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통일의 마지막 조각: 전사왕 이드리드와 노섬브리아의 끝 (Eadred)


잉글랜드 통일의 마지막 조각: 전사왕 이드리드(Eadred) 이야기


예상치 못한 왕의 등장

10세기 중반, 잉글랜드는 하나의 거대한 꿈, 알프레드 대왕 시절부터 이어진 웨식스 가문의 오랜 염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분열된 앵글로색슨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 통일 잉글랜드를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위대한 과업의 마지막 주자로 역사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드리드(Eadred, 재위 946-955) 왕입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두 형이 거의 완성한 그림에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춰 넣을 운명을 짊어진 인물이었습니다.

이드리드의 즉위는 결코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습니다. 

946년 5월 26일, 그의 형이자 국왕이었던 에드먼드 1세가 연회 도중 난입한 도적과 싸우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위 계승자였던 에드먼드의 두 아들, 이드위그(Eadwig)와 에드거(Edgar)는 왕국을 이끌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이 비극적인 공백 속에서, 귀족들은 에드먼드의 동생인 이드리드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처럼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그의 운명은, 수십 년에 걸친 통일 전쟁의 마지막 장을 책임지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웨식스 왕조 제3대 국왕 이드리드


1. 최대의 난관: 북부의 반란과 바이킹 왕

이드리드 통치의 가장 큰 도전은 북부의 바이킹 왕국 노섬브리아를 완전히 복속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곳은 웨식스 가문의 대업을 가로막는 마지막 장애물이자, 통일 잉글랜드라는 거대한 꿈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변수였습니다.


1.1. 배신과 에이리크 블로됙스의 등장

이드리드는 즉위 직후 노섬브리아의 귀족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947년, 요크의 대주교 울프스탄(Wulfstan)을 필두로 한 노섬브리아의 실력자들은 맹세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노르웨이에서 쫓겨난 바이킹 왕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Eric Bloodaxe)'를 자신들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피도끼왕'이라는 악명 높은 별명으로 불린 에이리크의 등장은 갓 통일된 잉글랜드 왕국에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영토 일부를 잃는 것을 넘어, 웨식스 가문이 여러 세대에 걸쳐 쌓아온 통일의 대업 자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특히 대주교 울프스탄의 배신은 이드리드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신의 대리인이자 북부의 정신적 지주가 반란의 중심에 섰다는 사실은, 북부가 잉글랜드의 통치를 얼마나 격렬히 거부하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증거였습니다.


1.2. 왕의 분노: 노섬브리아를 향한 진격

왕의 귀에 들어온 배신의 소식은 즉각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드리드는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직접 군대를 이끌어 북쪽으로 진격했습니다. 

그의 분노는 반란의 배후인 울프스탄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리펀(Ripon)의 대성당을 불태우는 것으로 폭발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파괴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신성한 장소를 불태워서라도 배신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의 강력하고도 개인적인 경고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임무를 마친 이드리드의 군대가 남쪽으로 돌아오던 길에 캐슬퍼드(Castleford)에서 에이리크의 바이킹 군대로부터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패배는 이드리드를 좌절시키는 대신 오히려 그의 분노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는 다시 돌아가 노섬브리아 땅을 완전히 초토화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왕의 무서운 기세에 겁을 먹은 노섬브리아 귀족들은 결국 자신들이 왕으로 세웠던 에이리크를 버리고, 막대한 보상금을 바치며 이드리드에게 다시 한번 항복했습니다.


1.3. 끝나지 않은 싸움: 마지막 저항

그러나 노섬브리아의 항복은 또 다른 기만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독립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북부는 이후 몇 년간 배신과 복속이 반복되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노섬브리아의 변덕스러운 귀족들은 마치 문을 돌리듯 바이킹 왕들을 갈아치웠습니다. 

950년경에는 더블린의 바이킹 왕 올라프 시그트뤼그손(Olaf Sihtricson)을 왕으로 추대하며 반기를 들었고, 이드리드가 952년 반란의 뿌리였던 울프스탄 대주교를 체포하자 이번에는 올라프를 몰아내고 또다시 에이리크 블로됙스를 왕좌에 앉혔습니다. 

이 끊임없는 저항에 맞서 마침내 954년, 노섬브리아의 유력자들은 에이리크를 몰아내고 이드리드에게 복속을 선택했습니다. 

이번에는 흔들림 없는 ‘영구적 전환’이었습니다

그는 노섬브리아의 마지막 바이킹 왕 에이리크 블로됙스를 최종적으로 축출했습니다. 

하지만 에이리크의 최후는 영광스러운 전투 속 전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지자들에게 버림받고 도망치던 중, 이드리드의 지지자였던 오스울프(Osulf) 백작의 계략에 빠져 매복 공격으로 암살당했습니다. 

이 배신으로 얼룩진 죽음은 북부 바이킹 시대의 허무한 종말을 상징했습니다.

