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乙未事變) 종합 보고서
1. 사건 개요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수도 한성에서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총지휘 아래 일본군 수비대, 일본인 낭인(浪人), 그리고 조선인 협력자들이 국왕의 거처인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국모(國母)인 명성황후를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 즉 을미사변(乙未事變)은 단순한 암살 행위를 넘어, 일본 제국주의가 타국의 주권을 공공연히 유린한 명백한 국가 주도 테러 행위였다.
범인들은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신을 석유에 적셔 소각하는 야만적인 만행까지 저질렀다.
사건 직후 일본은 친일 성향의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극단적인 폭력은 일본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조선 민중의 반일 감정을 극대화시켜 전국적인 항일 의병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으로 이어져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본 글은 이처럼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바꾼 을미사변의 배경, 전개 과정, 그리고 그 역사적 파장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살해(殺害)’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 협력자인 우범선 등을 범인으로 조작하여 이 사건이 조선 내부의 문제인 것처럼 위장하고자 ‘시해(弑害)’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시해’는 전통적으로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하극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는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용어적 조작이었다.
따라서 제3자의 관점에서 객관적 사실을 기술하기 위해 중립적 용어인 ‘살해’로 표기한다.
2. 사건의 배경: 격동하는 동아시아와 조선의 외교적 고립
을미사변은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는 1894년 청일전쟁 이후 급변하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이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였다.
일본의 군사적 팽창과 이에 맞선 조선의 외교적 활로 모색이 충돌하며 비극의 서막이 열렸다.
2.1. 청일전쟁 승리, 그리고 삼국간섭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4월, 청나라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상실시키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함께 타이완, 요동 반도를 할양받았다.
이는 일본의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음을 의미하는 중대한 외교적 승리였다.
그러나 일본의 급격한 팽창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우려한 서구 열강의 개입을 초래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의 요동 반도 영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강력한 압력을 가했다.
이것이 바로 삼국간섭(三國干涉)이다.
세 열강의 군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한 일본은 결국 막대한 희생을 치러 얻은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해야 했다.
이 사건은 일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외교적 굴욕으로 각인되었으나, 조선에게는 일본을 견제할 새로운 외교적 가능성을 시사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2.2. 명성황후의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 본격화
삼국간섭을 통해 러시아의 힘을 확인한 명성황후와 고종은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의 공조를 강화하는 '인아거일(引俄拒日)' 노선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는다'는 의미의 외교 전략이었다.
조선 왕실은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언을 구했고, 이완용, 이범진 등 친러 성향의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여 내각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일본의 영향력 아래 수립되었던 친일 내각은 점차 힘을 잃었고, 갑오개혁 역시 무력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조선의 친러시아 행보는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일본의 극심한 위기감을 자극했다.
2.3. 일본의 위기감과 '여우사냥'의 서막
조선에서의 영향력 상실에 위기감을 느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기존의 온건파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경질하고, 강경파인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새로운 공사로 임명했다.
1895년 9월 1일 부임한 미우라는 조선 왕실의 경계심을 낮추기 위해 치밀한 위장술을 펼쳤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척 염주를 돌리고 불경을 외우며 두문불출하여 '염불 공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이는 잔혹한 계획을 숨기기 위한 기만술에 불과했다.
미우라는 부임 직후부터 명성황후를 제거하여 조선의 친러 정책을 와해시킬 극단적인 계획, 즉 '여우사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외교적 선택이 일본의 야만적 폭력성을 일깨운 순간이었다.
|
| 미우라 고로 |
3. '여우사냥': 치밀하게 계획된 국가 테러
작전명 '여우사냥(狐狩り)'으로 명명된 명성황후 살해 계획은 단순한 암살 모의를 넘어선, 일본 공사관이 총지휘하고 군인, 경찰, 언론인, 민간인 낭인, 그리고 조선인 협력자까지 동원된 조직적인 국가 범죄였다.
이들은 범행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을 조선의 내부 분쟁으로 위장하기 위해 치밀한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3.1. 일본 공사관의 비밀 계획 수립
1895년 10월 3일,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미우라 고로 공사를 필두로 공사관 1등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 궁내부 고문 오카모토 류노스케 등이 모여 구체적인 암살 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이 세운 계획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았다.
1. 명분 조작: 명성황후의 정적인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조선의 내부 쿠데타'로 위장한다.
2. 실행 주체 위장: 실제 살해는 일본 낭인들이 담당하되, 조선군 훈련대가 주도한 것처럼 꾸민다.
3. 책임 회피: 사건이 불거질 경우,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민간인들의 우발적 행동으로 발뺌한다.
3.2. 실행 인력 동원: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
암살 작전의 실행을 위해 다양한 인력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폭력배가 아닌, 이념적으로 무장된 집단이었다.
• 일본 낭인:
◦ 일본어 신문 《한성신보》의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蔵)를 중심으로 기자, 편집장 등 직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 구마모토현 출신 인사들을 비롯하여, 극우 국수주의 단체 현양사(玄洋社) 소속 단원과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엘리트 학생들이 포함된 수십 명의 자객이 동원되었다.
