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인도에서 ‘힌두교’는 어떻게 발명됐나: 다르마 재구성과 인도식 세속주의의 기원 (History of Hinduism)


근대 '힌두교'의 형성과 인도식 세속주의의 기원: '궁극적 종교'와 '관습적 종교'의 분리를 중심으로


서론: 문제 제기

본 글은 근대 '힌두교(Hinduism)'가 식민 권력의 행정적 필요와 인도 지식인들의 철학적 열망 사이의 모순적 타협의 산물임을 논증한다. 

서구의 '종교(religion)' 개념이 식민 시대 인도에 도입되면서, 인도의 고유한 사회·문화적 규범 체계였던 '다르마(Dharma)'가 '힌두교'라는 단일 종교로 재구성되는 과정은 단순한 용어의 번역을 넘어선 인식론적 폭력이었다. 

이 과정에서 '궁극적 종교'와 '관습적 종교'로의 분열은 단순한 개념적 구분을 넘어, 독립 이후 인도 국가가 세속주의를 실천하고 종교적 정체성을 정치화하는 근본적인 문법을 형성했다.


이 분석의 핵심 틀은 '힌두교'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궁극적 종교(ultimate religion)'와 '관습적 종교(customary religion)'의 분리 현상이다. 

전자가 업(Karma)과 윤회(Samsara)와 같은 보편적 철학 체계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카스트 제도와 같은 특수한 사회적 관습과 정체성을 지칭한다. 

식민 권력의 시선은 인도의 다원적 전통을 '힌두교'라는 단일한 통계적 실체로 객체화하는 과정에서, 후자인 '관습'을 힌두교의 본질로 고착시켰다.

본 글은 이러한 지성사적 변동이 독립 이후 인도의 독특한 세속주의, 즉 국가가 종교 공동체의 사회적 관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델을 어떻게 탄생시켰는지 탐색할 것이다. 

나아가 이 역사적 과정이 힌두교의 철학적 전통을 약화시키고 정체성 정치를 강화함으로써, 현대 인도 사회에서 나타나는 반지성주의 담론에 어떤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는지 그 함의까지 고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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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신들


제1장: 서구의 '종교'와 인도의 '다르마' - 개념의 충돌

본격적인 역사 분석에 앞서, 이 논의의 출발점은 서구에서 형성된 '종교'라는 개념과 인도의 전통적 개념인 '다르마'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규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두 개념의 충돌을 이해하는 것은 식민주의의 시선이 인도 사회를 어떻게 오해하고 재구성했는지를 파악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분류 체계가 인도의 고유한 현실과 만났을 때 발생한 개념적 불일치는 단순한 오역이 아니라, 이후 '힌두교'라는 새로운 실체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지적 토대가 되었다.


다르마의 다층적 의미

인도의 전통적 개념인 '다르마(Dharma)'는 서구의 '종교(religion)'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 매우 광범위하고 다층적인 개념이다. 

다르마는 개인의 윤리적 삶에서부터 사회적 질서, 그리고 우주적 진리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을 관통하는 총체적인 규범 체계였다. 

그것은 분리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삶 자체의 질서였다. 

『위키백과』 자료에 따르면, 다르마는 다음과 같은 넓은 범위의 의미를 포괄한다.


• 최고의 진리: 우주적 질서와 법칙, 궁극적 실재.

• 종교적 규범: 신에 대한 의례와 인간의 신성한 의무.

• 사회 규범: 법률, 제도, 관습 등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모든 규칙.

• 행위적 규범: 윤리, 도덕 등 개인이 마땅히 따라야 할 올바른 행위의 기준.


개념적 충돌과 다르마의 축소

반면, 서구에서 형성된 '종교' 개념은 통일된 교리, 유일한 성전, 체계적으로 조직된 교단, 그리고 신앙과 세속의 명확한 분리를 전제한다. 

이러한 틀로 인도의 현실을 파악하려 했을 때, 식민 통치자들과 서구 학자들은 다르마의 총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범주로 그것을 축소하려 했다. 

이 과정은 중립적인 번역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폭력적으로 재단하는 '개념적 절단(conceptual amputation)'에 가까웠다.


이 과정에서 다르마의 광범위한 의미는 서구의 "종교"에 해당하는 '사회적 규범체계'로 한정되어 이해되기 시작했다. 

즉, 다르마가 가진 철학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은 희석되고, 카스트와 같은 사회적 관습이 '힌두교'라는 종교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간주되었다. 

