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 ‘발견’은 누구의 말인가: 콜럼버스 이후 수탈의 연대기 (Discovery of the New World)


신대륙 '발견'의 재해석: 서구의 욕망이 그린 수탈의 연대기


'발견'이라는 이름의 신화

우리가 오랫동안 교과서에서 배워온 '신대륙 발견'이라는 용어는 승자의 시선으로 쓰인 역사의 대표적인 예시다. 

이 표현은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를 문명사적 전환점으로 미화하지만, 그 이면에는 서구의 팽창주의적 욕망과 그것이 낳은 정복, 수탈, 그리고 파괴의 역사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발견'이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서구 중심적이며,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수많은 원주민의 존재를 지우고, 일방적인 침략의 역사를 가리는 정교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기능해왔다.

본 에세이는 이러한 서구 중심적 역사관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콜럼버스의 항해를 둘러싼 다층적인 의미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첫째, 콜럼버스의 항해가 향신료와 황금에 대한 서구의 물신적 욕망의 발현이었음을 규명할 것이다. 

둘째, '유토피아'와 '엘도라도'와 같은 이상향의 허상이 어떻게 신대륙을 욕망의 투영 대상으로 만들고 정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는지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영화적 서사를 통해 지배자의 기록에서 소외된 원주민의 시점에서 파괴와 종속의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발견'이 아닌 '수탈'의 연대기로서 신대륙의 역사를 조명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단일한 역사적 서사를 넘어, 다양한 시각이 교차하는 역사의 진실에 다가서려는 비평적 시도이다.


유럽인들 입장에서의 신대륙 발견 New world / New continent(밝은 녹색)


1. 서쪽으로의 항해: 욕망의 기원과 정당화의 논리

15세기 후반, 유럽은 동방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지정학적 위기를 마주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만 했다. 

이 절박한 상황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미지의 항해를 추동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유럽의 서쪽으로의 항해는 단순한 지리적 탐험을 넘어, 향신료와 황금에 대한 뜨거운 물질적 욕망과 현실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관념적 이상이 기묘하게 결합된 복합적인 여정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새로운 길의 모색

1453년,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초대형 화포 앞에 무너진 사건은 유럽 세계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이 사건은 천 년을 이어온 동로마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을 뿐만 아니라, 동방으로 향하는 길에 대한 불안정성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유럽인들은 동방의 부를 향한 열망을 실현할 안정적인 대안으로서 대서양 너머의 새로운 항로에 더욱 절실히 눈을 돌리게 되었다. 

향신료에 대한 꿈, 즉 동방의 부를 향한 열망은 이제 미지의 바닷길을 통해 실현되어야만 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유럽인들의 시선을 대서양 너머 서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로마-오스만 전쟁의 끝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상향의 투영: '유토피아'라는 환상

서구인들의 서진(西進) 욕망을 부채질한 것은 물질적 탐욕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정신세계 깊숙한 곳에는 현실의 탐욕과 불의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 '유토피아'에 대한 오랜 갈망이 잠재해 있었다. 

토머스 모어의 저작으로 널리 알려지기 훨씬 이전부터, 플라톤이 묘사한 '아틀란티스'나 헤브라이즘의 '낙원' 개념은 서구 사회에서 이상 세계의 원형으로 존재해왔다. 

특히 재산 공유를 통해 사회적 부정과 불행을 해결하려 했던 유토피아의 개념은, 사유재산과 그로 인한 갈등이 없는 완벽한 공간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 

이러한 관념은 아직 유럽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신대륙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들은 그곳을 타락하지 않은 순수한 '낙원'이자, 자신들이 꿈꾸던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무결점의 공간으로 상상했다.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의 아틀란티스 지도. 대서양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1669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


황금의 신기루: '엘도라도'라는 욕망

유토피아라는 관념적 이상이 정복의 배경을 제공했다면, '엘도라도' 신화는 정복을 실행에 옮기는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동기였다. 

온몸에 황금을 바른 왕이 다스리는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에 대한 소문은 정복자들의 탐욕을 극도로 자극했다. 