이는 범행의 이념적, 지식적 배경을 시사한다.
• 조선인 협력자:
◦ 일본의 지원으로 창설된 신식 군대 훈련대(訓練隊)의 대대장들이 포섭되었다.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은 훈련대 해산 계획을 미우라에게 밀고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 제1대대장 이두황(李斗璜)은 처음에는 가담을 거부했으나, 미우라가 '거부하면 즉시 체포하여 구금하겠다'고 협박하자 강압에 못 이겨 동참하게 되었다.
|
|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들 (한성신보 사옥 앞에서) |
3.3. 흥선대원군을 이용한 명분 확보
일본은 사건을 '조선의 내부 분쟁'으로 위장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장치로 흥선대원군을 이용했다.
명성황후와의 오랜 정적 관계를 활용하여 그를 쿠데타의 명목상 수장으로 내세운 것이다.
1895년 10월 6일,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을 찾아가, '거사 후 정사에 간섭하지 말 것'을 포함한 4개조 약조문에 서명을 받아내 사실상 정계 은퇴를 강요했다.
또한, 작전 당일 새벽 대원군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고유문을 작성하여 한양 시내에 부착했다.
"근일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하고 5백 년 종사도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고종)를 보익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 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이 고유문은 명성황후 살해를 대원군이 주도한 정당한 거사로 포장하려는 일본의 기만적인 전략을 명백히 보여준다.
모든 계획과 인력 동원이 완료되면서, 경복궁의 비극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4. 1895년 10월 8일: 사건의 시간 순 재구성
각종 사료와 당시 사건을 목격했던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사바틴(A. I. Seredin-Sabatin), 미국인 선교사 릴리어스 언더우드(Lilias Underwood) 등 외국인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의 전모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4.1. 새벽, 경복궁 기습
당초 작전 실행일은 10월 10일이었으나, 10월 7일 고종이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던 조선군 훈련대(訓練隊)의 해산을 결정하면서 계획은 급박하게 변경되었다.
훈련대 해산 이전에 거사를 치러야 했던 미우라 고로는 실행일을 10월 8일 새벽으로 앞당겼다.
새벽 3시경, 흥선대원군을 태운 가마가 공덕리 아소정을 출발했고, 서대문 부근에서 우범선과 이두황이 이끄는 조선 훈련대 병력 및 일본 낭인들과 합류하여 광화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계획과 달리 시간이 지체되면서 동이 틀 무렵에야 궁궐에 도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예정에 없던 수많은 목격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4.2. 궁궐 수비대의 저항과 무력화
폭도들은 광화문, 춘생문, 추성문 등 여러 경로를 통해 궁궐 내부로 침투했다.
궁궐을 수비하던 시위대(侍衛隊)는 미국인 교관 윌리엄 다이(William McEntyre Dye)의 지휘 아래 저항했으나,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무기와 탄약을 대부분 빼앗긴 상태였기에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고종의 신임을 받아 새로 훈련대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던 홍계훈(洪啓薰)은 반란에 가담한 훈련대 병사들을 꾸짖고 제지하려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그는 임오군란 당시에도 명성황후를 호위하여 피신시켰던 충신이었다.
4.3. 건청궁에서의 만행
궁궐 수비대가 무력화되자, 일본 낭인들은 명성황후의 거처인 건청궁(乾淸宮)으로 난입하여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 건축가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에 따르면, 그 상황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폭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구타하며 왕비의 위치를 캐물었고, 일부 궁녀들은 2미터 높이의 창밖으로 내던져지는 등 잔혹한 폭력에 시달렸다.
폭도들은 고종의 어깨를 밀치고 위협했으며, 세자(훗날 순종)의 머리채를 잡아 관을 벗기고 칼로 위협하는 등 왕과 세자에 대한 모욕과 위해를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세자빈(훗날 순명효황후)은 복부를 가격당하는 폭행을 당했다.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은 명성황후를 보호하기 위해 폭도들 앞을 가로막다 권총에 맞고, 이어 낭인들의 칼에 두 팔이 잘리는 등 무참히 살해당했다.
|
| 사건 현장인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
4.4. "왕비, 왕비 어디 있어": 명성황후 살해
건청궁을 헤집고 다니던 폭도들은 "왕비, 왕비 어디 있어"라고 외치며 광란의 수색을 벌였다.
마침내 곤녕합(坤寧閤)의 옥호루에서 궁녀들 사이에 변복을 하고 숨어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선교사 릴리어스 언더우드의 기록에 따르면, 폭도들은 시해 후에도 확신이 서지 않자 교활한 계략을 사용했다.
그들은 궁녀들을 시신 앞으로 끌고 와 갑자기 시신을 보여주었고, 공포에 질린 궁녀들이 "중전마마! 중전마마!"라고 외치자 비로소 자신들이 찾던 인물임을 확인했다.
낭인들은 칼로 명성황후의 신체를 수차례 찔러 잔혹하게 살해했다.
4.5. 증거 인멸: 시신 소각과 유기
미우라 고로는 범행의 증거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직접 시신 소각을 명령했다.