이 개념적 충돌은 식민 통치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힌두교'라는 새로운 실체를 빚어냈고, 다음 장에서는 이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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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식민주의와 '힌두교'의 발명

이 장은 본 글의 핵심적인 역사적 배경을 제공한다. 

근대적 의미의 '힌두교'는 고대로부터 존재해 온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식민 통치라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발명'된 범주에 가깝다. 

식민주의 이전 인도의 다원적 종교 전통과, 통치의 편의를 위해 모든 것을 분류하고 서열화하려 했던 식민주의의 범주화 정치가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단일한 '힌두교'를 형성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논의의 핵심이다.


2.1. 근대 이전 인도의 다원적 전통과 종교적 관용

식민 시대 이전 인도 사회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단일하고 통일된 '힌두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지역과 공동체에 따라 다양한 신앙 체계와 종파가 공존하는 급진적인 다원성의 전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를 들어, 최고신을 누구로 섬기느냐에 따라 시바를 숭배하는 시바파(Shaivism), 비슈누를 숭배하는 비슈누파(Vaishnavism), 여신을 숭배하는 샤크티파(Shaktism) 등 수많은 독립적인 종파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각기 구별되는 신학, 의례, 경전을 가졌으며, 이들을 하나의 '힌두교'라는 우산 아래 묶는 통일된 정체성은 매우 희박했다.


국가와 종교의 관계 또한 서구의 정교분리 모델과는 다른, 독특한 전근대적 통치 모델을 보여준다. 

무굴 제국의 악바르 황제(재위 1556-1605)의 통치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이슬람 통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종교 공동체를 관리하고 공존시키는 관용 정책을 펼쳤다. 

그는 비이슬람교도에게 부과되던 인두세(지즈야)를 폐지했으며, 나아가 이슬람, 힌두교, 기독교 등 여러 종교의 교리를 통합하려는 시도로서 '디네 이라히(Dīn-i Ilāhī, 신의 종교)'를 창시하기도 했다. 

이는 특정 종교를 배타적으로 옹호하는 대신, 다양한 신앙 공동체를 국가의 틀 안에서 관리하는 전근대 인도의 독특한 통치 방식을 보여준다.


악바르 대제


2.2. 식민 통치와 범주화의 정치

악바르 황제의 사례에서 보듯 다원적 전통을 관리하던 전근대 인도의 방식과 달리, 영국 식민 통치는 전례 없는 규모의 분류와 서열화를 통해 인도의 복잡한 현실을 단일한 범주로 재단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는 인구 조사(census)였다. 

식민 정부는 인도의 유동적인 공동체들을 정적이고 계산 가능한 객체(object)로 만들어 통제하기 위한 거대한 분류 작업을 시작했다.


특히 카스트 제도는 이 범주화 정치의 핵심 대상이었다. 

이전까지 지역마다 유동적이고 복합적인 관계망으로 존재했던 수천 개의 자티(Jati, 출생 집단)는 인구 조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분류되고 서열화되었다. 

이 행정적 개입은 "이전에는 유동적이었던 사회 구조를 법적으로 경직시켰다."


이러한 분류 작업은 종교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영국의 식민적 시선은 다양한 신앙, 종파, 관습을 가진 수많은 집단을 '힌두교'라는 단일한 종교적 실체로 묶었다. 

이는 행정적 편의를 위한 조치였을 뿐만 아니라, '힌두교도'를 이슬람교도와 같은 다른 종교 공동체와 명확히 구분하고 대립시키는 통계적 실체(statistical entity)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즉, 근대적 '힌두교'는 내적 신념의 통일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식민 통치의 인구조사라는 외부적 시선에 의해 '발명'된 측면이 강하다.

이처럼 식민 권력에 의해 외부적으로 '발명'된 '힌두교'는 필연적으로 내적 모순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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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궁극적 종교'와 '관습적 종교'의 이중 구조

식민주의가 낳은 '힌두교'는 심각한 내적 분열을 겪었다. 

한편으로는 서구 사회에 내세울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궁극적 종교'의 면모가 강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의 편의를 위해 법제화된 '관습적 종교'로서의 카스트가 그 실질적 정체성으로 고착화되는 역설이 발생했다. 

이 장에서는 이 이중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현대 인도 사회를 이해하는 데 어떤 핵심적인 통찰을 제공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3.1. 궁극적 종교: 철학으로서의 사나타나 다르마

'힌두교'의 철학적이고 초월적인 측면을 본 글에서는 '궁극적 종교(ultimate religion)'로 정의한다. 

