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행정·과학이 만든 도시 대전: 한밭에서 대전광역시로 이어진 도시 성장 스토리 (The History of Daejeon)


대전의 도시 형성과 정체성 변천사


I. 배경과 목적

대전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여타 고도(古都)와는 그 탄생의 궤를 달리하는 도시다. 

유구한 과거로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 경부선 철도 부설이라는 특정 역사적 계기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듯 탄생한 명백한 근대 도시이기 때문이다. 

황량한 벌판이었던 '한밭'이 교통의 결절점으로 부상하며 인구와 자본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는 도시 발전의 원동력이자 정체성의 근간이 되었다. 

이처럼 대전의 역사는 한국 근대화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본 포스팅은 이러한 대전의 독특한 형성사에 주목하여 그 발전 과정과 정체성 변천사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구체적으로, 경부선 철도 개통을 기점으로 한 도시의 태동기부터, 일제강점기 일본인 사회가 도시의 물리적 구조와 경제 기반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추적하고자 한다. 

나아가 해방과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거쳐, 국가 주도의 발전 전략 속에서 '과학수도'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고 오늘날의 다층적인 모습을 갖추기까지의 과정을 면밀히 탐구할 것이다.

이를 위해 본 글은 먼저 근대 이전 대전 지역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 뒤, 철도 부설과 함께 시작된 근대 도시의 탄생 과정을 분석한다. 

이어 일제강점기 행정 및 경제 중심지로 부상하며 식민 도시로서의 골격을 갖추는 과정을 고찰하고, 마지막으로 해방 이후 과학과 행정의 도시로 변모하며 정체성을 다층화해 온 현대적 변화를 조망함으로써 대전이라는 도시의 본질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대전의 야경


II. 근대 이전의 대전: '한밭'의 유래와 역사적 배경

근대 도시 대전의 급격한 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이 땅이 지녔던 역사적, 지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20세기 이전의 대전 지역은 비록 국가적 차원에서 주목받는 중심지는 아니었으나,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터를 잡고 문화를 일구어 온 유서 깊은 공간이었다. 

이 시기 행정 구역의 분절성과 농업 중심의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이후 철도 부설이라는 외부적 충격이 어떻게 새로운 도시 질서를 창출했는지를 분석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대전(大田)'이라는 지명은 '큰 밭'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한밭'에서 유래했다. 

이 한자 지명이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487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다. 

그러나 당시의 '대전'은 오늘날과 같은 단일한 행정 구역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현재의 대전광역시 영역은 회덕현(懷德縣), 진잠현(鎭岑縣), 그리고 공주목(公州牧)의 일부인 유성지역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는 당시 대전 지역이 하나의 통합된 중심지 없이 여러 고을에 분산적으로 속해 있던 광활한 농촌 지역이었음을 시사한다. 

각 지역은 독립적인 행정 체계 아래 고유의 지역성을 유지하며 발전해왔다.

물론 이곳은 선사시대 유물이 출토될 만큼 오랜 거주 역사를 지녔고, 조선후기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요 활동 무대였을 만큼 학문적 전통 또한 깊은 곳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이전까지 대전은 국가의 주요 무대에 등장하는 도시가 아니었으며, 여러 현에 속한 평범한 농경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외부의 강력한 동력 없이는 자생적인 도시 발전이 어려웠음을 방증하며, 곧이어 닥쳐올 거대한 변화의 전사(前史)를 이룬다.


충청도읍지 회덕현에 속한 대전시 옛지도


III. 근대 도시의 탄생: 철도 부설과 일본인 사회의 형성

20세기 초, 두 개의 쇠줄이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며 무명의 농촌 지역이었던 대전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철도 부설은 단순한 교통수단의 등장을 넘어, 새로운 도시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처럼 강력한 외부적 동인(外生的 動因)에 의해 시작된 도시 형성 과정에서, 철도를 따라 유입된 일본인 거류민들은 초기 공간 구조와 사회·경제적 질서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본 장에서는 철도가 어떻게 대전이라는 근대 도시를 탄생시켰으며, 일본인 사회가 그 토대를 어떻게 마련했는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1. 철도, 도시의 기폭제가 되다

대전 근대화의 역사는 철도의 역사와 동의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 탄생과 성장을 이끈 결정적 사건은 다음과 같다.

