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너나 가져라? 버려진 모래섬에서 대한민국 심장부가 된 여의도 이야기 (The History of Yeouido)


섬, 너나 가져라! 모래벌판에서 대한민국 심장부로, 여의도 변신 이야기


오늘의 여의도, 그리고 시작에 대한 물음

서울의 심장부, 여의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와 대한민국 정치가 움직이는 국회의사당, 분주하게 오가는 금융맨들과 방송국 사람들. 

오늘날 여의도는 대한민국의 권력과 자본, 정보가 응축된 역동의 상징입니다. 

주말이면 더현대 서울과 IFC몰에서 쇼핑을 즐기고, 한강공원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시민들로 북적입니다.


하지만 불과 한 세기 전, 이 화려한 섬이 홍수 때마다 물에 잠겨 형체조차 사라지던 버려진 모래벌판이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서로에게 "너나 가져라"고 떠넘기던 땅, '너의 섬'이라는 뜻의 여의도(汝矣島) 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전승)

물론 '넓은 벌판'이라는 우리말 '너벌섬'에서 왔다는, 보다 신빙성 있는 유래도 함께 전해집니다.


어느 쪽이든, 이름처럼 버려졌던 이 거대한 모래섬은 과연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까요?

가축이나 뛰놀던 잊혀진 땅이 어떻게 모두가 욕망하는 심장부로 변모했을까요? 

지금부터 여의도의 파란만장한 변신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 잊혀진 땅: 가축의 방목지에서 제국의 비행장으로

1.1. 조선 시대: 말과 양이 뛰놀던 거대한 모래섬

조선 시대의 여의도는 현대 도시의 모습과 그 무엇 하나 닮지 않았습니다. 

한강의 퇴적 작용으로 자연스레 생겨난 이 섬은 홍수가 나면 물에 잠겨 흔적을 감췄고, 가뭄이 들면 거대한 모래밭을 드러내는 변덕스러운 땅이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경조오부도>를 보면, 당시 여의도는 목양(牧羊), 즉 양이나 말 같은 가축을 키우던 목장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기에는 부적합했지만, 넓고 평평한 땅은 가축을 방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잉화도(仍火島)', '나의도(羅衣島)' 등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는 모두 '너른 벌판'이라는 뜻의 '너벌섬'을 한자로 옮긴 것입니다. 

이름 그대로, 여의도의 시작은 그저 광활하고 쓸모없던 모래섬이었습니다.


1884년 여의도의 모습


1.2. 일제강점기: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된 경성비행장

잊혀진 모래섬 여의도가 근현대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소환된 것은 일제강점기였습니다. 

1916년, 용산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여의도를 연병장(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한쪽에 간이 활주로와 격납고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항공 역사의 시초가 된 여의도 비행장의 탄생이었습니다.


비행장으로서 여의도의 역사는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전개되었습니다.

1. 1922년,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 대한민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여의도 상공에서 고국 방문 시범 비행을 펼쳤습니다. 

그의 비행을 보기 위해 무려 수만 명의 인파가 여의도로 몰려들었고, 식민지 백성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과 민족적 자부심을 아로새겼습니다.

2. 1928년, '경성비행장'으로 공식화: 제국의 야망이 커지면서 활주로는 더욱 길어졌고, '경성비행장'이라는 공식 명칭을 얻어 본격적인 비행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3. 1929년 이후,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 일본, 중국, 만주를 잇는 항공 수송의 중간 기착지이자 우편 항로의 핵심 거점으로 부상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만주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적, 물류적 발판 역할을 수행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 여의도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외부 세력의 군사적 필요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앞으로 펼쳐질 격동의 역사를 예고하는 서막과도 같았습니다.


1945년의 여의도비행장과 영등포 일대를 촬영한 미군 항공사진


2. 불도저와 콘크리트: 새로운 섬의 탄생

2.1. 해방 이후: 침수를 반복하던 공군 기지

광복 이후 여의도 비행장은 우리 군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1949년,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비행단인 제1전투비행단이 바로 이곳 여의도에서 창설되며 대한민국 영공 수호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했습니다. 

장마철만 되면 활주로가 물에 잠겨 공군 기지를 옮겼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더 이상 변덕스러운 자연에 섬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2.2. 윤중제, 100일의 기적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과 '불도저 시장'으로 불리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강력한 개발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1967년 시작된 '한강개발3개년계획' 의 핵심은 바로 여의도 개발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시는 직원 월급조차 제때 주기 어려울 만큼 재정난에 허덕였고, 여의도 개발은 도시 발전과 '시 재정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절박한 승부수였습니다.


