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역사와 복원
광화문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찬란한 시작부터 격동의 근현대사를 모두 겪으며, 불타고, 옮겨지고, 콘크리트로 지어졌다가,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그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실까요?
1. 자랑스러운 탄생과 첫 번째 시련 (14세기~16세기)
이야기는 조선이 처음 문을 열었던 13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가장 중요한 궁궐)인 경복궁의 정문으로 태어났는데, 처음에는 '사정문'이나 단순히 '남문'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러다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 시절, 1426년에 "임금의 빛(光)이 사방을 덮고 교화(化)가 만백성에게 미친다"는 웅장한 뜻을 담아 '광화문(光化門)'이라는 멋진 이름을 얻게 됩니다.
광화문 앞에는 나라의 중요한 관청들이 모여 있는 육조거리가 펼쳐져, 이곳은 조선의 행정적, 철학적 중심지 역할을 했답니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경복궁 전체가 불타면서 광화문 역시 함께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무려 270여 년 동안, 광화문은 돌 축대만 덩그러니 남은 폐허 상태로 방치되는 슬픔을 겪게 됩니다.
|
| 겸재 정선이 그린 경복궁. 아래 광화문의 석축 4개가 남아있다 |
2. 웅장한 재건과 뜻밖의 수모 (19세기~20세기 초)
폐허로 남아 있던 광화문에 다시 숨을 불어넣은 이는 바로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그는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1865년(고종 2년)부터 경복궁을 대규모로 중건했고, 이때 광화문도 웅장하게 재건되었습니다.
이때 광화문 앞에는 '월대(月臺)'라는 넓은 단상이 함께 만들어졌는데, 이곳은 임금님이 백성과 만나 소통하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또한, 관악산의 불 기운을 누르고 공명정대한 법과 정의를 지키라는 뜻으로 해치 석상 한 쌍이 월대 앞에 세워졌습니다.
이때 새로 단 현판은 임태영이라는 무관이 쓴 한자 글씨였습니다.
|
| 1900년대 광화문 |
하지만 광화문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일본은 경복궁의 심장부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이때 광화문이 청사의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1927년에 문을 해체하여 경복궁 동쪽 구석(건춘문 북쪽)으로 옮겨버리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조선 왕조의 중심축이 힘없이 무너진 것입니다.
게다가 왕과 백성이 소통하던 월대는 1923년 일제가 전차 선로를 만들기 위해 철거하며 사라졌습니다.
|
| 오가와 카즈마사가 촬영한 1880년대의 광화문 |
3. 폭격과 '콘크리트' 복원의 시대 (20세기 중반)
광화문은 광복 후에도 제대로 된 제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폭격을 맞아 아랫부분인 석축만 남고 윗부분인 목조 문루가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
| 한국 전쟁기의 폭격으로 석축만 남은 광화문 (1952년) |
그러다 1968년, 박정희 정부는 광화문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술적, 경제적 이유로 나무 대신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복원하는 '반쪽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복원 과정에서 광화문이 원래 있던 자리보다 뒤로 물러나고, 심지어 옛 총독부 건물을 기준으로 삼는 바람에 축이 3.75도 가량 틀어져 비뚤어진 모습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더해, 현판에는 한자가 아닌 당시 대통령의 친필 한글 글씨가 걸리면서 '전통 복원'보다는 '근대화의 상징'을 강조하는 정치적 의미가 더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콘크리트 광화문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서울의 랜드마크로 기능했습니다.
|
|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 놓인 석조 광화문의 모습(1990년대) |
4. 진정한 제자리를 찾기 위한 노력 (21세기)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되면서 광화문을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열망이 커졌고, 2006년부터 마침내 콘크리트 건물을 해체하고 전통 목조 방식으로 복원하는 대규모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2010년 8월, 광화문은 마침내 본래 위치로 돌아와 일반에게 공개되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 복원도 순탄치 않았는데, 급하게 완공 일정을 맞추느라 (G20 정상회의 일정 등) 충분히 건조되지 않은 목재를 사용하여 현판에 균열이 생기는 부실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현판의 색깔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복원되었으나, 옛 사진 자료(1893년경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장 사진) 등을 통해 원래 검은색 바탕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긴 논란 끝에, 2018년 발견된 기록인 『경복궁 영건일기』에서 '묵질금자(墨質金字;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라는 기록이 확인되면서,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금박을 입힌 글자로 재제작되었습니다.
5. 잃어버린 월대의 귀환 (최근)
광화문이 겪었던 수많은 수난 중 하나였던 월대(월대)의 훼손은 202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회복되었습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월대의 정확한 규모(길이 48.7m, 폭 29.7m)와 4단계에 걸친 변화 과정이 확인되었으며, 복원 과정에서 일제가 월대를 훼손하고 설치했던 전차 선로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
| 새로운 광화문광장 배치도 |
마침내 10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월대와 새로운 검은 바탕 금색 현판이 2023년 10월 15일에 함께 공개됨으로써, 광화문은 오랜 격랑의 역사를 뒤로하고 비로소 완전한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제 광화문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이 모든 역사의 굴곡을 이겨낸 민족의 자긍심을 담은 공간으로 우리 곁에 우뚝 서 있습니다.
|
| 광화문과 2023년에 복원된 월대의 모습 |
광화문의 역사는 마치 심하게 찢어진 가족사진을 복원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수많은 화재와 전쟁으로 사진이 사라지거나 훼손되었고, 때로는 복원 과정에서 사진사가 자신의 의도대로 사진을 살짝 덧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후손들이 수많은 자료를 모아(고증), 원래 사진의 재료(목재)와 색깔(묵질금자)을 찾아내고, 심지어 사진이 놓여있던 원래 액자(월대)까지 완벽하게 복원해 낸 것입니다.
이제 광화문은 과거의 상처를 모두 담고 있으면서도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사료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광화문의 변천사를 정리하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장면 묘사와 비유를 덧붙인 서사형 글입니다.
연대·사건·명칭은 최대한 현재 알려진 연구에 맞추어 정리했지만, 세부 해석과 감상에는 필자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학술 연구나 보고서 작성에 활용하실 경우에는 『경복궁영건일기』, 발굴 보고서, 문화재청 자료 등 1차·전문 자료를 반드시 함께 참고해 주세요.
Gwanghwamun, main gate of Gyeongbokgung, condenses centuries of Korean history.
Built as the palace gate and renamed under King Sejong, it was burned in war, left in ruins for generations and eventually rebuilt.
Under Japanese rule it was dismantled, shifted aside before the Government-General and lost its stone terrace; the pavilion was destroyed in the Korean War and replaced in 1968 by a misaligned concrete gate.
After that building was removed, restoration returned Gwanghwamun to its original site, timber form and black signboard with gold letters, and rebuilt the terrace.
Reopened in 2023, it stands as gate and monument, its outline marked by fire, occupation and recovery.
.jpg)




.jpg)
.jp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