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1세, 왕 중의 왕: 쿠데타로 시작해 제국을 설계한 페르시아의 위대한 통치자 (Darius I)


위대한 왕, 다리우스 1세 이야기


나는 다리우스, 위대한 왕, 왕 중의 왕, 만국의 왕, 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아르사메스의 손자, 아케메네스 가문이다.

- 베히스툰 비문 中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위대한 왕, 다리우스 1세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렸던 통치자 중 한 명이지만, 그가 왕이 되는 과정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무자비했답니다.

권력을 향한 냉철한 책략과 제국을 꿰뚫어 보는 비범한 지혜를 모두 가졌던 인물, 다리우스. 

과연 그는 어떻게 그 위대한 왕좌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이제부터 그 극적인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리우스 1세


1. 혜성처럼 나타난 야심가, 왕좌를 차지하다

키루스 대제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원정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페르시아 제국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바로 이때, 자신이 죽은 캄비세스 2세의 동생 '바르디야'라고 주장하는 '가우마타'라는 인물이 나타나 왕위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젊고 야심만만한 귀족, 다리우스였죠. 

다리우스는 6명의 동료 귀족들과 함께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궁전 깊숙한 곳, 왕의 침소까지 거침없이 달려가 격렬한 싸움 끝에 가짜 왕 가우마타를 암살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제 새로운 왕을 뽑아야 할 시간. 

쿠데타에 성공한 다리우스를 포함한 7명의 귀족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동이 틀 때 각자 말을 타고 성 밖에 모여, 가장 먼저 말이 우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여기서 다리우스의 비범함, 혹은 교활함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마부 오이바레스를 시켜 암말의 냄새를 손에 묻혀 오게 한 뒤, 해가 뜰 무렵 자신의 말 코에 그 냄새를 갖다 대었습니다. 

냄새에 흥분한 다리우스의 말이 가장 먼저 "히히힝!"하고 울었고, 약속에 따라 그는 페르시아의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다리우스는 이 교활한 계책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 자신의 말이 우는 모습의 조각상을 세우고 이런 비문을 새겼다고 합니다.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리우스는 그의 말의 영리함과 마부 오이바레스의 기발한 계책 덕분에 페르시아의 주권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다리우스가 베히스툰 비문에 새겨 세상에 알린 공식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어쩌면 다리우스가 죽인 것은 가짜 왕 가우마타가 아니라, 진짜 왕위 계승자였던 '바르디야'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다리우스가 정통성이 부족한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죽인 왕을 '가짜'로 만들고 이 모든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주장입니다. 

역사는 이처럼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여러 해석이 존재한답니다.

어쨌든 꾀를 내어 극적으로 왕이 되었지만, 다리우스 앞에는 제국 전역에서 일어나는 거센 반란이라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 제국을 뒤흔든 위기, 그리고 두 번의 원정

다리우스는 즉위 후 2년 동안 무려 19번의 전쟁을 치르며 9명의 반란 주모자들을 처단해야 했습니다.

제국을 안정시킨 그는 곧 밖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의 원정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2.1. 스키타이 원정: 꾀 많은 유목민과의 힘겨운 싸움

다리우스는 흑해 북쪽의 강력한 유목 민족 스키타이를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스키타이인들은 정면 대결을 교묘하게 피했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군이 지나갈 길의 우물을 메우고 식량을 없애는 '청야 전술' 로 페르시아 대군을 텅 빈 초원 한가운데서 굶주리고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스키타이인들은 다리우스에게 기묘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바로 새 한 마리, 쥐 한 마리, 개구리 한 마리, 그리고 화살 다섯 개였죠. 

다리우스는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쥐는 땅에 살고, 개구리는 물에 살며, 새는 하늘을 난다. 즉, 땅과 물과 하늘을 모두 바친다는 뜻이다. 화살은 그들의 군사력을 상징하니,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항복하겠다는 의미로구나!"

하지만 다리우스의 측근이었던 고브뤼아스는 전혀 다른, 소름 끼치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이여, 만약 당신들이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쥐가 되어 땅속으로 숨지 못하며, 개구리가 되어 호수로 뛰어들지 못한다면, 이 화살에 맞아 결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결국 참다못한 다리우스는 스키타이의 왕 이단튀르수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다리우스의 편지: "왜 자꾸 도망만 치는가? 싸울 자신이 있다면 멈춰서 싸우고, 그렇지 않다면 항복의 뜻으로 '흙과 물'을 바쳐라."

그러자 이단튀르수스는 조롱 섞인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단튀르수스의 답장: "나는 누구도 두려워 도망친 적이 없다. 그저 우리 방식대로 할 뿐이다. 싸우고 싶거든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 파헤쳐 보아라. 그때 가서 우리가 정말 싸우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대가 내 주군이라고 운운한 데 대한 나의 반응은 한마디로 ‘엿 먹어라’요."


결국 보급 문제와 질병으로 페르시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해야 했습니다. 

