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새벽을 연 전사왕, 초고왕 이야기
1. 왕관의 무게와 숙명의 라이벌
백제의 4대 개루왕(蓋婁王)의 시대가 저물어갈 무렵, 나라에는 깊은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숙명의 라이벌, 신라에서 시작되었다.
신라의 아찬(阿飡) '길선(吉宣)'이 반역을 꾀하다 발각되자, 국경을 넘어 백제로 망명해 온 것이다.
이 소식은 즉각 백제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개루왕이 신하들을 불러 모아 어전 회의를 열었다.
"신라가 길선을 즉각 돌려보내라며 으름장을 놓고 있소. 어찌하면 좋겠는가?"
한 신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신라는 우리의 오랜 경쟁자이오나, 반역자를 감싸 안는 것은 외교적 명분을 잃는 일이옵니다. 지금이라도 길선을 넘겨주어 화를 피해야 하옵니다."
그러자 다른 신하가 강하게 반박했다.
"아니옵니다!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우리가 어찌 도망쳐 온 자 하나를 지키지 못해 신라에게 고개를 숙인단 말입니까? 이는 백제의 체면을 깎는 일일뿐더러, 신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사옵니다. 결단코 불가한 일이옵니다."
팽팽한 논쟁 속에서 개루왕은 결국 길선을 내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백제와 신라의 외교 관계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렸고, 국경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감이 흘렀다.
이처럼 위태로운 시기인 166년, 개루왕의 맏아들 초고(肖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관을 썼다.
5대 초고왕으로 즉위한 그는 끓어오르는 갈등의 한복판에서 나라를 이끌어야 할 운명이었다.
젊은 왕은 만백성 앞에 서서 굳은 목소리로 맹세했다.
"과인은 선왕의 뜻을 이어 백제의 강역(疆域)을 굳건히 지키고, 감히 우리를 넘보는 자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백성은 나를 믿고, 나는 백성을 지킬 것이다!"
왕관을 쓴 초고왕의 결의에 찬 눈빛은 남쪽 신라를 향했다.
국경 너머에서 칼을 갈고 있을 숙적 신라 역시 새로운 왕이 오른 백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전쟁은 늘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것 같지만, 기록은 가끔 하늘부터 꺼내 든다.
재위 30년, 별이 동쪽에서 나타나 서쪽으로 흘러간다.
궁궐의 밤은 그날 유난히 길었을 것이다.
점성(별자리로 징조를 읽는 일)을 맡은 자들은 종이를 뒤적이고, 장수들은 술잔을 내려놓고, 백성들은 “올 게 오는가”를 속으로 삼킨다.
그리고 다음 해, 땅이 마르기 시작했다.
2. 신라와의 첫 충돌: 엎치락뒤치락, 소백산맥의 혈투
왕위에 오른 초고왕은 20여 년간 내실을 다지며 국경을 안정시킨 후, 마침내 숙적 신라를 향한 공세로 전환했다.
그는 신라와의 갈등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 공세적으로 나섰다.
188년, 백제군은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며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신라는 당황했지만,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이듬해인 189년 7월, 백제군과 신라군은 구양(狗壤, 지금의 충북 옥천) 에서 정면으로 맞붙었다.
초고왕은 승리를 자신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수많은 병사를 잃고 퇴각한 초고왕은 쓰라린 패배감에 잠 못 이루었다.
그는 패잔병들을 이끌고 돌아온 장수들을 모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패배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 했다. 오늘의 패배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적의 강점은 무엇이었고, 우리의 약점은 무엇이었는가? 철저히 분석하고 대비하여 오늘 흘린 피를 열 배로 되갚아 줄 것이다!"
왕의 꺾이지 않는 의지에 장수들의 눈빛에도 다시금 결의가 차올랐다.
초고왕은 구양에서의 패배를 단순한 실패로 여기지 않고, 더 큰 승리를 위한 값진 교훈으로 삼았다.
그의 첫 시련은 그렇게 끝났지만, 복수의 칼날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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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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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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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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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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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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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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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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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 (충북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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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에 대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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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에서의 패배를 딛고 더욱 강한 복수를 다짐하는 초고왕의 지휘 아래, 백제군은 소백산맥을 다시 피로 물들일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 와산(蛙山)의 함성: 백제의 반격이 시작되다
구양에서의 패배 이후 단 1년 만인 190년, 백제는 복수의 칼을 빼 들었다.
초고왕은 신라 서쪽 국경의 원산향(圓山鄕, 지금의 경북 예천)을 기습 공격해 의도적으로 적을 유인했다.
허를 찔린 신라군은 혼란에 빠졌고, 분노에 차 대규모 추격대를 편성해 백제군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이는 초고왕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백제군은 험준한 와산(蛙山, 지금의 충북 보은) 에 이르러 바위와 숲 속에 몸을 숨기고 매복했다.
추격에 지쳐 경계가 허술해진 신라군이 깊은 골짜기로 들어서는 순간, 초고왕의 신호를 받은 뿔 나팔 소리가 산천을 울렸다.
"백제의 용사들아! 저 오만한 추격자들에게 패배의 쓴맛을 보여주어라! 섬멸하라!"
초고왕의 함성과 함께 사방에서 튀어나온 백제 병사들은 맹렬한 기세로 신라군을 몰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기습과 쏟아지는 화살에 신라군은 대오가 무너지며 대패했고, 백제는 구양 전투의 치욕을 깨끗이 씻어냈다.
