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黑齒常之) 인물 심층 분석 보고서: 백제의 유장, 당나라의 명장
1. 두 개의 조국, 하나의 비극적 운명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는 7세기 동아시아 격변의 역사 한복판에서 가장 극적이고 모순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멸망한 조국 백제의 마지막 불꽃을 되살리고자 분연히 일어섰던 부흥운동의 영웅이었으나, 이내 그 불씨를 제 손으로 꺼뜨리고 적국이었던 당나라의 최고 명장으로 거듭났다.
그의 이름 앞에는 ‘백제의 유장(遺將)’과 ‘당나라의 명장’이라는 수식어가 동시에 붙으며, 후세의 평가는 ‘영웅’과 ‘배신자’라는 양극단을 오간다.
이 글은 흑치상지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다각적으로 조명함으로써, 한 개인의 운명이 국가의 흥망과 어떻게 얽히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백제의 귀족으로 태어나 부흥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가 당나라의 대장군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끝내 이국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조국'과 '충성', 그리고 '개인의 선택'이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그의 출신 배경과 성장 과정부터 살펴보며 이 복잡한 인물의 실체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2. 백제의 귀족, 풍달군장 흑치상지
흑치상지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뿌리인 백제 귀족으로서의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가문과 성장 과정은 훗날 그가 마주할 거대한 운명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지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흑치상지의 가문은 백제의 왕성(王姓)인 부여씨(夫餘氏)에서 갈라져 나온 지파(支派)로, 선조가 '흑치(黑齒)'라는 지역에 봉해지면서 이를 성씨로 삼았다. (추정)
그의 증조부 흑치문대(黑齒文大), 조부 흑치덕현(黑齒德顯), 부친 흑치사차(黑齒沙次)에 이르기까지 3대가 백제 16관등 중 제2품에 해당하는 '달솔(達率)'을 역임한 유력 귀족 가문이었다.
좌평(佐平, 백제 16관등 중 제1품이자 최고위직)을 배출한 최상위 귀족은 아니었으나, 대대로 장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을 유지한 차상위급 핵심 세력이었다.
이러한 '차상위급' 귀족이라는 배경은 그에게 백제 지배 체제에 대한 깊은 충성심과 동시에, 국가의 운명과 자신을 절대적으로 동일시했던 최상위 가문과는 다른 현실주의적 감각을 심어주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는 개인적 자질 또한 뛰어났다.
키가 7척(약 172cm)이 넘는 장대한 체구에, 어려서부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한서(漢書)』 등 역사와 경서를 익혀 학식이 깊었으며, 날래고 강인한 무예와 뛰어난 지략을 겸비했다.
이러한 문무(文武)의 소양을 바탕으로 20세가 되기 전에 가문의 관행을 따라 달솔에 올랐고, 군사와 민정을 총괄하는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임하며 백제의 고위 관료이자 군 지휘관으로서 일찍부터 경력을 시작했다.
이처럼 백제 사회의 상류층으로 안정된 삶을 살던 그의 운명은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공과 백제의 멸망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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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치상지 상상화 |
3. 백제 부흥의 불꽃, 임존성의 맹장 (660-663)
흑치상지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자, 그의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강렬하게 빛났던 시기는 바로 백제 멸망 직후 부흥의 기치를 내걸었던 때이다.
그는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저항의 선봉에 섰다.
분노와 봉기: 소정방의 만행에 맞서다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는 일단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그러나 당나라 총사령관 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을 포로로 삼은 뒤, 군사를 풀어 수도 사비성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백성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침략군의 잔혹함을 목도한 흑치상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뜻을 같이하는 측근 10여 명과 함께 진영을 탈출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현재의 충남 예산 일대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 임존성(任存城)을 거점으로 삼아 흩어진 백제 유민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과 부흥운동의 정당성에 백제 유민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호응했는지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뚜렷이 보여준다.
"무리를 모아서 임존성에 웅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모여드는 이가 3만 명이나 되었다."
부흥의 불꽃, 200성을 삼키다
임존성에 집결한 부흥군은 흑치상지의 지휘 아래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백제를 정복했던 소정방이 직접 이끄는 당의 정규군이 임존성을 공격해왔으나, 흑치상지는 이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부흥군의 기세는 들불처럼 번져나가, 한때 백제의 옛 성 200여 개를 회복하는 데 이르렀다.
이 시기 흑치상지는 단연 백제의 마지막 희망을 지키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거세게 타오르던 부흥의 불꽃 이면에는 지도부의 분열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이 균열은 곧 그의 운명을 또 다른 방향으로 이끌게 된다.
4. 운명의 갈림길: 투항과 변절의 경계 (663)
이 섹션은 흑치상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선택이자 오늘날까지도 '영웅'과 '배신자'라는 극단적 평가를 낳는 '투항'의 과정과 그 배경을 심층적으로 다룬다.
그의 선택은 단순한 변절이 아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내려진 복합적인 결단이었다.