여의도를 물로부터 해방시킬 열쇠는 섬 둘레에 거대한 제방을 쌓는 '윤중제(輪中堤)' 공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야심 찬 계획은 시작부터 거대한 벽에 부딪혔습니다. 

하천 관리를 책임지던 건설부가 홍수 조절 기능(유수지)을 하는 여의도를 개발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김현옥 시장은 자신의 경력을 건 도박을 감행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직접 재가를 받아 공사를 밀어붙였습니다. 

1968년, 장마가 오기 전에 공사를 끝내야 한다는 절대 절명의 과제 아래 100일간의 속도전이 펼쳐졌습니다. 

연인원 52만 명과 엄청난 장비가 투입된 끝에 마침내 그해 6월, 총 길이 7.6km의 윤중제가 완공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제방 공사를 넘어, 변덕스러운 자연에 맡겨졌던 땅을 인간의 의지로 통제하고 아무것도 없던 모래벌판을 거대한 도시 개발의 '캔버스'로 만든, 여의도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3. 아스팔트의 시대: 권력의 광장, 5.16

3.1. "녹지 대신 아스팔트를 깔아라"

윤중제로 새로운 땅이 생기자,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김현옥 시장에게 광장 건설을 지시합니다. 

당시 서울시는 녹지와 화단이 가득한 유럽풍 광장을 계획해 보고했지만, 박 대통령은 지도에 직접 구획을 그으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녹지 대신 아스팔트를 깔아라."

그가 원했던 것은 폭 200m, 길이 1.35km에 달하는 거대한 아스팔트 광장이었습니다. 

'5.16 광장'으로 명명된 이 공간은 두 가지 핵심 목적을 품고 있었습니다.


• 군사적 목적: 유사시 전투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비상 활주로.

• 정치적 목적: 국군의 날 열병식과 대규모 관제 집회를 통해 국력을 과시하고 체제를 선전하는 권력의 상징.


흥미롭게도 이 광장의 활주로는 남북 방향으로 건설되었는데, 이는 동서 방향이었던 일제강점기 비행장의 흔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최후기 여의도공항의 항공사진


3.2. 체제 경쟁의 상징

5.16 광장은 남북이 극한으로 대립하던 냉전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집회와 열병식에 대한 경쟁 심리가 작용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이 광장은 북한에 대한 체제 우위를 과시하려는 목적이 컸습니다.

1975년 5월에 열린 '총력안보시민궐기대회'에는 무려 200만 명 이상의 시민이 동원되었습니다. 

이처럼 5.16 광장은 국가 권력이 국민을 동원하고, 그 힘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적극 활용되었습니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 탄생한 이 거대한 광장은, 앞으로 여의도라는 섬 전체가 국가의 핵심 기관들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중력의 중심이 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4. 섬의 성장: 정치, 금융, 방송의 중심지가 되다

4.1. '여의도'라는 고유명사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여의도는 대한민국의 심장부로 급격히 성장했습니다. 

5.16 광장이라는 권력의 심장을 중심으로 국가 핵심 기관들이 속속 이전하면서, '여의도'라는 단어는 단순히 지명을 넘어 '정치', '증권가', '방송가'를 의미하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기관
이전 시기
의미
국회의사당
1975년
대한민국 '정치 1번지'의 상징이 됨
증권거래소
1979년
명동 시대를 마감하고 '금융 중심지'로 도약
1980년대 (MBC 1982, SBS 1990)
3대 방송사가 모두 모여 '방송의 메카'를 형성
63빌딩, LG트윈타워
1985년, 1987년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바꾸는 랜드마크이자 경제 성장의 상징


이 시기 여의도는 냉전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품은 '요새화된 섬'이었습니다. 

한강변에는 적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콘크리트 토치카가 곳곳에 매설되었고, 지하에는 대통령 비상 대피용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벙커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63빌딩을 건설할 때는 고층부에 대공포대를 설치하는 계획까지 검토될 정도였습니다.(전승)


4.2. 대한민국 최초의 부촌

1971년, 국내 최초의 고층 아파트 단지 중 하나인 시범아파트 입주를 시작으로 여의도는 계획된 '부촌(富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형 평수 아파트가 즐비했고, 서울에서 자가용의 대중화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동네 중 하나였습니다. 

1977년 목화아파트와 화랑아파트 분양은 각각 45대 1, 70대 1이라는 기록적인 경쟁률을 기록하며 그 인기를 증명했습니다. 