이 황금향의 환상은 목숨을 건 원정과 정복 활동을 합리화하는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 

수많은 탐험가들이 엘도라도를 찾아 나섰지만, 그들을 기다린 것은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원주민의 저항뿐이었다.

신화적인 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마주한 정복자들은 깊은 환멸에 빠졌다. 

그리고 이 좌절감은 즉각적인 황금의 꿈이 깨진 자리에서 더 체계적이고 무자비한 폭력으로 전환되었다. 

낭만적 탐욕의 허상이 걷히자, 이제 그들은 신대륙의 자원과 원주민의 노동력을 직접 착취하는 ‘합리적’ 수탈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G. 블라우가 1635년경에 제작한 남아메리카 북동부 지역 , 파리마 호수(Parime Lacus),
그리고 엘도라도(스페인어: El Dorado→황금으로 된 것)로 가는 항로를 보여주는 놀라운 지도


이처럼 유럽의 서쪽으로의 항해는 단순히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지리적 탐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향신료와 황금에 대한 물질적 탐욕과 유토피아, 엘도라도라는 이상화된 허상이 뒤섞인 복합적인 욕망의 투영이었다. 

특히 엘도라도라는 환상의 실패는 낭만적 탐험의 종언이자, 원주민에 대한 조직적 수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유토피아와 엘도라도가 욕망의 감정이라면, 욕망을 ‘권리’로 바꾸는 문서들은 차가운 언어였다.

정복은 언제나 칼로만 시작되지 않는다.

정복은 먼저 지도 위에 그어진 선과, 법과 신의 이름으로 쓰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마주한 문제는 단순했다.

‘어디까지가 내 몫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다에서가 아니라, 교황의 칙서와 조약문에서 만들어졌다.

1493년의 교황 칙서 Inter caetera(인터 카에테라)는 ‘새로 발견된 땅’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재배치했다.

이어 1494년의 Treaty of Tordesillas(토르데시야스 조약)는 대서양 한가운데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그 선의 동쪽과 서쪽을 서로 다른 왕관의 소유로 나누었다.

아직 보지도 못한 땅이,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이름도 묻지 않은 채, ‘합의된 소유’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과정에서 ‘발견’은 탐험의 단어가 아니라 소유의 단어로 변질된다.

서구가 만들어낸 이 문서들의 논리는 단순하지만 강력했다.

이미 사람이 살고 있더라도, ‘기독교 세계가 인정한 권리’가 먼저 도착하면 그 땅은 비어 있는 것처럼 취급될 수 있다는 논리.

그리고 그 논리가 정복을 ‘불법’이 아니라 ‘정당한 절차’로 위장하는 가장 강력한 가면이 되었다.


2. 만남의 실체: 낙원의 정복과 수탈의 구조화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투영했던 '낙원'이라는 이상과 그들이 원주민에게 가한 폭력적 현실 사이의 거대한 괴리를 분석하는 것은 신대륙 '발견'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는 서구의 욕망이 어떻게 자신들이 만들어낸 환상을 스스로 파괴하고, 원주민의 삶을 짓밟는 구조적 수탈로 전환되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남'이라는 중립적 단어 뒤에 가려진 일방적인 정복과 학살의 역사를 직시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실체에 다가설 수 있다.


원주민들에게 재앙의 서막인 신대륙 발견


타이노족의 절멸: 만남이 아닌 학살의 역사

서구와의 만남은 신대륙 원주민에게 단순한 문화적 충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조직적인 학살의 시작이었다. 

그 비극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카리브해 타이노족의 운명이다.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했던 땅의 주인이었던 그들은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후 불과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는 질병이나 우연한 충돌의 결과가 아닌, 강제 노동과 폭력, 노예화가 빚어낸 의도된 절멸에 가까웠다.


"발견 25년 후 바하마에는 타이노족이 더 이상 없었고... 발견 한 세기 후 타이노족은 카리브해의 모든 섬에서 멸종했다."