이는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와 개인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힌두교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사나타나 다르마(Sanatana Dharma)', 즉 '영원한 종교' 또는 '영원한 법'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지향하는 정체성을 반영한다.

'궁극적 종교'의 핵심 교리는 업(Karma)과 윤회(Samsara)의 인과율이다. 

이에 따르면, 개인의 모든 행위(카르마)는 잠재적 세력이 되어 결과를 낳고, 이는 끝없는 윤회의 수레바퀴로 이어진다. 

인간은 현세의 삶 속에서 정의롭고 올바른 행위, 즉 선업(善業)을 쌓음으로써 이 카르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해방인 해탈(解脫)에 이를 수 있다. 

이 가르침은 개인의 내면적 성찰과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심오한 철학 체계로서, '힌두교'의 지성적 전통을 구성하며, 집단적 정체성보다는 개인의 구원을 중심에 둔다.


3.2. 관습적 종교: 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카스트

반면, '힌두교'의 사회적이고 관습적인 측면은 '관습적 종교(customary religion)'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신념보다는 집단의 정체성, 특히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신분과 관련된 제도와 규범을 의미한다. 

식민 통치 하에서 '힌두교'의 가장 가시적인 특징으로 부각된 것은 바로 이 '관습적 종교', 즉 카스트 제도였다.


영국 식민 정부는 인구 조사와 법률 제정을 통해 카스트 제도를 통치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삼았다. 

식민 행정가들은 수천 개의 자티(Jati)를 공식적으로 분류하고 서열화했으며, 이를 조세, 고용, 법률 적용의 기준으로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카스트는 단순한 사회적 관습을 넘어, '힌두교'라는 종교의 본질적인 특징이자 개인의 법적·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제도로 고착화되었다.


결론적으로, 근대 '힌두교'는 이중적인 실체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사나타나 다르마'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보편적이고 철학적인 '궁극적 종교'를 표방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 통치에 의해 강화된 경직된 사회적 신분 제도, 즉 '관습적 종교'로서의 카스트를 자신의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구조는 독립 이후 인도의 국가 정체성, 특히 세속주의 개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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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인도식 세속주의'의 형성과 그 특징

앞서 분석한 '힌두교'의 이중적 구조, 즉 '궁극적 종교'와 '관습적 종교'의 분리는 독립 이후 인도가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어떻게 서구 모델과 구별되는 인도의 독특한 세속주의 모델을 탄생시켰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4.1. 서구 세속주의와 인도 모델의 비교

서구 세속주의의 핵심 원칙은 '정교분리(政敎分離)'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국가가 종교 기관의 활동에 개입하지 않고, 종교 또한 국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상호 불간섭의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국가와 종교는 명확히 구분된 별개의 영역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인도의 세속주의는 이러한 단순한 분리 모델을 따르지 않는다. 

인도식 세속주의는 국가가 모든 종교 공동체와 '원칙적 거리(principled distance)'를 유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필요에 따라 국가가 종교 문제에 개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국가는 특정 종교를 옹호하지 않지만, 모든 종교 공동체를 평등하게 보호하고 관리하며, 때로는 사회 개혁을 위해 종교적 관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4.2. '관습'에 개입하는 국가: 인도식 세속주의의 핵심

인도식 세속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앞서 논의한 '힌두교'의 이중 구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인도 국가는 '궁극적 종교'의 영역, 즉 개인의 신념이나 철학적 교리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관습적 종교'의 영역, 특히 카스트 제도와 같이 사회적 차별을 야기하는 불평등한 제도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개혁을 주도했다.


이러한 원칙은 독립 인도의 헌법에 명확히 반영되었다. 

1950년에 제정된 인도 헌법은 카스트에 기반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 억압받아 온 집단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지정 카스트(Scheduled Castes) 및 지정 부족(Scheduled Tribes)'을 위한 적극적 우대조치, 즉 정부 일자리와 교육 기관 입학 정원의 일정 비율을 할당하는 쿼터제(Reservation system)를 도입했다.