낭인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이불에 싸서 건청궁 동쪽의 녹산(鹿山) 숲으로 옮긴 뒤, 그 위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시신은 한 줌의 재로 변했으며, 그나마 남은 유골마저 경회루 연못에 버려져 완전한 증거 인멸이 이루어졌다.
한 나라의 국모가 적국의 손에 처참히 살해되고 그 존엄성마저 철저히 짓밟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5. 사건의 여파와 국내외 반응
명성황후 살해라는 극단적인 사건은 조선의 정국을 안정시키고 일본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려던 일본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 야만적인 폭력은 조선 민중의 격렬한 저항을 촉발하고 국제 사회의 거센 비난을 초래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뒤바꾸는 분수령이 되었다.
5.1. 일본의 책임 회피와 여론 조작
사건 직후 미우라 고로는 본국에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쿠데타'라는 내용의 허위 보고를 보냈다.
국제적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포함한 관련자 56명을 일본 히로시마 법정에 세웠다.
그러나 재판부는 '증거 불충분'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석방했다.
이후 히로시마 재판은 사법 정의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의도적인 전복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는 국제적 비판을 무마하는 동시에 가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기만적인 정치적 행위였다.
이 재판 결과는 역설적으로 일본 국가가 최고위층 수준에서 이 범죄에 연루되었음을 방증하는 강력한 정황 증거로 작용한다.
5.2. 친일 내각의 출범과 단발령
을미사변 직후, 일본의 비호 아래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제4차 친일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들은 고종의 의사와 무관하게 명성황후를 '서인(庶人)'으로 강등하는 조칙을 발표했다.
이에 태자(순종)가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며 거세게 항의하자, 마지못해 '빈(嬪)'으로 격상시켰으나 이는 민심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어 친일 내각은 '문명개화'를 명분으로 성인 남성의 상투를 자르도록 강제하는 단발령(斷髮令)을 공포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유교적 가치관이 깊었던 조선 사회에서 단발령은 국모 살해에 대한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5.3. 국권 수호 운동의 불길: 을미의병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왜적을 토벌하자"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전국의 유생과 백성들을 분노케 했다.
마침내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기치 아래 제천의 유인석, 춘천의 이소응 등 유생들이 주도하는 을미의병(乙未義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지방 관아를 점령하고 친일 관료와 일본인들을 처단하며 기세를 올렸다.
을미의병은 비록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항일 의병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5.4. 아관파천(俄館播遷)과 정국의 급변
친일 내각과 일본군의 감시 아래 신변에 극심한 위협을 느낀 고종은 극비리에 궁궐 탈출을 계획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왕태자와 함께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정국은 급변했다.
고종이 러시아의 보호 아래 들어가자 김홍집 친일 내각은 즉시 붕괴되었고, 일본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반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극대화되었고, 정국의 주도권은 친러 세력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명성황후 살해는 일본에게 단기적인 성공을 안겨주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6. 을미사변의 역사적 의의
을미사변은 일본 제국주의가 자국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국의 주권을 무력으로 짓밟고 국모를 살해한 '국가 주도 테러'로 규정할 수 있다.
한 국가의 외교관과 정규군이 수도 한복판의 왕궁에 침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신까지 훼손한 이 사건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야만적인 만행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조선 민중의 반일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전국적인 의병 항쟁을 촉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대의명분은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냈고, 이후 끈질기게 이어진 항일 무장 투쟁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을미사변이 촉발한 아관파천은 일본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세력 균형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조선의 국권이 외부 세력에 의해 좌우되는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한계를 지니지만, 동시에 일본의 침략 야욕을 일시적으로나마 저지하고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지는 시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결국 을미사변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조선 민중의 끈질긴 저항 의지를 동시에 보여주는, 한국 근대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비극이자 역사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당시 한국·일본·서구 신문과 외교 문서, 세레딘-사바틴·언더우드 등 외국인 증언, 그리고 근현대 연구서를 바탕으로 을미사변의 전개와 배경을 서사 형식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날짜·지명·직책·인물 관계 등은 검증 가능한 사실에 맞추되, 궁궐 내부 상황과 심리 묘사는 독자의 몰입을 위해 최소한의 범위에서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논쟁이 있는 해석은 단정하지 않으려 했으며, 만약 본문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을 발견하시면 최신 연구와 1차 사료를 근거로 알려 주시면, 글을 보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The Eulmi Incident of 1895 was a Japanese state-sponsored assassination of Queen Min that reshaped Korea’s modern history.
After Japan’s victory in the First Sino-Japanese War, the queen turned to Russia to curb Japanese influence.
Fearing loss of control, Miura Goro gathered soldiers, ronin and Korean collaborators, using Heungseon Daewongun as a political front.
Before dawn on October 8 they stormed Gyeongbokgung, overpowered the guards and found the queen in Geoncheonggung.
She was killed and her body burned to hide the crime.
Japan installed a compliant cabinet, but the murder sparked righteous-army uprisings, sharpened anti-Japanese anger and drove King Gojong to seek refuge in the Russian legation.
.jpg)


.jp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