• 경부선 개통 (1904년):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목적에 따라 부설된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고 이곳에 대전역이 신설된 것은 도시 탄생의 시발점이었다. 

대전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교통망의 중간 거점으로 부상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기 시작했다.

• 호남선 분기 (1914년): 경부선에 이어 호남선 철도가 대전에서 분기되면서 그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전라도의 물산과 인구가 대전을 거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대전은 명실상부한 한반도 교통의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최초의 대전역과 2층식당


2. 일본인 사회의 형성과 초기 도시 구조

철도를 따라 대전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도시의 첫 번째 개척자였다. 

이들은 초기 도시 형성을 주도하며 새로운 시가지를 건설했다.


• 거주지 형성: 일본인들은 대전역을 중심으로 한 원동, 중동, 정동 일대에 집중적으로 정착했다. 

특히 당시에는 하천 범람이 잦아 한국인들의 세력이 미미했던 대전천 주변의 평탄한 지역을 차지하며 그들만의 신흥 시가지를 건설해 나갔다. 

이는 기존의 한국인 마을과 분리된 새로운 도시 공간의 탄생을 의미했다.

• 인구 구성: 일본인의 유입은 급격했다. 

1910년 당시 대전의 전체 인구 약 4,200명 중 일본인은 2,400여 명으로, 전체의 절반을 상회했다. 

이들은 소수 이민자 집단을 넘어, 도시의 사회 구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핵심 구성원으로 부상했다.

• 경제 활동: 초기 일본인들의 직업은 철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운송, 건축, 여관, 상업 등 서비스업에 집중되었다. 

이들은 대전역을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하며 도시의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


1910년대로 추정되는 조선시대의 대전


3. 혼돈 속의 정체성: '대전(大田)'과 '태전(太田)'

도시 형성 초기, 대전의 정체성은 지명에서부터 혼란을 겪었다. 

공식적인 행정 지명은 '대전(大田)'이었으나, 당시 언론 매체였던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 등에서는 '태전(太田)'이라는 표기가 훨씬 더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새롭게 탄생한 도시의 이름조차 사회적으로 확고하게 정착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일제가 식민 통치를 본격화하며 행정적 권위를 통해 지명을 '대전'으로 강제 일원화한 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통용되던 이름을 덮어쓰고 신흥 도시에 중앙 통제적 정체성을 부과하려는 식민적 논리를 명백히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20세기 초 철도 부설과 일본인 사회의 유입은 대전이라는 새로운 도시 공간의 물리적, 사회적 토대를 구축했다. 

일본인에 의해 계획된 철도역 중심의 시가지는 이후 식민 통치의 거점이자 행정 및 경제 중심지로 확장되는 기반이 되었다.


IV. 식민 도시의 확장: 행정 및 경제 중심지로의 부상

철도역을 중심으로 싹튼 대전의 신시가지는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과 맞물려 급속도로 팽창했다. 

이는 단순한 교통 거점을 넘어, 일본의 통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지방 행정과 산업의 중심지로서 체계적인 도시 구조를 갖추는 과정이었다. 

본 장에서는 교량 건설, 충남도청 이전 등 주요 사건들을 통해 대전이 어떻게 식민 도시로서의 면모를 완성해 나갔으며, 그 성장 이면에 드리워진 일본 중심의 도시 특성과 경제 구조를 분석하고자 한다.


1. 도시 공간의 확장과 식민적 질서의 구축

• 기반 시설 확충: 초기 시가지가 대전천 동쪽에 한정되었던 물리적 한계는 교량 건설을 통해 극복되었다. 

1912년 목척교 가설을 시작으로 대전교, 중교 등이 잇달아 건설되면서 시가지는 대전천 서쪽으로 본격적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이는 식민지 자본과 인력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여 도시의 동서 축을 연결하고 공간 확장을 촉진하는 물리적 동력이었다.


1950년대 목척교


• 충남도청 이전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한 것은 도시 발전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대전은 명실상부한 충청남도의 행정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전을 계기로 대전역과 새로운 충남도청을 잇는 '중앙로'가 도시의 핵심 축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이 도로를 따라 일본인 중심의 상업 및 업무 지구가 형성되었다.


1930년대 충남도청사 완공 직후 전경


• 도시 계획 수립: 1937년, 일제는 '조선시가지계획령'에 근거하여 '대전시가지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격자형 도로망과 토지 구획을 통해 오늘날 원도심의 골격을 형성했지만, 그 본질은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공간을 체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도구였다. 