이러한 국가의 개입은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국가는 '힌두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사회적 악습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세속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카스트 기반의 쿼터제를 시행함으로써 카스트를 정치적 자원 배분의 핵심 단위로 만들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카스트를 개인의 중요한 정치적 정체성으로 더욱 고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인도식 세속주의는 '관습적 종교'를 통제하고 개혁하려는 국가의 의지와, 그 과정에서 오히려 종교적 정체성이 정치화되는 현상이 복합적으로 얽힌 독특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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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현대 인도 반지성주의 담론에 대한 함의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근대 '힌두교'의 형성 과정과 인도식 세속주의의 등장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인도 사회에서 관찰되는 반지성주의적 경향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이 결론적 장에서는 '힌두교'가 철학적 체계에서 사회적 정체성으로 변모한 과정이 현대 인도의 지성적 담론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식민주의 통치와 그에 따른 범주화의 정치는 인도의 다원적이고 심오했던 '다르마' 전통을 '힌두교'라는 단일한 종교로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힌두교'의 핵심 정체성은 보편적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적 차원보다, 카스트 제도와 같은 가시적인 사회적 관습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즉, '궁극적 종교'로서의 지성적·철학적 전통은 대중적 담론의 장에서 점차 약화되고, '관습적 종교'로서의 집단적 정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힌두교가 철학적 탐구의 대상에서 정치적 동원을 위한 정체성의 기호로 변모하면서, 비판적 사유가 설 자리는 점차 축소되었다. 

이는 합리적 토론보다 집단적 정체성에 기반한 감정적이고 배타적인 주장이 득세하는 현대 인도의 반지성주의적 풍토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신앙은 더 이상 지성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집단적 소속감을 확인하고 타자와의 경계를 설정하는 맹목적 충성의 대상이 되는 경향이 강화된 것이다. 

복잡한 사회 문제를 이성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신앙의 이름으로 단순화하고 적대적 구도를 설정하는 반지성주의 담론이 득세하는 배경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과정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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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요약 및 전망

이 글은 근대 '힌두교'와 '인도식 세속주의'가 형성되는 복합적인 역사적 과정을 '궁극적 종교'와 '관습적 종교'의 분리라는 분석 틀을 통해 고찰했다. 

본문의 핵심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힌두교'의 재구성: 서구의 근대적 '종교' 개념이 식민 통치를 통해 인도에 도입되면서,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던 '다르마'는 '힌두교'라는 단일하고 배타적인 종교 범주로 재구성되었다.

2. 이중 구조의 형성: 이 과정에서 '힌두교'는 내적으로 분리되었다. 한편에는 업과 윤회 등 개인의 해탈을 다루는 철학적 체계인 '궁극적 종교'가, 다른 한편에는 식민 행정의 편의에 의해 그 본질로 규정된 카스트 제도와 같은 사회적 신분 체계인 '관습적 종교'가 공존하는 모순적 실체가 되었다.

3. 인도식 세속주의의 탄생: 이러한 이중 구조는 독립 이후 인도의 독특한 국가-종교 모델을 낳았다. 인도 국가는 개인의 신념 영역('궁극적 종교')은 존중하되, 카스트와 같은 사회적 차별 문제('관습적 종교')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개혁을 주도하는 '원칙적 거리'의 세속주의를 채택했다.

4. 현대적 함의: '힌두교'가 철학적 탐구의 대상에서 정치적 정체성으로 변모한 이 모든 역사적 과정은, 합리적 사유보다 집단적 정체성을 앞세우는 현대 인도의 반지성주의적 담론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궁극적으로 인도의 사례는 '종교'라는 범주가 보편적 실체가 아니라, 식민 권력의 통치 기술과 피식민 엘리트의 자기 정체성 구축이 충돌하고 협상하는 치열한 각축장임을 폭로한다. 

이는 '종교' 개념 자체를 탈식민적 관점에서 재고해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시사하며, 특정 지역에 대한 이해를 넘어 종교와 근대성, 그리고 국가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중요한 학술적 의의를 제공한다.


이 글은 식민지기 인도에서 ‘힌두교’와 ‘인도식 세속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을 학술적으로 재구성한 해설 글입니다. 

가능한 한 기존 연구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서술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한 개념 정리와 압축·요약 과정에서 일부 해석상의 선택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특정 종교나 집단, 정당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려는 의도는 없으며, 인도 근대사의 맥락을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하나의 관점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보다 엄밀한 학술적 논의를 원하신다면 1차 문헌과 전문 연구서를 함께 참고해 주세요.


This essay argues that modern “Hinduism” and Indian secularism emerged from the colonial recasting of dharma into a single religion. 

It traces how census and law hardened caste as Hinduism's core, while elites promoted a universal “ultimate religion”. 

Independent India then respected inner belief but intervened in caste “customary religion”, shaping today’s identity-driven, sometimes anti-intellectual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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