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캔버스에 담긴 삶의 대서사시
1. 20세기 미술의 거인, 피카소를 만나다
20세기 미술의 역사는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라는 거대한 봉우리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그는 단순히 위대한 화가를 넘어, 기존의 미학을 파괴하고 새로운 시각 언어를 창조한 혁명가였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 조각가, 판화가, 도예가로서 일생에 걸쳐 다방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했으며, 특히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입체주의(Cubism)'를 개척하며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서양 미술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곧 현대 미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 글은 피카소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로 보고, 그의 출생부터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갑니다.
사랑과 상실, 전쟁과 평화라는 개인적 삶의 격동이 어떻게 각 예술 시기의 독특하고 강렬한 화풍으로 이어졌는지 탐색하며, 한 천재가 세상을 흡수하고 변형시켜 캔버스 위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과정을 조명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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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피카소 |
2. 예술가의 탄생: 유년 시절과 파리 입성
파블로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남부의 항구 도시 말라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술 교사였으며, 피카소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그림 실력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13세에 아버지로부터 본격적인 미술 교육을 받으며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14세 무렵이 되던 1895년에는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공식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스페인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곧 피카소는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예술 활동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몽마르트의 보헤미안 문화 속에서 그는 앙리 마티스 등 당대의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었고, 이는 그의 예술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피카소가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더 큰 예술 세계로 나아갈 준비를 마친 중요한 도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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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피카소, 1896년 |
피카소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가 가진 것은 거창한 명성이나 든든한 후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처음 몸을 눕힌 곳은 몽마르트 언덕의 가난한 작업실들이 모인 ‘바토 라부아르’ 같은, 말 그대로 ‘예술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낮에는 굶주렸고, 밤에는 술집의 불빛과 화실의 냄새가 뒤섞인 골목을 헤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빈곤과 혼돈이야말로 피카소를 가장 빠르게 단련시켰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동료’이면서 동시에 ‘라이벌’이었고, 그들의 대화는 칭찬이 아니라 서로를 찌르는 질문이었습니다.
“넌 왜 그렇게 그리냐.”
“넌 지금까지 배운 걸 어디까지 부술 수 있냐.”
피카소는 그 질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파리는 그에게 ‘성공’이 아니라 ‘해체’를 가르쳐준 도시였고, 그 해체의 경험이 곧 청색 시대의 깊은 어둠으로 이어집니다.
3. 청색 시대 (1901-1904): 절망을 푸른색으로 그리다
1901년,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카를로스 카사헤마스가 실연의 아픔으로 권총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은 스무 살의 피카소에게 엄청난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의 작품 세계는 깊고 어두운 우울함에 잠기게 됩니다.
이로써 그의 첫 번째 독창적 시기인 '청색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파리에서 겪었던 극심한 가난과 절망, 고독, 친구를 잃은 슬픔 등 개인적인 어려움은 그의 캔버스를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였습니다.
• 주조색: 코발트블루, 청록색, 회색 등 차갑고 우울한 색채가 화면 전체를 지배합니다.
• 주제: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즉 늙은 집시, 굶주린 아이들, 외로운 여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주로 그렸습니다.
• 표현: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를 통해 깊은 우울함, 불안, 내적 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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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Vie (인생) |
대표작으로는 수척한 맹인 노인이 기타를 껴안고 있는 <늙은 기타리스트(The Old Guitarist)>가 있으며, 청색 시대의 정수를 담은 걸작으로는 <인생(La Vie)>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삶의 순환을 상징하는 것을 넘어 피카소의 내밀한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그림 속 남성의 얼굴은 친구 카사헤마스인데, 초기 스케치에서 피카소는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가 친구의 얼굴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친구의 비극에 대한 애도이자,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졌던 자신의 죄책감과 슬픔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의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오른쪽의 어머니와 아이가 '탄생'을, 중앙의 연인이 '사랑'을, 아래 웅크린 인물이 '절망'을 상징하며, 피카소는 삶의 근원적인 고통을 청색의 캔버스 위에 응축시켰습니다.
절망의 푸른빛 속에서도 피카소의 예술적 탐구는 계속되었고, 곧 그의 삶과 캔버스에 새로운 색이 찾아오게 됩니다.
4. 장미 시대 (1904-1906): 사랑과 함께 찾아온 따스한 색채
청색 시대의 긴 터널을 지나던 피카소의 삶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첫 연인 페르난드 올리비에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개인적인 안정과 사랑의 감정은 그의 캔버스에서 푸른색을 걷어내고 따스한 색채를 피워냈습니다.