"이로써 노섬브리아는 7왕국 중 마지막으로 잉글랜드에 완전히 합병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한 명의 바이킹 왕을 몰아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수 세기 동안 잉글랜드의 정치적 분열을 상징했던 노섬브리아가 영구적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일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왕이 사라진 자리’였습니다. 

954년 이후 노섬브리아는 더 이상 ‘바이킹 왕’을 갈아 끼우는 왕국이 아니라, 잉글랜드 왕권 아래에서 유력자가 통치하는 체제로 재편됩니다. 

에이리크의 죽음 뒤 오스울프(Oswulf)가 노섬브리아의 백작으로서 왕을 대신해 북부를 다스리게 되었다는 전승은, 그 변화가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이드리드 통치시기의 잉글랜드 지도(946-955)


2. 통일 왕국의 통치

2.1. 왕의 조력자들

이드리드의 통치는 강력한 조력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의 곁에는 왕국을 떠받치는 세 기둥과도 같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의 어머니 애드기푸(Eadgifu)로, 국왕의 어머니로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아들의 통치를 든든하게 뒷받침했습니다. 

둘째는 동앵글리아의 유력자(Ealdorman) 애설스탠 "하프킹(Half-King)"이었습니다. 

'절반의 왕'이라는 별명처럼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그는 왕국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장이자 이드리드가 가장 신뢰했던 친구이자 조언가인 세인트 던스탄(St. Dunstan)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영적인 지주이자, 훗날 잉글랜드 교회를 바꿀 개혁 운동의 핵심 동반자였습니다.


2.2. 신앙과 개혁

이드리드는 매우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던스탄이 주도한 베네딕토회 수도원 개혁 운동의 강력한 후원자였습니다. 

이 운동은 당시 세속화되었던 수도원에 엄격한 규율을 다시 도입하여 잉글랜드 교회의 영적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이드리드는 애빙던(Abingdon)과 같은 수도원에 토지를 기부하고 직접 재건을 돕는 등, 교회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의 지원은 훗날 조카 에드거 왕 시대에 개혁 운동이 꽃피울 수 있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깊은 신앙심과 수도원 공동체에 대한 지원은 그가 지병으로 쇠약해졌을 때 왕국의 행정적, 정신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3. 짧은 생애와 위대한 유산

3.1. 전사왕을 쓰러뜨린 병마

이드리드는 평생 동안 심각한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만성적인 소화기 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 시대의 기록은 그가 "음식의 즙만 빨아먹고 나머지는 뱉어냈다"고 묘사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쇠약해지는 육체는 그가 통치 후반기에 국정의 많은 부분을 던스탄과 같은 신뢰하는 조언가들에게 위임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장을 누비며 북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국을 통일하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약한 육체에 깃든 강인한 정신력이야말로 그가 '전사왕'으로 불릴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3.2. 이드리드의 역사적 평가

결국 오랜 병마를 이기지 못한 이드리드는 955년 11월 23일, 3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고, 그의 삶은 병마와의 싸움으로 점철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잉글랜드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끈질기게 저항하던 노섬브리아의 바이킹 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잉글랜드 왕국에 영구적으로 통합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이드리드는 비록 그의 형 애설스탠이나 조카 에드거처럼 화려하게 조명받지는 못하지만, 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 알프레드 대왕부터 시작된 웨식스 가문의 잉글랜드 통일이라는 거대한 과업의 '마지막 조각'을 맞춘 왕이었습니다. 

짧은 재위 기간과 평생을 괴롭힌 질병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위대한 유산을 남긴 그는, 역사가 기억해야 할 진정한 '명군(明君)'이었습니다.


이 글은 10세기 잉글랜드 통일 과정과 이드리드(Eadred)의 재위를 다룬 서사형 역사 글입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같은 당대 기록과 후대 연구에서 공통으로 확인되는 흐름을 뼈대로 삼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전환·심리 묘사·문장 리듬은 서사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다만 10세기 자료는 기록이 간략하고, 인명·지명 표기(예: 전투·추격 지점)와 사건의 해석(노섬브리아 귀족들의 선택, 에이리크의 최후 배후 등)이 판본·연구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일부 표현은 “정황상 가능성이 큰 서술”로 이해해 주시고, 학술적 확정이 필요한 대목은 별도의 사료 대조를 권합니다.


In 946, Eadred took the throne after his brother Edmund I was killed, leaving Edmund’s sons too young to rule. 

His reign focused on Northumbria, where elites repeatedly shifted between submission and Viking kings such as Erik Bloodaxe and Olaf Sihtricson, with Archbishop Wulfstan a key figure. 

Eadred struck back hard—including the burning of Ripon—and kept applying pressure until, in 954, Erik was driven out and killed and Northumbria came under lasting royal control. 

Backed by Eadgifu, Athelstan “Half-King,” and Dunstan, Eadred aided monastic reform despite illness, dying childless in 955 after completing England’s final unification step.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