투항의 복합적 원인
흑치상지가 자신을 따르던 3만 유민의 염원을 뒤로하고 당나라에 항복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 부흥군 지도부의 자멸: 부흥운동의 성공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꺾은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분열이었다.
주류성(周留城)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또 다른 지도자 복신(福信)이 승려 도침(道琛)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왜(倭)에서 돌아와 왕으로 추대된 부여풍(夫餘豐)이 이번에는 복신을 의심하여 제거하는 등, 지도부가 서로 죽고 죽이는 치명적인 내분을 겪으며 자멸의 길을 걸었다.
• 백강 전투의 참패: 부흥군의 마지막 희망은 왜에서 파견된 구원군이었다.
그러나 663년, 백강(白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왜의 수군 400여 척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패배로 부흥군은 군사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모든 동력을 상실했다.
• 부여융의 회유: 지도부의 내분과 군사적 참패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흑치상지에게, 당나라에 있던 백제 태자 부여융(扶餘隆)이 간곡한 항복 권유를 해왔다.
이는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고, 당의 힘을 빌려서라도 백제의 명맥을 잇고자 했던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변절의 결정적 행위
내부 분열과 외부의 압박 속에서 희망을 잃은 흑치상지는 결국 663년,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행적은 '변절자'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는 그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이때 다른 장수 손인사(孫仁師)가 "한 번 배신한 자들을 믿기 어렵다"며 반대하자, 유인궤는 "내가 보기에 그들은 당나라에 대한 충심과 지략이 있으니, 믿어주면 공을 세울 것"이라며 그를 신임했다.
유인궤의 신임을 얻은 흑치상지는 곧바로 그의 '충성심'을 증명해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그는 유인궤의 명을 받아 당나라 군사와 군량을 받고, 자신이 부흥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성지(聖地)이자 저항의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 공격의 선봉에 섰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부흥운동의 마지막 불씨를 꺼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이 선택은 흑치상지라는 개인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백제의 유장은 임존성과 함께 스러졌고, 이제 그의 군사적 재능은 당 제국의 패권을 위해 발휘될 운명이었다.
5. 당나라의 명장, 이국의 전장을 누비다 (664-689)
백제를 등진 흑치상지는 자신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이국의 땅 당나라에서 만개시켰다.
그는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지략과 용맹을 당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데 쏟아부었고, 제국의 가장 신임받는 명장 중 한 명으로 우뚝 섰다.
당나라의 장수로서 그의 경력은 제국의 가장 위태로운 서부 및 북방 전선에서 구축되었다.
그의 핵심적인 공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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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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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대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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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활동 및 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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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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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吐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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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년 (승풍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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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주력군이 명장 가르친링에게 포위되자,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구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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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당군을 구한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입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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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吐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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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년 (양비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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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기병으로 토번군을 격파하고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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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 지역에 7년간 주둔하며 둔전(屯田)을 일구고 방어 체계를 구축,
토번의 침입을 막아낸 명장으로 평가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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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突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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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년 (황화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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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도경략대사로서 돌궐군을 크게 격파하고 사막 너머로
추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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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북방 국경을 안정시킨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함. 그의 위명은
오랑캐를 떨게 했다고 기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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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뛰어난 지략가이자 용맹한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부하들을 아끼는 덕장(德將)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한 병사가 그의 말을 채찍질하자 부하가 처벌을 청했으나, 그는 "어찌 사사로운 말 때문에 관의 병사를 벌할 수 있겠는가"라며 용서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받은 막대한 포상금과 재물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사로이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인솔력은 그가 이민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군대 내에서 높은 신망을 얻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마침내 당나라 귀족 작위 중 세 번째로 높은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지며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영광의 정점에서, 그의 운명에는 비극의 그림자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6. 비극적 최후: 측천무후 시대의 희생양
화려하게 이국의 전장을 누비던 흑치상지의 경력은 허망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그의 최후는 당대 최고의 실권자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의 광기 어린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몰락의 시작: 부하의 패전과 연대 책임
687년, 돌궐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직후, 그의 부하 장수였던 찬보벽(爨寶璧)이 공을 탐내 독단적으로 돌궐의 잔당을 무리하게 추격했다.
그는 흑치상지와의 사전 협의 없이 단독으로 진격했다가 돌궐의 반격에 휘말려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전의 책임으로 찬보벽은 처형되었고, 총지휘관이었던 흑치상지 또한 연대 책임을 지게 되어 그의 명성에 큰 흠집이 생겼다.
정치적 희생양: 혹리(酷吏) 정치의 표적
당시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황권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 혹리(酷吏, 가혹한 관리)들을 동원한 공포 정치를 펼치던 시기였다.
혹리 주흥(周興) 등은 무고를 통해 수많은 공신과 황족을 제거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이민족 출신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성공한 장군 흑치상지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자, 제거하기에 더없이 좋은 표적이 되었다.
무고와 죽음: 허망한 최후
결국 혹리 주흥은 흑치상지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무고했다.