이는 효율적인 통제와 자원 수탈을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일본인 중심의 공간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식민적 의도를 방증한다.


이러한 확장 과정에서 도시의 일본인 중심적 성격은 더욱 뚜렷해졌다. 

대표적으로 충남도청 이전과 함께 대흥동 일대에는 일본인 고위 관료들을 위한 고급 주택지, 즉 관사촌(官舍村)이 대규모로 조성되었다. 

이는 대전의 도시 개발이 철저히 일본인 통치 엘리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2. 식민지 경제 구조의 심화

일제강점기 대전의 경제는 일본의 필요에 따라 재편되고 심화되었다.

• 초기 산업: 도시 형성 초기에는 섬유, 피혁, 양조 등 일상용품 제조업과 일본인 상가를 중심으로 한 도소매업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증가하는 일본인 거류민과 지역 주민들의 소비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산업 구조였다.

• 군수 산업화: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대전의 산업 구조는 급격히 군수 산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일본은 대전을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고, 이에 따라 금속, 기계 등 군수산업이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 대전의 성장은 자생적 발전이 아닌, 철저히 일본의 식민 통치와 대륙 침략이라는 목적 아래 이루어진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외생적 발전이었다. 

행정, 경제, 도시 구조 모든 면에서 일본의 이해관계가 깊숙이 투영된 이 시기의 유산은 해방 이후 대전이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남겨졌다.


V. 해방 이후의 변모와 정체성의 다층화

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을 거치며 대전은 식민 도시의 유산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직면했다. 

전후 복구와 산업화 과정 속에서, 기존의 정체성 위에 국가 주도의 개발 전략에 따라 '과학수도'라는 새로운 층위가 덧씌워지며 다층적인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본 장에서는 교통 중심지로서의 위상 강화와 산업 구조의 변화, 그리고 과학과 행정 기능의 집적을 통해 단일 도심 구조에서 다핵(多核) 도시로 재편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1. 새로운 국가 발전 동력과 대전의 역할

• 교통 중심지의 재확인과 산업 구조 변화: 1970년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대전은 철도에 이어 도로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나 이는 양날의 검이었다.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묶이면서 통과 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해져 과거 지역 거점으로서 수행했던 도매 기능은 약화되었으나, 반대로 소비 인구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소매업은 활성화되는 양면적 효과를 낳았다.

• 과학도시로의 전환: 대전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이었다. 

1973년 대덕연구단지 조성이 시작되면서 대전은 대한민국 과학 연구의 심장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정체성은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대내외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과학도시'는 교통의 요지를 넘어 대전을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브랜드가 되었다.


대전 엑스포 1993년 8월 7일(개장 당일)의 모습


• 행정 기능의 강화 및 다핵구조 형성: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둔산 신시가지 개발과 1990년대 정부대전청사 조성은 도시 구조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원도심에 집중되어 있던 행정, 업무, 금융 등의 핵심 기능이 둔산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도시의 중심축이 분산되었다. 

이로써 대전은 대전역과 충남도청을 중심으로 한 원도심과 정부청사, 시청이 위치한 신도심(둔산)을 양대 축으로 하는 다핵(多核) 도시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 원도심 쇠퇴와 도시재생: 둔산 신도심의 개발과 함께 원도심은 상대적인 쇠퇴를 겪었다. 

중앙로·은행동·대흥동 일대는 오랫동안 충청권 최대의 상업 중심지였으나, 1990년대 이후 대형 상권이 둔산으로 이동하고 외곽 대형 쇼핑몰이 등장하면서 공실과 노후 건축물이 빠르게 늘어났다. 

한때 최신 유행을 선도하던 번화가는 점차 유동 인구가 줄어든 구도심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는 도시 구조 재편의 그늘이자 ‘과학수도’ 이미지 뒤에 가려진 또 다른 대전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지역은 도시재생의 실험장이 되었다. 

은행동 스카이로드, 으능정이 문화의 거리, 테미예술창작센터, 옛 충남도청사를 활용한 대전근현대사전시관 등은 근대 건축과 상업 공간, 문화 예술 기능을 결합해 원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소제동 철도관사촌처럼 일제강점기 철도 도시의 기원을 보여주는 주거 유산도 보존·활용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도시 기억의 장소로 재조명되고 있다. 

