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인가, 희생양인가: 고구려 모본왕, 기록 뒤에 숨겨진 진실
1.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폭군
서기 53년 겨울, 고구려의 심장부에서 한 군주가 쓰러졌다.
자신의 측근 시종 두로(杜魯)의 칼에 찔려 생을 마감한 제5대 국왕 모본왕(慕本王).
그의 죽음은 한국사에서 신하에 의해 군주가 시해당한 최초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역사는 그를 ‘최초의 폭군’이라는 낙인으로 기억한다.
《삼국사기》는 살아있는 인간을 방석과 베개로 삼고, 충언을 하는 신하를 활로 쏘아 죽인 광기 어린 독재자의 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기록의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동아시아의 패권국이었던 후한(後漢)의 심장부를 향해 대규모 군사 원정을 감행한 대담한 정복 군주였다.
오늘날의 베이징 인근과 산시성 깊숙한 내륙까지 진격하여 후한 조정을 경악게 한 그의 야망은, 폭군이라는 단편적 이미지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강렬한 모순을 드러낸다.
과연 모본왕의 진짜 얼굴은 무엇인가?
대륙을 뒤흔든 영웅이었다가 광기에 휩싸인 폭군으로 변모한 것일까, 아니면 승자의 기록 이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본 글은 모본왕에게 씌워진 ‘폭군’이라는 굴레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자 한다.
승자의 기록이라는 프리즘을 걷어내고, 상반된 기록의 파편들을 맞추어 그의 입체적 모습을 복원하고, 그 죽음 뒤에 도사린 거대한 정치적 음모의 실체를 파헤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가 단순히 과거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어떻게 기록되고 재구성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먼저, 역사서가 기록한 그의 핏빛 초상부터 따라가 보자.
2. 폭군의 초상: 피로 물든 왕좌
역사서는 모본왕의 통치 후반부가 어떻게 광기와 폭정으로 얼룩졌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재위 4년(서기 51년)을 기점으로 그의 성격이 돌변하여, 그 포악함이 날마다 더해졌다고 서술한다.
이는 고구려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잔혹성의 발현이었으며, 그의 비극적 최후를 정당화하는 서막과도 같았다.
그의 폭정을 상징하는 가장 기이하고 끔찍한 기록은 바로 ‘인간 가구’ 이야기다.
이 기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그의 비인간성을 극대화하는 서사적 장치이며, 둘째는 그의 죽음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명분이다.
"자리에 앉을 때는 항상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 삼아 누웠다. 사람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고 죽였다." - 《삼국사기》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존엄성이 완전히 짓밟혔던 당시 궁궐의 공포를 생생히 전한다.
왕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며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한 신하는 속으로 절규했을 것이다.
"제발... 폐하께서 뒤척이지 않으시길...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가 나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잔인함을 넘어, 그의 정신이 이성적 통제의 범위를 벗어났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고발이다.
소통과 정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군주에게 직언을 고하는 것은 충신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지만, 모본왕에게 간언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충직한 신하가 용기를 내어 바른말을 하면, 그는 그 자리에서 활을 당겨 신하의 심장을 꿰뚫어 버렸다.
왕의 귀가 닫히고 칼과 활이 정치를 대신하는 순간, 궁궐은 더 이상 국정의 중심이 아닌 도살장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평가는 후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은 모본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준엄하게 평가한다.
"모본(慕本)은 사납고 어질지 못하여, 간하는 신하를 해치고 죽였으니, 그가 좋게 죽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 기록만 놓고 본다면, 모본왕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희대의 폭군이다.
그러나 그의 또 다른 행적은 이 단죄와도 같은 평가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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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역사복원협회 고구려 5대 국왕 모본왕 |
3. 정복 군주의 야망: 기록된 업적의 이면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모본왕의 기록에 나타난 이 극단적 모순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폭군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로 그를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통치 기록 속에 폭정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유능한 군주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대륙을 향한 대담한 야망은, 그가 결코 단순한 광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의 입체적 평가를 위해서는 이 상반된 기록의 이면을 반드시 들여다봐야 한다.
3.1. 애민군주(愛民君主)의 흔적
모본왕 재위 2년(서기 49년), 고구려에는 거센 폭풍과 함께 여름에 서리와 우박이 쏟아지는 심각한 자연재해가 닥쳤다.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때 《삼국사기》는 모본왕이 "사신을 보내 국내의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훗날의 폭군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훗날 신하들에게 쫓겨난 또 다른 폭군인 14대 봉상왕은 극심한 흉년에도 백성의 굶주림을 외면한 채 궁궐 증축에만 몰두하다가 민심을 잃고 폐위되었다.
