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호(大虎), 절재(節齋) 김종서: 충신과 권신의 경계에 선 거인
철퇴 아래 스러진 거목, 역사의 소용돌이를 열다
김종서(金宗瑞),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질문이 따라붙는다.
그는 과연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단종을 지키려 한 충신이었는가, 아니면 수양대군의 주장처럼 왕실을 능멸하고 권력을 탐한 역신이었는가.
이 질문은 조선 초기 가장 극적인 정치 변동의 서막을 연 한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 화두이다.
1453년 10월 10일의 늦은 밤, 한성부 돈의문 밖 김종서의 자택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그 어둠을 뚫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 중 한 명인 수양대군이 직접 찾아왔다.
수양대군이 건넨 편지를 달빛에 비추어보던 김종서의 머리 위로, 그의 종이 휘두른 육중한 철퇴가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이 철퇴는 단순히 한 개인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국운을 뒤흔든 거대한 지각변동,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본 글은 이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인물 김종서를 다각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흔히 그를 북방을 호령한 '장군'으로 기억하지만, 그의 진면목은 그보다 훨씬 깊고 넓다.
본고는 6진 개척이라는 불멸의 군사적 업적을 넘어, 『고려사』 편찬을 이끈 당대 최고의 문인 관료로서의 면모,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국정을 이끌었던 최고 권력자로서의 정치적 역할, 그리고 그의 죽음이 조선 역사에 남긴 거대한 파장을 심층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철퇴 아래 스러진 거인의 삶을 입체적으로 복원하고, 충신과 권신의 경계에 섰던 그의 역사적 위상을 재평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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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기념관에 있는 김종서 장군 흉상 |
1. 붓을 든 선비, 국가의 기틀을 다지다
김종서를 '장군'이라는 이미지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반생(半生)만을 보는 것과 같다.
그는 북방의 칼바람을 맞기 훨씬 이전부터 붓을 든 선비이자 국가의 기틀을 다진 유능한 문인 관료였다.
그의 초기 경력은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강직한 언관(言官)으로 활동하며 다져졌고, 세종의 절대적 신임 아래 국가의 주요 정책과 역사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 이처럼 깊이 있는 학문적 소양과 탁월한 행정 능력은 훗날 그가 북방 개척이라는 거대한 위업을 성공으로 이끌고, 나아가 국정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김종서는 1383년(고려 우왕 9년) 공주에서 태어났다.
일설에는 1390년생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1451년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 해에 70세가 된다는 내용이 있어 1383년생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1405년(태종 5년) 22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초기 관직 생활을 사간원 우정언, 사헌부 감찰·지평·집의 등 주로 부정을 감시하고 왕에게 직언하는 언관직과 감찰직에 집중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그의 강직하고 엄정한 성품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의 행정 능력과 학문적 깊이는 세종의 눈에 띄었고, 곧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특히 세종은 1433년, 서열 2위였던 좌대언 김종서에게 이조(吏曹)의 인사권을 관장하도록 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내렸다.
이는 관례를 뛰어넘는 특명으로, 세종이 그의 능력과 공정성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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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김종서 사당 |
주요 학문적 업적 분석
김종서의 학자적 면모는 국가의 공식 역사서 편찬 사업을 주도한 점에서 정점을 이룬다.
•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편찬: 세종은 기존의 고려사 개수 작업이 미흡하다고 판단, 1449년 김종서와 정인지에게 재편찬을 명했다.
김종서는 편찬 책임관으로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모인 집현전 출신 관료들을 지휘하여 2년 만에 기전체 역사서인 『고려사(高麗史)』를 완성했다.
놀라운 점은 그가 집현전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수준의 학자들을 이끌어 국가 정사(正史) 편찬을 총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의 학문적 위상이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증명한다.
이어 그는 문종에게 편년체 사서의 필요성을 건의하여, 1년 만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까지 완성해냈다.
• 『세종실록』 편찬: 1452년, 그는 『세종실록』 편찬의 책임관(감수)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하여 실록에 오례(五禮), 악보(樂譜), 지리지(地理志),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등 전문적인 '지(志)'를 포함시키도록 했다.