최근에는 대흥동·원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며, ‘식민 도시의 유산–전쟁의 상처–산업화와 과학도시–재생과 문화도시’로 이어지는 대전 도시사의 다층성을 한 공간 안에서 체감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


2. 행정구역의 변천

도시의 위상 변화는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해방 이후 대전은 시(市)에서 직할시(直轄市)로, 그리고 광역시(廣域市)로 꾸준히 격상되었다.


연도
주요 변천 내용
비고
1949년
충청남도 대전부에서 대전시로 개칭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름
1989년
충청남도 대덕군을 통합하며 대전직할시로 승격
충청남도로부터 분리 독립
1995년
대전광역시로 명칭 변경


이처럼 해방 이후 대전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단일 도심 구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가 주도의 대규모 개발 사업을 통해 새로운 기능과 공간을 창출했다. 

교통의 중심이라는 전통적 정체성 위에 과학과 행정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더해지면서, 대전은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현대 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VI. 외생적 발전과 다층적 정체성의 도시, 대전

본 글은 20세기 초 철도 부설로 탄생한 근대 도시 대전이 식민 통치기, 산업화 시대를 거쳐 오늘날의 과학수도로 변모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과 정체성 변천사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 대전의 도시 발전은 몇 가지 핵심적인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대전의 성장은 내부의 자생적 동력보다는 외부적 요인(Exogenous Factor)에 의해 결정적으로 추동되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철도 부설과 식민지 행정 중심지 육성 정책은 도시의 탄생과 초기 골격을 결정했다. 

해방 이후에는 국가 균형발전과 과학기술 육성이라는 거시적 국토 개발 전략이 대덕연구단지와 둔산 신도시 개발을 이끌며 도시의 성격과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했다. 

이처럼 대전의 역사는 외부의 필요와 계획이 지역의 운명을 결정해 온 과정의 연속이었다.

둘째, 이러한 외생적 발전 경로는 대전의 정체성이 단선적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에 따라 여러 층위가 중첩되고 병존하는 다층적(多層的) 구조를 형성하게 했다. 

'교통의 요지'라는 최초의 정체성은 1932년 충남도청 이전으로 '행정 중심지'라는 위상을 획득하며 강화되었고, 1970년대 이후 대덕연구단지 조성과 1993년 엑스포를 거치며 '과학수도'라는 가장 강력하고 상징적인 정체성을 덧입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대전은 특정 역사적 계기마다 외부의 힘에 의해 새로운 기능이 이식되고 그에 따라 도시 공간과 정체성이 재구성되어 온 독특한 발전 경로를 걸어왔다. 

교통, 행정, 과학, 교육이라는 다양한 기능과 이미지가 공존하는 오늘날 대전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 산물이다. 

대전의 다층적 정체성은 이 도시가 지닌 잠재력이자, 미래의 통합적인 도시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조율하고 탐색해야 할 과제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대전의 도시 형성과 정체성 변천을 주제로, 근대 이후 행정 자료·통계·도시계획 문서·지방자치단체 발간물·도시사 연구 등을 종합해 정리한 서사형 해설 글입니다.

연도·인구·행정구역 변경 등 구체적인 사실은 당시 공식 기록과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했으며, 각 시기 도시 변화의 의미를 해석하는 부분에는 필자의 관점과 재구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블로그 형식에 맞추어 개별 사료의 출처는 본문에 직접 표기하지 않았고, 일부 설명·비유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서술적 장치일 뿐 허구의 사건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보다 엄밀한 연구가 필요할 경우 대전시사, 통계연보, 도시계획 관련 학술서를 함께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The essay traces how Daejeon, unlike Korea’s ancient capitals, rose as a modern city from the railway age. 

The Hanbat plain, once farmland, became a hub when Gyeongbu and Honam lines crossed, drawing Japanese settlers who laid out a station-centered colonial town. 

Under Japanese rule, bridges, the Chungnam provincial office and city planning made Daejeon a key regional center.

After liberation, highways, industrial growth and the Daedeok research complex recast it as Korea’s leading science city, while promotion to direct-controlled and later metropolitan status fixed its rank. 

Recent decline and redevelopment in the old downtown show how transport, government, science and culture now layer to form Daejeon’s shifting urban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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