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바다를 건너온 사랑, 허왕후와 파사석탑 이야기
수수께끼의 돌탑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허왕후의 능, 그 곁에는 아주 오래된 돌탑 하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습니다.
‘파사석탑’이라 불리는 이 탑은 높이가 1.5미터 남짓하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떼어낸 듯 돌의 모서리는 닳고 깨져 원래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어째서 탑은 이렇게 닳고 깨진 모습으로 남게 된 걸까요?
여기에는 먼 옛날부터 내려온 간절한 믿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뱃사람들은 거친 바다로 나가기 전 이곳을 찾아와 안전한 항해를 빌며 탑의 돌조각을 조금씩 떼어 갔다고 합니다.
이 탑의 돌을 지니고 있으면 성난 파도가 잠잠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조각조각 떼어진 탑의 상처는 수많은 사람의 소망이 남긴 흔적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 탑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머나먼 바다를 건너온 한 공주의 사랑과 운명을 지켜준 신비한 돌이었습니다.
가락국에서 시작된 이 놀라운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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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으로 알려진 초상화 |
1장: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왕, 김수로
가락국은 날마다 새로워졌습니다.
포구에는 고기잡이배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흙먼지 날리는 길 위로는 새로운 집과 성벽을 짓는 씩씩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가락국의 첫 번째 왕, 김수로는 여섯 개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의 주인공답게 나라의 기틀을 단단히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홉 명의 부족장인 구간(九干)들에게는 한 가지 큰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왕의 나이가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왕비를 맞이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구간들이 모두 모여 김수로왕에게 간절히 아뢰었습니다.
“대왕이시여, 왕위에 오르신 이래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습니다. 부디 저희 신하들의 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골라 왕비로 맞이하시옵소서.”
신하들의 충심 어린 간청에 김수로왕은 온화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하늘의 뜻이었소. 나의 배필 또한 하늘이 정해줄 것이니, 경들은 아무 걱정 말고 기다리시오.”
김수로왕은 하늘이 정해준 인연을 기다려야 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유천간과 신귀간이라는 두 신하를 불러 명령했습니다.
“유천간은 말을 끌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고, 신귀간은 승점으로 가서 내가 기다리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
두 신하는 왕명을 받들어 각자 망산도와 승점으로 달려갔습니다.
수로왕은 하늘을 바라보며 운명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 시각, 바다 건너 아득히 먼 나라에서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꿈과 함께 한 공주의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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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로왕 영정 |
2장: 아유타국 공주의 운명
바다 건너 멀고 먼 곳에 아유타국이라는 평화롭고 번성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허황옥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지요.
그녀의 나이, 열여섯 되던 해 5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공주의 아버지인 왕과 어머니인 왕비가 동시에 아주 신비로운 꿈을 꾸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왕과 왕비는 딸을 조용히 불렀습니다.
“얘야, 어젯밤 꿈에 하늘의 가장 높으신 분, 상제께서 나타나셨단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길, ‘가락국의 왕 수로는 하늘이 보낸 귀한 사람이다. 그가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너희는 공주를 보내 그의 짝이 되게 하라’고 명하시고는 하늘로 올라가셨지.”
부모님의 꿈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하늘의 계시였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한번 들어본 적 없는 머나먼 나라의 왕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어린 공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부모님의 꿈에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면, 제가 그 뜻을 따라야겠지요. 두렵지만 가락국으로 떠나겠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인 열여섯 살의 공주 허황옥.
그녀는 부모님과 눈물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수많은 신하와 진귀한 보물을 싣고 마침내 가락국을 향한 머나먼 항해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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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도에 추정한 아유타국의 위치 |
3장: 거친 바다를 잠재운 파사석탑
허황옥 공주가 탄 배가 동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거대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이 덮쳐왔습니다.
마치 바다의 신이 노한 것처럼 하늘은 어두워지고 바다는 거칠게 요동쳤습니다.
“공주님! 파도가 너무 거세어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간 모두 바다에 빠지고 말겠습니다!”
한 뱃사공이 절망적으로 외쳤습니다.
결국 공주의 배는 아유타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항해에 실패한 공주는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아뢰었습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왕은 창고에서 신비한 돌탑 하나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 탑을 배에 싣고 가거라. 그러면 바다의 신이 노여움을 풀고 너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파사석탑'이었습니다.
다시 항해에 나선 공주의 배에 파사석탑을 싣자, 거짓말처럼 거칠게 날뛰던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하늘은 맑게 개고 순풍이 불어왔습니다.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단 공주의 배는 마치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순조롭게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마침내 신비한 돌탑의 가호 아래, 허황옥 공주가 탄 배는 가락국의 해안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4장: 운명적인 첫 만남
가락국의 망산도에서 기다리던 유천간의 눈에 멀리서 다가오는 붉은 돛을 단 배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즉시 산봉우리에 횃불을 올렸습니다.
그 신호를 본 신귀간은 말을 달려 왕궁으로 향했습니다.