이로써 『세종실록』은 후대 실록의 모범이 되는 체계적이고 풍부한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이처럼 김종서는 단순한 행정가를 넘어 국가의 지적 기반을 다진 핵심 인물이었다.
그가 붓으로 쌓아 올린 학문적, 행정적 기반은 곧 압록강과 두만강의 거친 물결을 다스리고 국경을 새로 그리는 거대한 위업의 밑거름이 되었다.
2. 북방의 대호(大虎), 국경을 그리다
김종서가 이룩한 4군 6진 개척은 단순한 영토 확장의 의미를 넘어선다.
이는 수백 년간 한민족 왕조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던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확립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의 국경선을 완성한 역사적 위업이었다.
이 거대한 과업의 중심에 바로 김종서가 있었다.
그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군사 전략, 외교, 행정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통찰력으로 북방 경영을 총지휘하며 조선의 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6진 개척의 배경과 과정
당시 두만강 유역은 여진족의 활동 무대로, 이들의 잦은 침입은 조선의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세종은 적극적인 북방 개척을 결심하고, 1433년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오늘날의 함경도 군 사령관)로 임명하여 6진 개척의 대임을 맡겼다.
• 6진 설치와 국경 확정: 김종서는 부임 후, 1434년부터 본격적인 개척에 착수했다.
그는 두만강 유역의 요충지를 차례로 확보하며 다음 6개의 진(鎭)을 설치하였다.
◦ 회령(會寧)
◦ 종성(鍾城)
◦ 경원(慶源)
◦ 경흥(慶興)
◦ 온성(穩城)
◦ 부령(富寧)
이로써 굽이치는 두만강을 따라 새로운 국경선이 그려졌고, 조선의 영토는 비로소 한반도의 자연 경계선까지 확장되었다.
• 안정화 정책: 영토 개척은 땅을 차지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김종서는 삼남 지방의 백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과 그 지역 토착민을 관리로 임명하는 토관제도(土官制度)를 실시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조치를 넘어, 새로 편입된 영토를 실질적으로 내재화하기 위한 고도의 국가 경영 전략이었다.
사민정책은 인구 구성의 재편을 통한 ‘인구학적 공학’의 성격을 띠었으며, 토관제도는 현지 엘리트 세력을 행정 체계에 편입시키는 ‘협력적 통치(co-optation)’ 방식을 통해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대호(大虎)'라는 별명의 의미 분석
김종서는 북방에서 '큰 호랑이' 즉,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체구가 작고 무예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러한 별명이 붙은 것은 그의 작은 체구와 대조되는 강직함과 위엄, 그리고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과단성 있는 지휘 능력 때문이었다.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일화: 북방에서 연회를 열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한 발이 연회장 중앙의 술통에 박혔다.
모두가 놀라 웅성거렸지만, 김종서는 "간사한 자가 나를 시험하려는 것일 뿐이다"라며 태연히 연회를 계속 즐겼다고 한다.
이는 적의 도발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그의 대담한 성격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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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연사준도> 누각 안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김종서. |
결론적으로 김종서의 북방 개척은 무력에만 의존한 정벌이 아니었다.
명나라로부터 두만강 유역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받은 외교적 수완, 강을 방어선으로 삼는 효율적인 방어 체계 구축, 그리고 사민정책과 토관제도를 통한 안정적인 통치 시스템 마련이 결합된 종합 전략의 승리였다.
이 위업을 통해 그의 정치적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고, 조선의 운명을 짊어질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3. 왕좌의 수호자, 권력의 정점에 서다
세종과 문종의 잇따른 승하는 조선 왕실을 거대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12세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김종서는 선왕들의 유지를 받들어 왕실을 보위하는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서 조선 정치의 정점에 섰다.
그러나 어린 왕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었던 그의 막강한 권력은 충신으로서의 국정 안정 노력과, 반대파에게 권신(權臣)으로 비칠 수 있는 위험한 권력 행사 사이의 미묘한 경계에 서 있었다.