이 시기를 '장미 시대'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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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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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시대 (Blu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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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시대 (Rose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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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조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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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회색 등 차가운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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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밋빛, 주황색, 갈색 등 따뜻한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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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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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소외,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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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단원, 광대, 곡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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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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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고 무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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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이고 감성적이지만 내면의 고독함이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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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예사 가족 |
이 시기의 대표작인 <곡예사 가족(Family of Saltimbanques)>은 장미 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그림 속 서커스 단원들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평화롭고 낭만적이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어딘지 모를 슬픔과 고독함이 배어 있습니다.
이는 화려한 무대 뒤에 숨겨진 예술가의 내면을 표현한 것으로, 피카소의 깊어진 감성적 표현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장미 시대의 끝자락에서, 피카소는 한 사람의 얼굴을 통해 다음 시대로 넘어갈 문을 살짝 열어젖힙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수집가였던 거트루드 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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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년쯤에 찍은 거트루드 스타인 사진 |
피카소가 그녀를 그린 초상화에서 중요한 건 ‘닮음’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얼굴은 어느 순간부터 부드러운 살결이 아니라, 마치 단단한 가면처럼 굳어갔습니다.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고, 표정은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피카소가 곧 시작할 형태 실험의 예고”를 봤습니다.
그러니까 이 초상화는 장미 시대의 마무리이면서 동시에, 피카소가 ‘사람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기 직전의 경계선 같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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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 |
5. 원시주의와 입체주의의 서막: <아비뇽의 처녀들>
1907년, 파리 아방가르드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 피카소는 당시 야수파의 리더로 군림하던 앙리 마티스의 걸작 <삶의 기쁨(Le bonheur de vivre)>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을 감행합니다.
그는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원시 미술에서 받은 강렬한 영감을 바탕으로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작품을 탄생시킵니다.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입니다.
피카소의 원래 제목은 <아비뇽의 사창가(Le Bordel d'Avignon)>였으나, 시인 앙드레 살몽이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마티스를 비롯한 동료들에게조차 조롱과 비난을 받았지만, 그 혁명성은 다음과 같은 여러 영향의 종합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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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뇽의 처녀들 |
1. 형태의 파괴와 다중 시점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에서 영감을 얻어 전통적인 원근법과 여성 누드의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인체를 각지고 분해된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본 것처럼 표현하여 입체주의 탄생을 예고하는 결정적 시도였습니다.
2. 원시적 표현과 주술적 힘
폴 고갱의 조각 <오비리(Oviri)>에서 느껴지는 '야만적인 힘'과 아프리카 가면의 주술적 표현을 차용하여, 인물들의 얼굴을 가면처럼 묘사했습니다.
이는 문명화된 미학을 거부하고 원시적인 생명력을 캔버스에 담아내려는 의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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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고갱의 조각상 오비리 |
3. 영적이고 묵시록적인 분위기
엘 그레코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에서 보이는 극적인 구도와 종말론적 분위기를 흡수하여, 작품 전체에 불안하고 강렬한 에너지를 불어넣었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처음에는 거부당했지만, 결국 서양 미술의 전통을 전복시키고 20세기 현대 미술의 새로운 문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던진 충격은 곧 20세기 가장 중요한 미술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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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피카소가 1908년 몽마르트르 작업실에서 아프리카 조각품 컬렉션과 함께 있는 모습 |
6. 입체주의 혁명 (1909-1917): 세상을 새롭게 보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시작된 혁신은 동료 화가 조르주 브라크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입체주의(Cubism)'라는 새로운 예술 양식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입체주의의 핵심 개념은 '하나의 대상을 여러 시점에서 동시에 관찰하고, 이를 기하학적 형태로 분해한 뒤, 하나의 화폭에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을 지배해 온 단일 시점의 원근법을 완전히 폐기한 미술사적 혁명이었습니다.
입체주의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뉩니다.
• 분석적 입체주의 (Analytic Cubism): 대상을 잘게 분해하고 기하학적 형태로 재구성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형태의 분석을 강조하기 위해 색채는 주로 갈색, 회색 등 단색조로 제한되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만돌린을 든 소녀(Girl with a Mandolin)>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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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돌린을 든 소녀 |
• 종합적 입체주의 (Synthetic Cubism): 신문지, 벽지 등 실제 사물을 캔버스에 붙이는 '콜라주(Collage)' 기법을 도입했습니다.
형태는 더 단순해지고 색채는 다시 다채로워졌습니다.
대표작 <세 명의 악사(Three Musicians)>는 종합적 입체주의의 정점을 보여주는 걸작입니다.
