgo as King Sindae. 

In 166, the court abolished the old top offices and created the post of Guksang, granting him authority over state affairs and the army. 

His greatest military feat came in 172, when he advised a scorched-earth, siege-based strategy against the Later Han invasion led by Geng Lin, then pursued and annihilated the retreating force at Jwawon. 

Reported ages such as 99 and 113 are often read as narrative exaggeration. 

He died in 179 and received exceptional royal mourning, leaving reforms, victory, and a reshaped power structure as his leg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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