※최근 타이노족의 부흥운동을 푸에르토리코와 미국,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등지에서 후손들이 주도하며, 자신들이 멸종하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전통을 재건하며 자신들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 냉엄한 사실은 '발견'과 '교류'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폭력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원주민에게 서구와의 만남은 곧 종족의 소멸을 의미했다.


타이노족의 대량 학살


금과 은, 자본주의의 문을 연 수탈의 열쇠

라틴아메리카 역사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분석처럼, 신대륙에서 자행된 경제적 수탈의 본질은 유럽 자본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정복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전파라는 숭고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들의 실제 목적은 금과 은을 약탈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갈레아노는 신대륙의 금과 은이 "르네상스가 천국의 낙원의 문과 지상의 자본주의 중상주의의 빗장을 여는 데 사용한 열쇠"였다고 지적한다. 

즉, 아메리카 원주민의 피와 땀으로 채굴된 귀금속이 유럽의 경제적 번영을 이끄는 자양분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종교적 사명은 부의 횡령과 약탈을 정당화하는 편리한 구실로 전락했다.


미시시피 강의 발견: 오른쪽에는 십자가가 땅에 박힌 채 수도승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복'에서 '수탈'로의 심화

초기 정복자들이 땅을 점령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내 그들의 욕망은 땅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방향으로 심화되었다. 

'정복(Conquest)'은 곧 토지의 모든 자원과 그곳에 사는 인간까지 소유물로 간주하는 '수탈(Exploitation)'로 논리적으로 귀결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땅의 주인이 되는 것을 넘어, 그 땅에서 나는 금은보화는 물론, 목축과 임산물, 심지어 원주민의 노동력까지 자신들의 소유로 규정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수탈을 구조화하고 영속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정복이 수탈로 심화되는 순간, 폭력은 더 이상 즉흥적인 약탈에 머물지 않는다.

폭력은 제도가 된다.

그리고 제도는 ‘합법’이라는 단어를 통해 폭력의 표정을 바꾼다.

대표적인 장치가 encomienda(엔코미엔다)였다.

겉으로는 원주민을 ‘보호’하고 ‘기독교로 인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특정 스페인 정복자에게 원주민 공동체의 노동과 공납을 사실상 배당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배정된 자원’으로 재분류된다.

수탈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라 행정이 되고, 약탈은 ‘관리’의 형식을 띤다. 

이 제도를 떠받친 또 하나의 상징적 폭력이 Requerimiento(레케리미엔토)였다.

정복자들은 원주민 앞에서 스페인 왕권과 교황의 권위를 낭독하며 복종과 개종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면 전쟁과 노예화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여기에는 대화의 흔적이 없다.

상대가 이해하든 말든, 그저 ‘낭독’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정복의 절차가 된다.

말은 설득이 아니라 도장이고, 문장은 칼보다 먼저 도착하는 명령서가 된다. 


물론 이러한 제도가 언제나 순조롭게 굴러간 것은 아니다.

스페인 내부에서도 원주민 처우를 둘러싼 규정이 만들어지고 수정되었지만, 그 규정들은 현장의 탐욕과 폭력을 멈추기에는 너무 늦거나 너무 약했다.

그래서 ‘정복’은 점점 더 효율적인 ‘수탈 시스템’으로 정착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신대륙의 비극은 단지 잔혹한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잔혹함을 반복 가능하게 만든 구조의 문제였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서구인들이 꿈꿨던 신대륙의 '낙원'은 원주민의 고통과 희생 위에 세워진 폭력과 착취의 공간이었다. 

그들이 상상했던 유토피아는 원주민에게는 생지옥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수탈의 구조, 즉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살펴보았다면, 다음 장에서는 역사적 방법론을 전환하여 이 역사가 피해 당사자들에게 ‘어떻게 느껴졌는가’를 그들의 내면화된 기억을 통해 조명하고자 한다.


아나카오나 여왕과 그녀의 신하들의 학살


3. 빼앗긴 목소리: 수탈의 기억과 저항의 서사

역사는 흔히 지배자의 기록으로 채워진다. 