반면, 모본왕은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통치자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인 백성 구휼에 나섰다.
이는 최소한 그의 통치 초기에는 민생 안정에 힘쓰는 정상적인 군주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3.2. 대륙을 뒤흔든 대담한 원정
같은 해인 서기 49년, 모본왕은 고구려의 군사력을 유감없이 과시하는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감행한다.
그의 군대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대국이었던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대대적으로 습격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전과는 오랫동안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우선 이 원정의 지리적 의미는 실로 엄청나다.
우북평, 어양, 상곡은 현재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 인근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태원은 그보다 훨씬 서쪽 깊숙이 들어간 산시성의 중심지였다.
이는 단순한 국경 약탈이 아니라, 후한의 심장부를 직접 겨냥한 대담하고 치밀한 원정이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일부 기록의 불일치로 인해 이 원정의 주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중국 측 사서인 《후한서》 〈광무제본기〉는 침략의 주체를 고구려가 아닌 '맥인(貊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원로 역사학자 이병도 등은 초기 고구려가 이처럼 깊숙한 내륙까지 원정할 국력이 있었는지에 의문을 표하며, 이 기록이 고구려가 아닌 다른 예맥 계통 부족이나 선비족의 활동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당시의 지정학적 상황을 분석하며 이러한 회의론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시한다.
당시 중국은 왕망의 신나라 붕괴 이후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하며 혼란을 갓 수습한 상태였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지방 행정 구역을 축소하고 국경 방어에 소극적이었으며, 북방 국경 지대는 오환, 선비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극도로 불안정했다.
모본왕은 바로 이 권력의 공백기를 놓치지 않고 전략적으로 파고든 것이다.
특히 고구려가 당시 북방의 강자로 부상하던 선비족과 연합 전선을 구축했을 가능성은 이 대규모 원정을 충분히 가능하게 만든다.
이 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후한의 요동태수 채융(祭肜)은 무력으로 이를 막아내는 대신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며 화친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사실상 후한이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에 굴복하여 외교적, 물질적 대가를 지불하고 평화를 구걸했음을 의미하는, 고구려의 완벽한 군사적, 외교적 승리였다.
이처럼 재위 초기, 백성을 구휼하고 대륙의 판도를 흔들 만큼 유능한 정복 군주였던 왕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자신의 신하들을 베개 삼아 잠드는 잔혹한 폭군으로 돌변하여 암살당할 수 있었을까?
이 풀리지 않는 의문의 열쇠는 그의 죽음, 즉 '암살' 그 자체에 숨겨져 있다.
4. 기획된 암살: 정변(政變)의 서막
서기 53년, 모본왕은 자신의 측근 시종이었던 두로의 칼에 찔려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단순히 한 폭군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의 결과가 아니었다.
기록 곳곳에 남겨진 단서들은 이 사건이 고구려 초기 왕실의 권력 구도를 뿌리부터 뒤흔든, 치밀하게 기획된 정변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4.1. 암살자 두로와 그 배후
암살범 두로는 모본왕의 출신지이기도 한 '모본' 지역 출신 관리로, 왕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최측근이었다.
그는 왕의 '인간 베개' 중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삼국사기》는 두로가 단독 범인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암시한다.
어느 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울고 있던 두로에게 어떤 익명의 인물이 다가와 그를 부추긴다.
"대장부가 어찌 우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라고 하였다. 지금 왕이 포악한 짓으로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이다. 그대가 그를 도모하라!"
여기서 우리는 찬탈 세력의 교묘한 논리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나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다'라는 구절은 고대 중국의 유교 경전인 《서경(書經)》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는 암살의 배후에 높은 수준의 학문적 소양을 갖춘 지배 엘리트 집단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더 큰 미스터리는 암살자 두로의 행방이다.
왕을 시해한 직후, 그는 역사 기록에서 완벽하게 증발해버린다.
폭군을 제거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는 기록도, 대역죄인으로 처벌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이는 두로가 거대한 정치 세력의 '도구'로 이용된 뒤, 임무 완수 후 사건의 전모를 은폐하려는 배후 세력에 의해 조용히 제거되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추정)
4.2. 죽음의 최대 수혜자, 태조대왕
모본왕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세력은 누구인가? 그 답은 왕위 계승의 흐름 속에 있다.