입체주의라는 거대한 혁명을 이룬 피카소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또다시 새로운 양식의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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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명의 악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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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명의 악사 |
종합적 입체주의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손”을 잠깐 멈추고 “붙이는 손”을 꺼냈을 때 입니다.
그는 정물화 한가운데에 실제 의자 등나무 무늬의 천 조각을 붙이고, 캔버스 테두리에는 밧줄을 둘러 액자 같은 경계를 만들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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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
그 순간, 관람자는 혼란을 느낍니다.
이건 그림인가, 물건인가.
회화는 현실을 ‘흉내 내는’ 예술이라는 오래된 규칙이, 여기서 무너집니다.
피카소는 말로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캔버스에 한 번 붙였을 뿐인데, 미술의 규칙이 뒤집혔습니다.
이 콜라주의 충격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예술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끝없이 되살리는 불씨가 됩니다.
7. 고전과 초현실의 세계 (1920년대-1930년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피카소의 예술 세계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맞이합니다.
그는 입체주의의 극단적인 추상성에서 벗어나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의 영향이 엿보이는 새로운 화풍을 선보이며 끝없는 변신을 시도합니다.
• 신고전주의 (1920년대): 이 시기 피카소는 고전주의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으로 회귀했습니다.
작품들은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구도를 특징으로 하며, 인물들은 마치 거대한 조각상처럼 육중하고 힘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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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그린 유화. 우물가의 세여인 |
• 초현실주의 (1930년대):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초현실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피카소는 이성과 논리를 벗어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왜곡되고 기괴하며, 때로는 악몽 같은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등장했습니다.
1932년은 피카소에게 유난히 ‘사적인 해’였습니다.
그해 그는 한 여인을 반복해서 그리며, 사랑이 인간의 몸과 색을 어떻게 비틀어 바꾸는지 스스로 실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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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마리 테레즈 월터의 초상화. 거울 앞의 소녀 |
첫 번째는 <거울 앞의 소녀> 입니다.
그림 속 여인은 거울을 끌어안듯 마주하지만, 거울 속 얼굴은 단순한 ‘반사’가 아닙니다.
바깥의 얼굴이 젊음이라면, 거울 속 얼굴은 불안이고 예감이고, 어쩌면 시간이 가져갈 그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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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의 꿈 |
두 번째는 <꿈>입니다.
한 오후에 그렸다고 전해지는 이 그림에서, 여인은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잠든 듯 보이지만, 화면 전체는 잠이 아니라 욕망과 무의식으로 진동합니다.
피카소의 사랑은 달콤하기만 한 장미빛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그릴 때조차, 그 속에 숨어 있는 불안과 소유와 흔들림까지 같이 그려 넣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작품은 아름다우면서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한 번 더 찌릅니다.
이 시기는 피카소의 예술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주며, 곧 그의 예술 인생 최고의 걸작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8. 시대의 증언: <게르니카> (1937)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중 나치 독일 공군이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하여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소식에 엄청난 분노와 충격을 받은 피카소는 약 한 달 만에 거대한 벽화 <게르니카(Guernica)>를 완성합니다.
이 작품은 20세기 미술사를 넘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반전(反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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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니카 |
1. 거대한 규모: 높이 약 3.5m, 너비 약 7.8m에 달하는 거대한 캔버스는 보는 이를 압도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2. 단색의 사용: 피카소는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색채를 배제하고 흑백과 회색만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에는 연인이자 사진가였던 도라 마르의 영향이 컸는데, 그녀가 작품 제작 과정을 기록한 흑백 사진들이 이 단색조 구성에 영감을 주어 마치 신문 보도를 보는 듯한 현실감과 긴박감을 더했습니다.
3. 상징적 이미지: 그림 속에는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창에 찔려 울부짖는 말, 파괴된 건물, 무표정한 황소 등 고통받는 인간과 동물들의 이미지가 뒤엉켜 전쟁의 혼돈과 비인간성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게르니카>는 단순히 한 사건을 기록한 그림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잔혹함을 고발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인류 보편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완성 후 이 그림은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게르니카>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증언한 피카소는 종전 이후에도 식지 않는 열정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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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폐허가 된 게르니카 |
9. 전쟁 이후와 말년: 끊임없는 창조의 열정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카소의 작품은 더욱 자유롭고 표현적인 스타일로 변화했습니다.
92세의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그의 창작 에너지는 결코 마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말년에는 두 가지 활동에 몰두하며 예술혼을 불태웠습니다.