그 과정에서 피지배자의 목소리는 누락되거나 왜곡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역사적 진실에 온전히 다가서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기록의 이면에 숨겨진,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는 추상적인 수탈의 구조를 넘어 억압의 구체적인 경험을 이해하는 길이다. 

서구의 영웅담이 아닌, 수탈당한 이들의 시선으로 그들의 기억과 서사를 재구성할 때, 우리는 비로소 역사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설탕의 눈물: 영화 <나는 쿠바>에 담긴 수탈의 은유

미하일 칼라토조프 감독의 영화 <나는 쿠바(Soy Cuba)>는 서구의 기록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라틴아메리카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낸다. 

영화는 쿠바라는 땅을 하나의 여성으로 의인화하여, 그녀가 콜럼버스를 향해 건네는 독백으로 수탈의 역사를 고발한다. 

처음 만났을 때 노래하고 미소 지으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었다는 순진한 고백은 곧 쓰라린 배신감으로 이어진다. 

특히 설탕에 얽힌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대사는 수탈의 본질을 아프게 관통한다.

"'배들이 저의 설탕을 실어가곤 했지요. 저의 눈물은 남겨두고요. 설탕은 이상하기도 하지요, 콜럼버스님. 눈물이 많을수록 더욱 달콤하니까요.'"

이 대사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흘린 원주민과 노예들의 고통스러운 눈물(노동력)이 곧 서구 자본가들의 달콤한 이윤(설탕)이 되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쿠바의 역사는 설탕으로 대표되는 자원의 수탈과 그 과정에서 비롯된 민중의 눈물로 점철된 역사였던 것이다.


Soy Cuba(1964) 영화 포스터


두 가지 형태의 종속: 자본과 토지의 박탈

<나는 쿠바>는 수탈이 어떻게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두 가지 다른 형태의 종속을 구조화했는지를 심층적으로 묘사한다.


1. 자본에의 종속: 상품화된 정체성 

영화 1부에 등장하는 인물 '마리아'는 '베티'라는 미국식 이름으로 미군들을 상대하며 살아간다. 

그녀는 "Sure, Mister! Baby. Money"와 같은 짧은 영어 단어만으로 고객과 소통하며 자신의 영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의 고유한 정체성이 미국 자본의 논리 아래 어떻게 왜곡되고 상품화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돈을 매개로 한 거래일 뿐이며, 개인의 존엄성이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현실을 고발한다.


2. 삶의 터전 박탈: 조직화된 빼앗김 

영화 2부의 사탕수수밭 농부 '페드로'의 이야기는 개인적 차원의 노동력 착취가 어떻게 거대 자본에 의한 합법적이고 조직적인 '박탈'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준다. 

평생을 바쳐 일궈온 땅의 주인이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농장주로부터 "땅을 유나이티드 프룻(United Fruit)에 팔았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의 집마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게 된 상황은, 개인의 삶의 터전이 글로벌 자본의 계약서 한 장에 의해 무참히 빼앗기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분노한 페드로가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사탕수수밭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은 수탈이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폭력임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수탈은 총과 채찍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수탈은 언제나 ‘설명’이 필요하다.

왜 빼앗아도 되는지, 왜 지배해도 되는지, 왜 그들의 고통이 ‘질서’로 불릴 수 있는지.

그래서 정복의 시대에는 폭력만큼이나 논리가 자라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논리는 스페인 내부에서도 균열을 낳았다.

16세기 중반, 원주민 정복의 정당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Valladolid debate(바야돌리드 논쟁)는 그 균열을 상징한다.

한쪽에는 원주민을 ‘자연적 노예’처럼 규정하며 전쟁과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시선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그들이 완전한 인간이며 폭력적 정복은 신과 법 앞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맞서는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이 논쟁이 가진 비극은 결론이 아니라 시간에 있었다.

논쟁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신대륙의 현장은 멈추지 않았다.

문장과 논리가 충돌하는 사이, 사람들의 삶은 계속 무너졌다.