왕이 시해된 후, 고구려 귀족들은 그의 아들이자 정식 후계자였던 태자 익(翊)을 "불초(不肖)하다"는 모호한 이유를 들어 폐위시켰다.
대신 그들이 왕으로 추대한 인물은 불과 일곱 살의 어린아이, '궁(弓)'이었다.
이 소년이 바로 훗날 90년 넘게 재위하며 고구려를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시킨 제6대 태조대왕이다.
일곱 살의 왕이 즉위했다는 것은 실권이 다른 곳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질적인 권력은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한 그의 어머니 부여태후와 그의 가문, 즉 재사(再思) 일파에게 돌아갔다.
모본왕의 죽음은 단순한 정변을 넘어, 고구려라는 국가의 체질 자체를 바꾸는 '건국'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지 이어지던 소노부(消奴部) 해(解)씨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태조대왕을 필두로 한 계루부(桂婁部) 고(高)씨 왕조가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논쟁)
이는 단순한 왕위 교체를 넘어, 고구려의 지배 부족이 바뀌는 왕조 교체 수준의 거대한 권력 이동이었다.
모본왕의 죽음은 바로 이 정변의 완성을 위한 마지막 퍼즐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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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본왕릉으로 추정되는 마선구 2381호 전경 |
5. 승자의 기록: 무기는 어떻게 역사가 되는가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쥔 승자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미래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재구성되는 강력한 서사(敍事)다.
모본왕이 '희대의 폭군'으로 기록된 과정이야말로, 역사가 어떻게 승자의 무기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정변을 통해 권력을 찬탈한 계루부 세력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정통성'의 부재였다.
신하가 왕을 시해하고 기존 왕조를 뒤엎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권력 기반을 언제든 흔들 수 있는 위협이었다.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반드시 이전 왕조의 마지막 왕인 모본왕을 '백성의 원수'이자 '구제 불능의 폭군'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의 죽음이 왕위 찬탈이 아닌, 백성을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이었다고 주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모본왕의 역사는 재창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성을 구휼하고 강대국 후한을 상대로 대담한 군사적 승리를 거둔 유능한 군주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반면, 그의 폭력적인 면모는 '인간 베개'와 같은 극단적이고 엽기적인 이야기로 부풀려져 그의 비인간성을 극대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패턴은 비단 모본왕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고구려 역사에서 신하들에게 시해당한 차대왕, 봉상왕, 영류왕 등은 예외 없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이는 권력 투쟁의 패배자를 역사적으로 매장하여 승자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반적인 경향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역사 기록을 대할 때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
역사 저술가 김용만의 지적처럼, "글로 남겨진 것이 모두 다 진실은 아닌 것이다." 기록된 문장 너머에 숨겨진 권력의 역학을 읽어낼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6. 비극적 군주, 모본왕을 위한 변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고구려 제5대 군주 모본왕은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잔혹하고 비이성적인 폭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고구려의 대외 팽창을 이끈 유능한 군주였으나, 왕실 내부의 거대한 권력 투쟁 속에서 희생된 '정치적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의 폭정에 대한 기록은 지나치게 극적이고 전형적이며, 그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세력, 즉 태조대왕과 계루부 세력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반면, 백성을 구휼하고 후한의 심장부를 공격한 그의 업적은 폭군이라는 낙인과 양립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모본왕의 진짜 죄는 폭정이 아니었다.
새롭게 부상한 계루부 세력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구 왕조, 소노부의 마지막 왕이었다는 점이 그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그는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의 성격을 벗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던 과거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모본왕의 사례는 우리에게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며, 기록 뒤에 숨겨진 권력의 역학을 읽어내는 비판적 사고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교훈을 남긴다.
그를 '한국사 최초의 폭군'이라는 단편적인 낙인으로 기억하는 대신, 우리는 그를 거대한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역사 속에서까지 패배자가 되어야 했던, 복합적이고 비극적인 군주로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역사 탐구는 기록된 것을 믿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지를 묻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이 글은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King Mobon of Goguryeo (r. 48–53 CE) is remembered as Korea’s “first tyrant,” killed by his attendant Duro, yet the sources hint at a more complex figure.
Early in his reign he aided famine-stricken subjects and led deep raids into Later Han territory, forcing an uneasy compromise.
Only later does the record abruptly portray him as a mad despot using living people as cushions and shooting upright ministers.
Mobon’s murder, the rejection of his heir, and the enthronement of a child from a rival royal line suggest a palace coup repackaged as righteous revolution.
In this light he appears less a one-note monster than a tragic loser in a brutal power struggle where history was edited by the vic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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