이 원정은 참담한 패배로 끝났지만, 다리우스는 이 경험을 통해 정규군으로는 상대하기 힘든 유목민의 전술과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것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리우스 1세의 스키타이 원정


2.2. 페르시아 전쟁의 서막: 마라톤 전투의 패배

다리우스의 치세 말기, 그의 분노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합니다.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아테네가 도운 것입니다. 

이에 다리우스는 그리스 본토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결심합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대군은 아테네 근처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습니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페르시아군이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의 완패였습니다. 

아테네 중장보병의 용맹과 밀티아데스 장군의 뛰어난 전술 앞에 페르시아군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패배가 페르시아 제국의 위상을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마라톤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는 여전히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패배는 다리우스에게 큰 굴욕감을 안겨주었고, 복수를 다짐한 그는 더 큰 규모의 2차 원정을 준비하게 됩니다. 

이 계획은 훗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이어져 그 유명한 '페르시아 전쟁'의 불씨가 됩니다.

비록 원정에서는 쓴맛을 보기도 했지만, 다리우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전쟁터가 아닌 제국을 다스리는 내치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주요 지역


3. 제국의 위대한 설계자, 다리우스의 업적

당시 페르시아에는 "키루스는 싸움꾼, 캄비세스는 술꾼, 다리우스는 장사꾼이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이는 다리우스가 단순히 영토를 넓히는 것을 넘어, 제국의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만든 위대한 행정가였음을 보여주는 별명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트라프(Satrap) 제도 확립: 다리우스는 거대한 제국을 20여 개의 행정 구역(사트라피)으로 나누고, 각 지역에 총독(사트라프)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총독의 권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아주 교묘한 견제 장치를 만들었죠. 

총독의 군사 지휘권과 재정권을 분리해 각각 별도의 사령관과 재무관을 두어 왕에게 직접 보고하게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왕이 직접 임명한 감찰관인 '왕의 눈', '왕의 귀' 를 수시로 파견해 총독들을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견제 장치 덕분에 다리우스는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을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520-505년경. 은화 시글로스


2. '왕의 길' 건설과 화폐 통일: 제국의 서쪽 끝 사르디스부터 수도 수사까지 이어지는 약 2,700km의 도로망인 '왕의 길' 을 건설했습니다. 

이 길 덕분에 왕의 명령은 역참을 통해 보름 안에 제국 전역에 전달될 수 있었고, 정보와 물자 역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국 최초로 '다릭(Daric)' 금화와 '시글로스(Siglos)' 은화를 발행하여 화폐를 통일했습니다. 

통일된 도로와 화폐 덕분에 제국 어디서든 편리하게 무역을 할 수 있었고, 이는 페르시아를 당대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붉은 선으로 표시된 왕의 길


3. 관용 정책: 다리우스는 정복지의 여러 민족들이 각자의 언어, 종교, 문화를 존중하도록 허락했습니다. 

특히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는 것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주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제국이 큰 갈등 없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이 관용 정책이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리우스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4. 다리우스의 마지막과 그의 유산

다리우스는 마라톤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다시 한번 그리스 원정을 준비하던 중, 기원전 486년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란 나크쉬에 로스탐에 있는 다리우스 대왕의 무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단순히 영토를 넓힌 정복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흩어져 있던 제국에 질서를 부여하고, 행정과 경제의 기틀을 마련하여 페르시아를 진정한 '제국'으로 만든 위대한 통치자였습니다. 

그가 만든 견고한 시스템은 이후 150년 이상 페르시아 제국이 번영을 누리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다리우스와 동료들이 쿠데타에 성공한 직후 페르시아의 미래를 놓고 어떤 정치 체제를 선택할지 토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민주정, 과두정, 그리고 군주정이 논의되었고, 최종적으로 다리우스의 강력한 주장으로 군주정이 채택되었죠. 

이 선택은 페르시아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다리우스와 같은 위대한 왕의 시대에는 제국이 강력하게 번영했지만,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체제는 왕의 능력에 따라 제국의 운명이 좌우되는 본질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약점은 다리우스보다 능력이 부족했던 후대 왕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천재적인 인물을 만났을 때, 거대한 제국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글은 현재까지 알려진 역사 자료와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구성하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몇 장면과 표현을 다소 서사적으로 풀어 쓴 역사 교양형 글입니다. 

다리우스 1세의 평가와 관련해서는 학계 내부에도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므로, 이 글의 관점이 모든 연구자를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재미있게 읽되, 학술 인용이나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반드시 전문 서적과 논문을 함께 참고해 주세요.


This article explores Darius I, the Achaemenid “King of Kings” who seized the Persian throne in a coup, crushed empire-wide revolts, and then turned outward with mixed success: costly failures in Scythia and at Marathon, yet enduring prestige as ruler of the Near East. 

Beyond the battlefield, Darius appears as an architect of empire: creating the satrapy system, building the Royal Road, standardizing coinage, and ruling through measured religious tolerance. 

Drawing on ancient inscriptions and Greek historians, the story follows both his calculated rise and structural reforms, showing how his strengths and the limits of personal monarchy shaped the later fate of the Persi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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