여의도는 단순한 행정 및 업무 지구가 아니라, 상류층을 위한 최첨단 주거 공간으로 설계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의 심장부로 성장한 여의도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또 다른 거대한 변신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권력의 공간이었던 광장의 주인이 바뀌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5. 광장에서 공원으로: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시민의 품으로

5.1. 민주화 시대, 광장의 새로운 쓰임새

1990년대, 문민정부가 출범하며 민주화 시대가 열리자 5.16 광장은 '여의도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간의 쓰임새도, 주인도 달라졌습니다.


권위주의 시대의 상징이었던 광장은 이제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 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유세장이 되어 민주주의의 열기를 뿜어냈고, 대규모 종교 집회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KBS '이산가족찾기' 특별 방송 당시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이산가족들이 애타게 서로를 찾는 만남의 광장으로 변신하여 전 국민의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5.2. 아스팔트에서 잔디로

시대가 변하면서 군사정권의 잔재인 거대한 아스팔트 광장을 걷어내고 시민들에게 온전한 휴식 공간을 돌려주자는 사회적 요구가 커졌습니다. 

마침내 여의도광장을 공원으로 만들기로 한 역사적인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1997년 공원화 사업이 시작되었고, 2년 뒤인 1999년 마침내 '여의도공원' 이 문을 열었습니다. 

공원 중앙에는 특별한 기념물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 탔던 기종인 C-47 수송기 모형과 공군 창설 기념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여의도가 비행장이었던 과거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국가에 의해 통제되던 거대한 아스팔트 공간이 시민들이 자유롭게 거니는 녹지 공간으로 바뀐 것은, 대한민국 사회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 시민 중심의 시대로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변화였습니다.


여의도 공원 C-47 비행기 전시관


시대의 얼굴을 담아 끊임없이 변하는 섬

조선 시대 말과 양이 뛰놀던 목장에서 시작해 일제의 비행장으로, 군사정권의 거대한 광장을 거쳐 오늘날 시민의 공원과 국제 금융 도시로 자리 잡기까지, 여의도의 역사는 한 편의 압축된 현대사와 같습니다.

이 섬의 변천사는 특정 시대의 필요와 욕망이 땅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국가 안보와 체제 경쟁의 논리가 아스팔트 활주로를 만들었고, 민주화와 시민 사회의 성장이 그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잔디를 심었습니다.


오늘날 여의도는 더현대 서울과 파크원 같은 새로운 랜드마크가 들어서며 여전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섬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스스로를 끊임없이 빚어내고 있습니다. 

버려졌던 모래섬에서 대한민국의 심장부로 변신한 여의도는, 앞으로 또 어떤 시대의 얼굴을 담아내며 새로운 이야기로 채워질까요? 

이 섬의 변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서울 여의도의 형성과 변신을 다룬 각종 역사 자료와 공개 아카이브(지도, 행정 기록, 신문 기사 등)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가 더 잘 그려 보실 수 있도록 일부 장면 묘사와 서술 톤은 이야기 형식으로 각색한 서사형 글입니다.

연대기식 강의가 아니라 ‘버려진 모래섬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심장으로 바뀌었는가’라는 흐름을 따라가는 재구성 서사이며, 주요 연도·사건·기관 이동 시점은 확인 가능한 자료를 따르려 노력했습니다. 

다만 여의도 지명 유래처럼 설이 갈리는 대목은 여러 견해 중 하나를 소개하는 수준으로만 활용한 것으로, 단정적 사실이라기보다 당시 인식과 분위기를 보여 주는 장치로 이해해 주세요.

등장 인물·지명·시설명은 처음 한 번만 풀어 쓰거나 한글·원어를 함께 표기한 뒤, 이후에는 읽기 흐름을 위해 간단한 형태로만 반복 표기했습니다.


The article shows how Yeouido went from floodplain island to core of Korean politics and finance. 

Once an empty sandbar and pasture, it became a Japanese airfield, then base of the young ROK Air Force. 

In the late 1960s an embankment reclaimed the land and enabled the 5.16 Plaza, used as emergency runway and stage for authoritarian rallies. 

From the 1970s the National Assembly, stock exchange, broadcasters and upscale apartments moved in, so “Yeouido” came to mean power and money. 

With democratization the plaza hosted protests and, in 1999, was remade as grass-covered Yeouido Park. 

Today malls, offices and parks show the island still changing with Korea’s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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