문종은 임종 직전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등에게 "어린 세자를 잘 보필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써 김종서는 단종 시대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라는 막중한 정치적 위상을 부여받았다.
의정부 서사제와 황표정사
단종 즉위 후, 왕실에 수렴청정을 할 대비가 없는 상황에서 국정은 의정부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른바 '의정부 서사제(議政府署事制)' 하에서 김종서와 황보인은 실질적으로 국정을 주도했다.
• 황표정사(黃票政事): 이 시기 의정부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황표정사'이다.
본래 이조(吏曹)에서 3명의 인사 후보를 올리면 왕이 최종 한 명을 낙점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당시 의정부에서는 단종이 어리다는 이유로 추천할 인물 이름 아래에 미리 노란색 표(黃票)를 붙여 올렸다.
단종은 사실상 그저 노란 표시에 점을 찍기만 하면 인사가 결정되는 방식이었다.
이는 조선 정치사의 핵심적 긴장 관계인 신권(臣權)과 왕권(王權)의 역학 관계에서 신권이 정점에 달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어린 왕을 보필하여 국정 공백을 막으려는 충정의 발로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왕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마저 신하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한,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했다.
당시 그의 위세는 실록의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단종실록』은 그의 권력 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종서가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으니, 자기 집의 별실을 지으면서 목재와 기와, 철재와 석재를 모두 조정의 공사를 관장하는 관리에게서 취하였다."
"그를 전별하는 사람들로 도성이 가득 찼고, 군현에서도 뇌물이 잇달아서 끊이지가 않았다."
수양대군과의 대립
김종서가 이끄는 대신 세력의 권력이 비대해질수록, 왕실 종친의 중심이었던 수양대군과의 긴장은 극도로 고조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야심이 컸던 수양대군은 고명대신들이 국정을 장악한 상황을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와 같은 책사들을 포섭하여 치밀하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김종서와 고명대신들이 안평대군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들을 한꺼번에 제거할 피의 숙청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어린 왕을 보위하려던 김종서의 강력한 권력 행사는 역설적이게도 수양대군에게 '왕실을 바로 세운다'는 정변의 명분을 제공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충절과 권력의 위태로운 줄타기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4. 철퇴의 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10월 10일의 밤은 조선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정변의 밤으로 기록된다.
수양대군이 휘두른 철퇴는 단순히 한 정승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의 폭력적인 개막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김종서 개인에게는 비극적인 최후였고, 조선에게는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암살의 서막
거사 당일 저녁,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꾀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직접 그의 집을 찾았다.
그는 무관 양정, 홍달손 등을 시켜 이미 경복궁과 도성의 사대문을 장악해 둔 상태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에게 미리 준비한 유인용 편지를 건네며 안으로 들어가 담소를 청하는 그를 핑계를 대며 주저하게 했다.
아무런 의심 없이 편지를 받아 든 김종서가 그것을 달빛에 비추어 읽으려는 찰나, 비극의 막이 올랐다.
철퇴, 그리고 최후
수양대군의 신호를 받은 그의 종 임어을운(林於乙云)이 숨기고 있던 철퇴를 꺼내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비명과 함께 쓰러진 김종서를 지키려던 장남 김승규 역시 그 자리에서 철퇴에 맞아 절명했다.
그러나 김종서는 기적적으로 목숨이 붙어 있었다.
철퇴를 맞고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는 깨어나 며느리의 가마를 타고 궁궐로 들어가 사태를 알리려 했다.
하지만 사대문은 이미 모두 굳게 닫힌 뒤였다.
결국 그는 둘째 며느리의 친가에 몸을 숨겼다.
다음 날 아침, 그의 은신처는 발각되었다.
수양대군의 부하 양정이 들이닥쳐 그를 끌어내려 할 때, 죽음의 문턱에서도 김종서는 정승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잡으러 온 이들을 향해 당당히 외쳤다.
"정승의 몸으로 어찌 걸어가겠느냐! 초헌을 가져오너라!"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양정의 칼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그의 목은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정변의 결과
김종서의 죽음은 피의 숙청의 시작에 불과했다.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등 살생부에 이름이 오른 조정의 핵심 대신들이 궐 안과 자택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조정을 완벽히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과 군권을 모두 차지하며 사실상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고, 이는 2년 뒤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세조로 즉위하는 확고한 기반이 되었다.