와산에서의 대승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초고왕의 정복 활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4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신라의 중요 거점인 요거성(腰車城,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함락시켰다.(논쟁)
이 전투에서 성주 '설부(薛夫)'가 전사하면서 신라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 승리는 초고왕이 단순한 방어자를 넘어, 적의 심장부를 노리는 공격적인 정복 군주로 거듭났음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이었다.
• 와산(蛙山) 대첩: 추격해 오던 신라군을 유인하여 매복 작전으로 크게 격파함으로써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아온 결정적인 전투.
• 요거성(腰車城) 함락: 신라의 중요 거점을 함락시키고 성주까지 죽임으로써 백제의 군사적 위력을 과시하고 신라에 실질적인 타격을 입힌 전투.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며 남쪽 국경을 안정시킨 초고왕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제 북쪽에서 피어오르는 새로운 위협, 검은 그림자를 향하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적만 강해지는 게 아니다.
사람의 마음도 헐어진다.
재위 43년, 메뚜기가 들고 가뭄이 들었으며, 도적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한 줄이 무섭다.
칼로 막는 적은 보이지만, 배고픔과 도적은 마을 안에서 터지기 때문이다.
초고왕이 북방의 위협에 대응하며 성을 쌓고 사람을 옮기는 장면은, 그저 군사 기술이 아니라 ‘무너지는 생활’을 붙잡는 정치가 된다.
4. 북방의 검은 그림자: 말갈족의 침입
남쪽의 신라가 끈질긴 숙적이었다면, 북방의 말갈(靺鞨)족은 예측 불가능한 위협이었다.
그들은 북한강 상류를 타고 내려와 백제의 심장부를 노리는 날랜 기병을 앞세운 유목 민족이었다.(추정)
초고왕은 이 새로운 적에 맞서기 위해 전략적인 대응에 나섰다.
1. 방어선 구축: 210년, 적현성(赤峴城)과 사도성(沙道城)이라는 두 개의 성을 쌓아 말갈의 주요 침입 경로를 차단했다.
2. 인구 이전: 동부 지역의 백성들을 새로 쌓은 성으로 옮겨 국방 인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꾀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갈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214년, 초고왕은 북부 출신 장수 진과(眞果) 에게 명하여 말갈의 석문성(石門城, 지금의 황해도 서흥)을 공격해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말갈의 거센 반격을 불러왔다.
백제의 주력군이 북쪽에 집중된 틈을 타, 말갈의 기병대는 순식간에 남하하여 백제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왔다.
다급한 파발꾼이 왕에게 달려와 외쳤다.
"폐하! 북쪽에서 먼지가 일어나더니, 말갈의 날랜 기병들이 강을 넘어 우리 술천(述川, 지금의 경기도 여주) 땅으로 들이닥치고 있사옵니다!"
술천은 수도 위례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초고왕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이처럼 심장부가 직접적인 위협에 놓인 것은 처음이었다.
남쪽에서는 신라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북쪽에서는 말갈의 기병이 질풍처럼 밀려오는 상황.
초고왕은 두 개의 전선에서 쉴 새 없이 싸워야 하는 고독하고 치열한 군주의 길을 걸어야 했다.
5. 싸움으로 나라를 지킨 왕
초고왕의 재위 48년은 그야말로 전쟁의 시대였다.
그는 즉위와 동시에 신라와의 숙명적인 대결에 뛰어들었고, 북방의 말갈족이라는 새로운 위협에도 맞서 싸워야 했다.
구양에서의 뼈아픈 패배를 딛고 와산과 요거성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며 백제의 군사적 자존심을 세웠고,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아 북방의 침입에 대비하며 국가의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그의 삶은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그는 백제의 초기 군사적 기틀을 다지고 국가의 생존을 책임진 '전사왕(戰士王)' 이었다.
비록 그의 시대에 완전한 평화는 오지 않았지만, 초고왕이 피와 땀으로 남쪽의 신라를 견제하고 북방의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백제는 비로소 내부에 집중하며 힘을 기를 수 있었고, 이는 훗날 근초고왕이 강력한 정복 군주로 등장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략적 발판이 되었다.
그는 싸움으로 나라를 세우고, 싸움으로 나라를 지킨 백제의 진정한 수호자였다.
이 글은 《삼국사기》 등 공개된 사료와 학계의 일반적 견해를 바탕으로, 초고왕(肖古王) 재위기의 전쟁·외교 흐름을 이해하기 쉽게 서사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문의 대사, 심리 묘사, 장면 전개는 독자의 몰입을 위한 문학적 각색이며, 사료가 말해주지 않는 디테일은 사실 단정이 아니라 “가능한 모습”으로만 제시됩니다.
기록이 희박하거나 해석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은 단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원문 사료와 주석·연구서를 함께 대조해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Chogo of Baekje rises amid a crisis with Silla after the Silla official Gilseon defects and is sheltered.
Rejecting Silla's demands, Chogo opens raids: Mosanseong is attacked (188), but Baekje is routed at Guyang (189).
He studies the defeat, then lures pursuers into an ambush at Wasan (190) and later takes Yogeo Fortress (204), securing the southern front.
A new danger follows as Malgal riders strike from the north; Chogo fortifies key passes with Jeokhyeonseong and Sadoseong (210), resettles people for defense, and counterattacks at Seokmunseong (214) even as raids reach Sulcheon.
His long, war-filled reign hardens Baekje's foundations and prepares later expansion. A hard-won legacy st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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