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신라 외교의 교본: 지마 이사금과 가야·왜·말갈·백제 (King Jima of Silla)


신라의 위기 관리 전문가, 지마 이사금 이야기


글을 시작하며: '이사금'은 무슨 뜻일까?

신라의 6대 왕, 지마 이사금의 흥미진진한 외교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의 칭호인 '이사금(尼師今)'에 담긴 재미있는 유래부터 알아볼까요? 

이 칭호는 신라의 3대 왕인 유리 이사금 시대에 탄생했습니다.

이야기는 2대 남해 차차웅이 세상을 떠나고, 왕위 계승자를 정해야 할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왕자였던 유리와 덕망 높은 석탈해는 서로에게 왕위를 양보했습니다.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자, 석탈해가 기발한 제안을 합니다.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 이빨 자국으로 왕위를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두 사람은 떡을 한입씩 베어 물었고, 그 결과 유리의 이빨 자국이 더 많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리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때부터 왕을 '이'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아 '이사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승)

이처럼 신라의 왕호에는 건국 초기의 소박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이제, 이 '이사금' 칭호를 사용했던 지마 이사금의 시대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새로운 시대의 시작: 지마 이사금의 즉위

지마 이사금은 신라의 제5대 왕이었던 파사 이사금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원후 112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갈문왕 마제의 딸인 애례부인 김씨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이는 당시 신라 사회에 김알지 세력이 성공적으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추정)

이렇게 새로운 왕의 시대가 열렸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험난한 외교의 파도였습니다.


2. 숙적 가야와의 힘겨루기: 끝나지 않은 전쟁

지마 이사금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쪽의 숙적 가야가 신라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가야 정벌에 나섰지만, 결과는 뼈아픈 실패였습니다.


1. 115년의 1차 침공: 복병에 당한 쓰라린 패배 

가야가 먼저 신라의 남쪽 국경을 침략하자, 젊은 왕 지마 이사금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습니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오늘날의 낙동강)를 건너 기세 좋게 진격했지만, 이것은 가야의 함정이었습니다. 

가야는 숲 속에 군사들을 숨겨두고 신라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지마 이사금과 신라군은 그대로 적진 깊숙이 들어갔고, 순식간에 가야의 복병에게 몇 겹으로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왕은 필사적으로 군사들을 지휘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퇴각해야 했습니다.


2. 116년의 2차 침공: 함락되지 않은 성 

전년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지마 이사금은 이듬해 1만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가야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가야의 저항은 완강했습니다. 

신라군은 가야의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결국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습니다.


다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연대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 치열했던 전투가 실제로는 신라와 가야의 세력권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 3세기 후반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가야 정벌의 실패는 지마 이사금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습니다. 

무력만으로는 신라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다른 위협에 대해서는 다른 해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3. 바다 건너의 위협과 선택: 왜(倭)와의 갈등과 화친

남쪽의 가야 문제가 정리되기도 전에, 동쪽 바다 건너 왜(倭)가 신라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마 이사금은 여기서 전쟁만이 유일한 해답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 왜의 침입 (121년) 왜가 신라의 동쪽 해안 지역을 침략하여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했습니다. 

수도에서까지 왜가 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 민심이 흉흉해질 정도로 피해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강화 조약 (123년) 하지만 지마 이사금은 보복 전쟁을 택하는 대신, 2년 뒤인 123년에 왜와 강화(講和), 즉 화친을 맺습니다. 

그는 무력 충돌보다는 외교적 해법을 통해 동쪽 국경을 안정시키는 실리를 택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지마 이사금이 강력한 적을 상대로 무조건적인 군사 대응이 아닌, 외교적 실리를 추구할 줄 아는 현실적인 군주였음을 보여줍니다. 

남쪽과 동쪽의 위협을 어느 정도 관리하게 되자, 이번에는 북쪽에서 새로운 적이 나타났습니다.


4. 북방의 위협과 뜻밖의 동맹: 말갈과 백제

남쪽의 가야를 힘으로 누르지 못하고 동쪽의 왜와는 불안한 평화를 맺은 지마 이사금에게, 이번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125년, 말갈족이 대대적으로 국경을 넘어오면서 신라는 또다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신라의 힘만으로는 벅찬 위기, 지마 이사금은 과연 어떤 묘책을 내었을까요? 

그의 선택은 바로 이웃 나라 백제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다급해진 지마 이사금은 백제의 기루왕에게 국서를 보내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당시 신라와 백제는 선대인 파사 이사금 때 맺은 평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요청에 기루왕은 흔쾌히 다섯 명의 장수를 보내주었고, 백제 원군은 신라군과 힘을 합쳐 말갈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와 백제의 우호 관계는 단순한 평화를 넘어, 공동의 적에 맞서는 군사 동맹 관계로까지 발전하며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두 나라가 힘을 합친 것을 넘어, 당시 국력에서 앞서 있던 백제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신라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5. 지마 이사금의 외교 성적표: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키다

지마 이사금 시대의 대외 관계는 한마디로 '위기 관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각 나라의 특성과 상황에 맞춰 전쟁, 화친, 동맹 등 다양한 외교 카드를 활용했습니다. 

그의 외교 정책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대 국가
핵심 사건
관계 요약
가야
115년, 116년 두 차례 침공 실패
군사적 대립과 한계 인식
왜 (倭)
121년 침입 후 123년 화친
실리적 외교 전환 (갈등 후 화친)
백제
125년 말갈 침입 시 원군 파견
생존을 위한 군사 동맹
말갈
125년 침입
북방의 신흥 위협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지마 이사금은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정복 군주는 아니었습니다. 

가야 정벌에는 실패했고, 왜와 말갈의 침입에는 고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신라의 생존을 도모한 현실적인 외교 전략가였습니다.

때로는 숙적과 싸우고, 때로는 침략자와 화친하며, 때로는 이웃과 손을 잡아 위기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의 통치가 외교적 위기 대응에만 집중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삼국유사』는 지마 이사금의 시대에 음질국(오늘날 경주 안강읍)과 압량국(오늘날 경산시)을 정복했다고 기록하여, 그의 재위 기간이 국내적으로는 영토 확장의 성과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논쟁)


6. 조용한 마무리와 다음 시대의 예고

사방에서 밀려오는 외교적 파도를 능숙하게 헤쳐나갔던 지마 이사금은 재위 23년 만인 13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마왕릉


하지만 그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기에, 왕위는 그의 큰아버지이자 선대 유리 이사금의 맏아들로 전해지는 일성에게 돌아가게 되면서 신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록 화려한 정복 군주는 아니었지만, 사방의 거센 파도 속에서 신라라는 배를 침몰시키지 않고 다음 시대로 무사히 넘겨준 것, 그것이 바로 위기 관리 전문가 지마 이사금의 진짜 업적이었을지 모릅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공개 문헌과 현대 연구에서 알려진 흐름을 바탕으로,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초기 신라의 연대와 사건 배치는 자료마다 차이가 커서, 확정하기 어려운 부분은 (전승)/(논쟁)/(추정)으로 구분해 읽는 걸 권합니다.

학술적 인용이나 수업 자료로 쓰실 경우, 원문 기록과 연구서를 함께 대조해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Jima Isageum (r. 112–134) ruled early Silla amid constant border crises. 

He failed two campaigns against Gaya, chose a pragmatic peace with Wa in 123, and repelled a Malgal incursion in 125 with Baekje aid. 

His reign is remembered less for conquest than for flexible crisis management; some territorial gains are recorded but their dating differs between source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