측천무후는 이를 빌미로 그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노장(老將)은 변론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
689년, 흑치상지는 60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추정)
『자치통감』은 처형(殺)을, 『구당서』와 묘지명은 옥중 자결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측천무후 정권 하에서 정치적으로 숙청된 인물의 최후가 공식 기록과 개인적 기록 사이에서 다르게 기억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의 사후, 아들 흑치준(黑齒俊)의 끈질긴 노력 끝에 10년 만인 699년, 흑치상지는 마침내 누명을 벗었다.
측천무후는 그를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하고, 중국의 귀족들만 묻힌다는 낙양 북망산(北邙山)에 명예롭게 이장하도록 허락했다.
이로써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삶에 대한 역사적 평가뿐이었다.
7. 종합 평가: 영웅, 배신자, 혹은 시대의 이방인
흑치상지라는 인물의 역사적 위상을 정립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며, 이는 그의 삶이 가진 복합적인 면모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 섹션에서는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들을 근거 자료와 함께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관점 1: '부흥군을 등진 배신자'
가장 통상적이고 강력한 비판은 그를 '배신자'로 규정하는 시각이다.
• 계명대학교 사학과 노중국 교수는 "부흥군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입니다"라고 단언한다.
스스로 일으킨 부흥운동의 심장부이자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을, 적군인 당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함락시킨 행위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운 명백한 변절 행위이다.
• 민족주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강하게 비판하며, "백제 부흥군을 지휘한 영웅인 귀실복신은 열전을 싣지 않으면서 부흥군을 배신한 흑치상지는 열전에 실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부흥운동의 대의를 저버린 인물을 역사에 기록한 것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관점 2: '시대의 흐름을 읽은 현실주의자'
반면, 그의 선택을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내린 어쩔 수 없는 현실적 판단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 그가 투항할 당시, 부흥군 지도부는 복신, 도침, 부여풍이 서로를 죽이는 내분으로 이미 자멸한 상태였다.
또한 백강 전투의 패배로 군사적 재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그가 동조한 부여융의 선택은, 당나라의 괴뢰정권인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통해 신라로의 완전한 흡수를 막고 백제의 명맥이라도 잇고자 했던 절박한 현실적 판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을 막고 남은 백제 유민을 보전하려는 고뇌에 찬 선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관점 3: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비운의 이방인'
그의 삶 전체를 조망하면, 그는 결국 백제에도 당나라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비운의 이방인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 그는 당나라에서 연국공이라는 최고위 작위까지 오르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정체성은 끝까지 '번장(番將)', 즉 이민족 출신의 용병 장군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 당나라에는 연헌성(淵獻誠), 고선지(高仙芝) 등 수많은 이민족 출신 장수들이 활약했지만, 그들은 뛰어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차별과 견제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흑치상지의 눈부신 성공은 그를 더욱 두드러진 표적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이민족이라는 태생은 주흥과 같은 혹리들의 정치 공세 속에서 그를 지켜줄 조정 내 깊은 정치적 기반이 부재했음을 의미했다.
• 류근 시인은 그의 허무한 최후에 대해 "이러자고 조국을 배신했을까? 무상한 거예요"라고 평했다.
측천무후의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손쉽게 제거된 그의 말로는, 그가 아무리 큰 공을 세웠어도 결국 당나라 사회의 핵심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외부인이자 이방인이었음을 증명한다.
이 세 가지 상반된 평가는 모두 흑치상지라는 복합적인 인물을 설명하는 중요한 조각들이다.
그는 한 가지 시각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시대의 비극이 낳은 인물이었다.
8. 흑치상지가 역사에 던지는 질문
백제의 귀족에서 부흥군 맹장으로, 다시 당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흑치상지의 삶은 1,3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의 생애는 단순히 영웅과 배신자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재단하기 어려운, 시대의 격랑 속 한 인간의 고뇌와 선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 멸망한 국가의 유민에게 '조국'과 '충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개인의 안위와 능력 발휘, 그리고 민족 공동체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흑치상지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비극적인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인지를 증명한다.
결국 그의 삶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이 한겨레21 기고문에서 던진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에게 국가는, 또 역사는 무슨 의미였을까?"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와 연구서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내면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재구성 서사입니다.
이 글은 연대기식 강의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따른 서술이며, 불확실한 내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으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 안에 간단한 정보를 병기해 이해를 돕고, 이후에는 독자의 읽기 흐름을 해치지 않도록 최소한으로만 설명을 더했습니다.
Heukchi Sangji (630–689) was a Baekje aristocrat who led the Imjonseong resistance against Tang after his kingdom’s fall, briefly restoring hundreds of forts with tens of thousands of followers.
After factional strife and defeat at Baekgang, he surrendered to Tang and helped crush the very movement he had built.
As a Tang general he won major campaigns against Tibetans and Turks and was ennobled as Duke of Yan, only to die in prison during Wu Zetian’s purges.
Later cleared and reburied with honor, he remains a controversial figure—hero, traitor, and tragic outsider shaped by a collapsing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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