계유정난은 한 시대의 거인을 무너뜨렸다.
김종서의 죽음은 후대에 충절의 상징으로 남았지만, 승자인 수양대군은 자신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역적으로 몰아야만 했다.
역사의 승패가 충신과 역적의 이름을 가르는 비정한 아이러니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5. 역사 속의 김종서: 평가와 유산
김종서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승자의 기록에 의해 오랫동안 왜곡되었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그는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혔으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실이 밝혀지며 마침내 '충신'으로 복권되었다.
그의 삶은 한 개인이 시대의 격랑 속에서 어떻게 평가되고 기억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사후의 수난과 복권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후, 김종서는 공식적으로 역적으로 단죄되었고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그의 두 아들 김승규와 김승벽은 그와 함께 살해되었으며, 살아남은 가족과 친척들은 노비로 전락하거나 유배되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의 이름은 『고려사』 편찬자 명단에서도 삭제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의 충절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는 약 30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1746년(영조 22년), 마침내 단종이 공식적으로 복권되면서 김종서 역시 신원(伸冤)이 회복되었다.
영조는 그에게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묘역에 '충신정려' 현판을 하사하여 그의 충절을 국가적으로 공인했다.
현대에 남은 유산
• 장군면(將軍面)과 묘소의 전설: 오늘날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의 명칭은 그의 묘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그의 묘에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시신을 온전히 수습하지 못하고 다리 한쪽만 묻었다는 전설이 서려 있어, 그가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 숙모전(肅慕殿) 배향: 그는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단종과 사육신 등 계유정난 당시 희생된 충신들과 함께 배향되어, 불의에 항거한 충절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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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위치한 김종서 장군묘 |
최종 평가: 충신인가, 권신인가?
김종서의 삶을 둘러싼 '충신'과 '권신'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린 단종을 보위하려 했던 그의 행적은 분명 충신의 면모를 보여준다.
반면, 황표정사 등을 통해 국정을 운영하고 실록에 부정부패 혐의까지 기록된 그의 모습은 권신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을 해석할 때는 비판적 시각이 요구된다.
『단종실록』은 계유정난의 승자인 수양대군, 즉 세조의 치세에 편찬되었기에 정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김종서를 왕권을 능멸하고 사익을 추구한 권신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를 제거한 수양대군의 행위를 ‘난리를 평정한(靖難)’ 구국의 결단으로 포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서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가 사적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거나 국정을 심각하게 농단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이 기록 외에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김종서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북방의 국경을 확정하고, 위기의 왕실을 지키려다 비극적으로 스러져 간 시대의 거인'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장 온당할 것이다.
그가 어린 왕을 보위하기 위해 선택한 강력한 신권 중심의 통치는 역설적으로 정적에게 찬탈의 명분을 제공했고, 승자의 기록 속에 ‘권신’이라는 멍에를 짊어진 채 철퇴 아래 스러져 간 비극적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김종서의 생애와 계유정난 전후의 정국을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사건의 해석과 평가는 학자·시대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본 글은 어디까지나 대중 독자를 위한 역사 교양·스토리텔링 글로, 전문 학술 연구나 1차 사료 검토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보다 정확한 연대기·사료 원문은 관련 실록과 전문 연구서를 함께 참고해 주시길 권합니다.
Kim Jong-seo (1383–1453) rose from a principled scholar-official under Taejong and Sejong to one of early Joseon’s most powerful ministers.
Trusted by Sejong, he helped compile the Goryeosa and led northern campaigns that fixed the border on the Amnok and Duman rivers.
As chief guardian for the boy king Danjong he effectively ran the state, which made Grand Prince Suyang see him as a threat.
In 1453 Suyang’s coup had Kim clubbed to death and his clan destroyed.
Once branded a traitor, he is now remembered as a tragic loyalist whose very strength in office gave rivals the excuse to str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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