• 과거 거장들의 작품 재해석: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nas)>과 같은 과거 거장들의 명작을 자신만의 입체주의적 스타일로 수십 점에 걸쳐 재창조하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이는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내는 그의 독창적인 방식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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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녀들 1656년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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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피카소의 시녀들 |
• 도자기 작업: 1947년부터 1971년까지 남프랑스에 머물며 수많은 도자기 작품을 창조했습니다.
그는 접시, 항아리 등에 황소, 새, 여인의 얼굴 등 지중해의 감성이 듬뿍 담긴 그림을 그려 넣으며 회화와 조각을 넘나드는 새로운 예술 분야를 개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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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들 |
또한, 한국 전쟁의 비극을 다룬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을 제작하고, 1944년에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한 참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당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의 공산당 입당은 내 삶과 내 작업의 논리적인 귀결이며,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나는 이제 그림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전체로 싸워야만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그의 신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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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의 학살 |
피카소가 남긴 평화의 상징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한 장의 이미지로 더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하얀 비둘기.
그는 비둘기를 단순한 장식처럼 다루지 않았습니다.
검은 바탕 위에 떠 있는 하얀 몸, 그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해진 메시지.
전쟁의 참혹함을 흑백으로 그렸던 사람이, 평화를 말할 때도 ‘과잉의 장식’을 버린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피카소의 비둘기는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이제는 멈춰야 한다”는 한 번의 숨 같은 이미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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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파리 평화 회의 포스터에 사용되었으며, 당시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하여 "평화의 비둘기"로 불리게 됨 |
10. 피카소의 뮤즈들: 예술과 사랑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피카소의 이 말처럼, 그의 삶에서 여성들은 단순한 연인을 넘어 예술적 영감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습니다.
새로운 여인의 등장은 그의 화풍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그의 작품 속 여성들은 시대의 뮤즈이자 그의 예술 세계 그 자체였습니다.
• 페르난드 올리비에: 청색 시대의 우울함을 걷어내고 '장미 시대'의 따뜻한 색채를 이끌어낸 피카소의 첫사랑.
• 도라 마르: 초현실주의 사진가이자 화가. <게르니카>의 제작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으며, 전쟁의 고통을 상징하는 걸작 <우는 여인>의 모델이었습니다.
•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낳았으며, 그를 먼저 떠난 유일한 여인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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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즈 질로와 피카소 |
• 자클린 로크: 피카소의 마지막 아내이자 400점이 넘는 작품에 등장하며 그의 말년을 함께한 마지막 뮤즈였습니다.
11. 피카소가 남긴 유산
파블로 피카소는 1973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회화, 조각, 판화, 도자기 등 약 5만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을 남긴, 역사상 가장 다작한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끊임없이 자신의 스타일을 파괴하고 재창조하며 예술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했습니다.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단지 입체주의의 창시나 특정 걸작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통의 관습을 파괴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끊임없이 혁신하며 예술의 경계를 넓힌 불굴의 실험 정신, 그리고 사랑, 정치, 전쟁, 다른 예술가의 작품 등 주변 세계의 모든 것을 흡수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로 변형시키는 연금술과도 같은 능력이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영감과 감동을 주며, 그는 20세기 최고의 예술가이자 영원한 현대미술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생애와 작품 흐름을 널리 알려진 사실(연도·사건·대표작)을 뼈대로 삼아 정리했습니다.
다만 실제 기록에 남지 않는 대화·심리·현장 묘사, 장면 전환을 위한 연결 문장은 독자의 몰입을 위해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특정 작품의 의미 해석처럼 관점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은 (논쟁), 구전이나 일화 성격이 강한 내용은 (전승)으로 표기해 구분하겠습니다.
이 글은 연대기 사전이 아니라, 한 예술가의 사랑·상실·전쟁·실험이 어떻게 화풍으로 바뀌었는지를 따라가는 ‘재구성 서사’로 읽어주세요.
Pablo Picasso (1881–1973) was born in Málaga, trained early by his artist father, and moved to Paris to join the avant-garde.
After Carlos Casagemas’s suicide, the Blue Period (1901–04) turned to poverty and sorrow in cold blues; the Rose Period (1904–06) warmed into circus figures and fragile hope.
In 1907 Les Demoiselles d’Avignon broke classical form and, with African and Iberian echoes, opened the path to Cubism.
Working with Georges Braque, Picasso built analytic and synthetic Cubism, shattering single-point perspective and introducing collage.
After World War I he moved between neoclassical order and surreal distortion.
The 1937 bombing of Guernica sparked his vast monochrome Guernica, a lasting anti-war icon.
He kept creating across media until his death at 92, leaving modern art defined by constant reinv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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