‘정복이 옳은가’라는 질문이 제국의 회의실에서 오갈 때, 정복당한 이들의 몸은 이미 제도의 톱니바퀴 속에서 닳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논쟁은 한편으로는 서구 내부의 양심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가 얼마나 오래 ‘인간’의 범위를 선택적으로 설정해 왔는지를 폭로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바로, 설탕의 달콤함 속에 남겨진 눈물의 짠맛이었다.


이처럼 원주민의 시각에서 재구성된 역사는 단순한 피해 사실의 나열을 넘어선다. 

그것은 그들의 삶의 터전과 인간적 존엄성, 그리고 고유한 정체성이 어떻게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는가에 대한 준엄한 고발이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은 오늘날 우리가 '신대륙 발견'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재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는 더욱 깊이 논의될 것이다.


역사의 다층적 의미를 향하여

본 에세이는 '신대륙 발견'이라는 서구 중심적 신화를 해체하고, 그 이면에 감춰진 욕망과 수탈의 연대기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자 했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순수한 탐험 정신의 발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15세기 유럽이 처한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동방의 부, 특히 향신료에 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자 물신적 욕망의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이러한 물질적 탐욕은 '유토피아'와 '엘도라도'라는 관념적 허상과 결합하며 정복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논리를 구축했다. 

서구인들은 신대륙을 자신들의 이상을 투영할 수 있는 텅 빈 낙원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황금의 도시라는 신기루를 좇아 원주민의 땅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 결과, 유럽인들이 꿈꾼 낙원은 원주민에게는 파괴와 절멸의 생지옥이 되었으며, 금과 은의 약탈은 유럽 자본주의의 새벽을 여는 토대가 되었다.


역사는 단 하나의 목소리로만 서술되어서는 안 된다. 

'신대륙 발견'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영웅 서사에서 벗어나, 그들의 정복 행위에 대한 자성적 시각과 함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원주민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복원해야 한다.

 <나는 쿠바>가 보여주듯, 수탈당한 이들의 기억 속에서 역사는 설탕의 달콤함에 섞인 눈물의 짠맛으로 기록된다. 

이는 단순한 피해의 기록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터전이 어떻게 파괴되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발이다.


결론적으로, '신대륙 발견'은 단일한 사건이 아닌, 다양한 시각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복합적인 역사적 현장이다. 

서구 중심의 단선적인 역사관을 넘어, 정복자와 피정복자, 가해자와 피해자의 목소리를 모두 아우르는 다각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재연하고 해석하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과거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콜럼버스의 1492년 항해와 그 이후의 정복·수탈 과정을 “신대륙 발견”이라는 용어가 가리는 폭력의 구조로 재해석한 에세이입니다. 

당시 유럽의 대외 환경, 금·은 약탈과 강제노동 체계, 원주민 사회의 파괴를 큰 흐름에서 설명합니다.

다만 읽기 쉽게 만들기 위해 장면 전환, 비유, 문장 리듬은 서사적으로 구성했습니다. 

특히 영화 <나는 쿠바(Soy Cuba)>는 “사료”가 아니라 “기억과 은유”를 보여주는 텍스트로 인용되며, 그 부분은 역사적 사실의 직접 증거가 아니라 감각적 설명 장치로 이해해 주세요.

역사는 하나의 목소리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도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으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원주민·식민지 연구와 1차 기록(연대기, 왕실 문서, 선교 기록 등)을 함께 대조해 읽어보길 권합니다.


This essay challenges the Western myth of “Discovery” and reads 1492 as the start of conquest and extraction. 

After Constantinople’s fall, Europe’s appetite for spices and gold fused with fantasies of Utopia and El Dorado, driving westward expansion. 

The Americas were imagined as empty space, while Indigenous peoples endured disease, enslavement, and forced labor; the Taíno’s rapid collapse becomes a stark emblem. 

Plundered bullion financed European mercantile growth, turning romantic quests into organized exploitation. 

 Through the colonized viewpoint—echoed in Soy Cuba’s “sugar and tears”—the essay urges a multi-voiced reading of the past rather than a victor’s t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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