“대왕이시여!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깃발을 단 배가 나타났습니다!”
보고를 받은 김수로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당장 구간들을 보내 손님을 맞이하라 명했습니다.
하지만 해안에 도착해 공주를 만난 신하들은 뜻밖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처음 보는 분들을 어찌 믿고 섣불리 따라가겠습니까? 저를 부르신 왕께서 직접 나와 맞이하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공주의 당당한 태도에 신하들은 놀랐지만, 그 말을 그대로 왕에게 전했습니다.
김수로왕은 공주의 말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는 즉시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장막을 쳐 임시 궁전(유궁)을 만들고 공주를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 사이, 허황옥 공주는 조용히 언덕에 올라 자신이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예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는 머나먼 고향의 풍습에 따라, 이 땅의 신에게 자신의 순결함과 경건한 마음을 바치는 성스러운 약속이었습니다.
공주의 눈에 들어온 가락국의 첫 모습은 낯설지만 평화로웠습니다.
아유타국의 화려함과는 다른, 소박하지만 힘이 넘치는 풍경이었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언덕 위의 임시 궁전에서 처음으로 마주했습니다.
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라 합니다. 부모님께서 꿈에서 상제의 계시를 받고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자 김수로왕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지금까지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하늘이 맺어준 운명을 확인한 두 사람은 그곳에서 이틀 밤과 하루 낮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8월 1일, 두 사람은 나란히 수레에 올랐습니다.
수많은 신하와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진귀한 보물들이 그 뒤를 따랐고, 성대한 행렬은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대궐로 향했습니다.
가락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5장: 가락국의 어머니와 수호탑
허황옥은 가락국의 왕비가 된 후, 백성들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여 모든 이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김수로왕과의 사이에서 10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아 가락국 왕실을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느 날, 허왕후는 김수로왕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저의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아들 열 명 중 두 명에게는 제 성인 '허씨'를 물려주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김수로왕은 왕후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허씨'가 탄생하게 되었고, 허왕후는 김해 허씨의 시조모가 되었습니다.
훗날 사람들은 수로왕의 능 대문에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는 문양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는 허왕후가 머나먼 인도에서부터 가져온 신성한 상징으로, 두 나라의 운명적인 만남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파사석탑은 '호계사'라는 절에 소중히 모셔졌습니다.
먼 훗날,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이 탑에 대해 “어찌 허왕후만 도와 이 언덕에 왔겠는가? 천 년의 세월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아왔다네.”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이 시처럼, 파사석탑은 단순한 돌탑이 아니라 가락국과 그 후손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수호탑으로 백성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일연 스님은 직접 김해를 찾아와 파사석탑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탑은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4면에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는 미세한 붉은 반점이 있는데, 그 재질이 부드럽고 좋아서 이 지역에서 나는 돌이 아니다.
허왕후는 가락국의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었고, 그녀가 가져온 파사석탑은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수호신이 되어 오랜 세월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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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허황후릉 옆에 서있는 파사석탑 |
2000년을 이어온 인연
오랜 세월 동안 허왕후와 파사석탑 이야기는 신비로운 전설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2019년,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과학자들이 파사석탑의 돌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일연 스님의 기록처럼 정말로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암석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이 발견은 《삼국유사》의 기록이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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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인도에서 허황옥을 주제로 한 기념우표가 공동발행 |
2000년 전, 머나먼 바다를 건너온 사랑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인연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김해시는 허왕후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아요디아시와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인도 아요디아시에는 '허왕후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두 나라의 오랜 우정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시간을 넘어 역사가 되고, 국경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줍니다.
김해에 있는 낡고 이지러진 파사석탑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2000년 전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와 끝없이 이어지는 인연의 소중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새로운 재미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 글은 《삼국유사》와 지방 전승, 그리고 현대 연구에서 알려진 내용을 바탕으로 허왕후와 파사석탑 이야기를 재구성한 역사 교양·스토리텔링 글입니다.
설화와 전승으로만 내려오는 부분은 1차 사료가 부족해 사실로 단정하기 어렵고, 세부 설정과 장면·대사는 독자의 몰입을 위해 소설적으로 덧붙인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인물, 지명, 연대와 같은 큰 뼈대는 현재 확인 가능한 사료와 연구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했습니다.
혹시 내용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이나 논쟁적인 해석이 보인다면, 근거와 함께 알려주시면 이후 글에서 보완·수정하는 데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This article retells the Korean legend of Queen Heo Hwang-ok, the princess sent by divine command from the distant Ayuta kingdom to marry King Suro of Gaya.
After storms drove her ship back, she sailed again carrying the sacred Pasa Stone Pagoda, which calmed the sea and allowed her to reach Gimhae.
Heo became a beloved queen, bore many children and founded the Heo clan, while the pagoda was cherished as a guardian that protected sailors and the land from danger.
Centuries later, scholars and scientists re-examined the legend and the stone’s unusual origin, leading to new cultural ties between modern Gimhae and India and keeping this 2,000-year-old story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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